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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 | == 여담 == | ||
* [[박헌영 (당신들의 조선)|박헌영]]의 이름이 들어갔지만, 정작 박헌영 본인은 박헌영주의를 박헌영주의라고 부르지 않았고,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우리식 사회주의' 내지 '마르크스-마오주의'라고 부르고 다녔다. 현재와 같은 이름이 붙은 때는 박헌영 사후 [[강성산 (당신들의 조선)|강성산]] 시절부터로, 현재는 전에 서술한 두 명칭보다 '박헌영주의'라고 더 많이 불리고 있다. | * [[박헌영 (당신들의 조선)|박헌영]]의 이름이 들어갔지만, 정작 박헌영 본인은 박헌영주의를 박헌영주의라고 부르지 않았고,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우리식 사회주의' 내지 '마르크스-마오주의'라고 부르고 다녔다. 현재와 같은 이름이 붙은 때는 박헌영 사후 [[강성산 (당신들의 조선)|강성산]] 시절부터로, 현재는 전에 서술한 두 명칭보다 '박헌영주의'라고 더 많이 불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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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2일 (수) 15:21 판
박헌영주의 / Pakhonyongism
개요
1953년부터 1982년까지 조선을 통치한 정치인인 박헌영의 통치 이념.
마르크스-마오주의라고도 불린다.
배경
내용
자본주의적 시스템 이식
박헌영주의는 소련의 경제학자인 에브세이 리베르만(Евсей Либерман)이 제기한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의 개혁, 개선과 노동자의 물적 자극, 생산성 증진에 관한 논쟁인 리베르만 논쟁에서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일부 반영된 형태를 띄고 있다.[1]
기존의 공산주의와 계획경제 체제는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평등 분배를 중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평등 분배는 결국 '내가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건 똑같은데, 뭣하러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거야?' 라는 의문점을 낳게 되었다. 이에 리베르만 논쟁에서는 노동자들의 물적 자극을 위해 자본주의적 요소인 시장경제를 도입하되, 가격 요소를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투명하게 결정될 수 있도록 하자고 제기하였으며 박헌영주의는 여기서 영향을 받아 실험적인 경제적 탈집중화에 초점을 맞췄다.
권위주의적 철권통치
친소를 기본으로 한 외교정책
1959년 이전까지 조선은 중국과 소련 간 줄타기 외교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담
- 박헌영의 이름이 들어갔지만, 정작 박헌영 본인은 박헌영주의를 박헌영주의라고 부르지 않았고,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우리식 사회주의' 내지 '마르크스-마오주의'라고 부르고 다녔다. 현재와 같은 이름이 붙은 때는 박헌영 사후 강성산 시절부터로, 현재는 전에 서술한 두 명칭보다 '박헌영주의'라고 더 많이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