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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성향의 자유운동 측의 추천으로 수상에 임명된 바크티아르는 부패한 관료들과 인권 탄압을 자행한 공안 관련자들을 체포할 것을 [[팔라비 2세]]에게 '''요구'''하였고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팔라비 2세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또한 바크티아르는 민주화와 복지를 약속하며 성난 민심을 달래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팔라비 2세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정책 시행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중도 성향의 자유운동 측의 추천으로 수상에 임명된 바크티아르는 부패한 관료들과 인권 탄압을 자행한 공안 관련자들을 체포할 것을 [[팔라비 2세]]에게 '''요구'''하였고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팔라비 2세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또한 바크티아르는 민주화와 복지를 약속하며 성난 민심을 달래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팔라비 2세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정책 시행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반란의 영향으로 팔라비 2세가 홧병으로 쓰러지고 아들에게 양위하면서, 방해자가 사라진 바크티아르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파라 황후는 정치적 감각이 떨어졌고 새로 즉위한 [[팔라비 3세|레자 팔라비]]는 아직 너무 젊었기에,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세력은 반군 뿐이었다.
전면적인 봉기의 영향으로 팔라비 2세가 홧병으로 쓰러지고 아들에게 양위하면서, 방해자가 사라진 바크티아르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파라 황후는 정치적 감각이 떨어졌고 새로 즉위한 [[팔라비 3세|레자 팔라비]]는 아직 너무 젊었기에,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세력은 반군 뿐이었다.


바크티아르는 진보 세력의 우상,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의도적으로 언급하고 자신이 그의 노선을 계승하였다고 선전하여 진보 세력을 흡수, 좌익 계열 반군을 분열시켰다. 또한 주도적으로 부패 관료를 숙청해 팔라비 황조가 아닌 자신이 실질적 국가지도자라는 점을 보여주어 '팔라비 폭정 타도'라는 반군의 명분을 약화시켰다.
바크티아르는 진보 세력의 우상,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의도적으로 언급하고 자신이 그의 노선을 계승하였다고 선전하여 진보 세력을 흡수, 좌익 계열 반군을 분열시켰다. 또한 주도적으로 부패 관료를 숙청해 팔라비 황조가 아닌 자신이 실질적 국가지도자라는 점을 보여주어 '팔라비 폭정 타도'라는 반군의 명분을 약화시켰다.
===은퇴 이후===
===은퇴 이후===



2022년 12월 5일 (월) 13:4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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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이란 제국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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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제국 제36·37대 수상
샤푸르 바크티아르
Shapour Bakhtiar | شاپور بختیار
출생 1914년 6월 26일
이란 제국 샤레코르드
사망 1996년 5월 9일 (향년 81세)
이란 제국 테헤란
국적 이란
임기 이란 제국 제36·37대 수상
1979년 8월 20일 ~ 1990년 3월 12일
[ 펼치기 · 접기 ]
종교 시아파 이슬람교
소속 정당
의원 선수 8
의원 대수 ?
성향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온건주의, 개혁주의
약력 이란 전략연구센터 수상고문 (1989~1993)
이슬람 민주당 최고위원(1995~1997)
교육상 (1998~2001)
문화종교상 (2001~2003)
이슬람 민주당 간사장 (2005~2006)
내무상 (2008~2010)
테헤란 광역시장 (2010~2013)
이슬람 민주당 총재 (2013~2021)
부수상 겸 재무상 (2014)
수상 (2014~2021)
이란 이슬람 최고평의회 의원 (2021~)

개요

이란의 제36·37대 수상. 1979년 이란 봉기 수습을 주도한 인물로, 민권법 제정과 복지제도 확립 등 각종 개혁정책을 밀어붙여 현재까지도 이란인들의 존경을 받는 정치인이다.

생애

수상 이전

이란 수상

중도 성향의 자유운동 측의 추천으로 수상에 임명된 바크티아르는 부패한 관료들과 인권 탄압을 자행한 공안 관련자들을 체포할 것을 팔라비 2세에게 요구하였고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팔라비 2세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또한 바크티아르는 민주화와 복지를 약속하며 성난 민심을 달래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팔라비 2세의 눈치를 봐야 했기에 정책 시행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전면적인 봉기의 영향으로 팔라비 2세가 홧병으로 쓰러지고 아들에게 양위하면서, 방해자가 사라진 바크티아르는 오히려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파라 황후는 정치적 감각이 떨어졌고 새로 즉위한 레자 팔라비는 아직 너무 젊었기에,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세력은 반군 뿐이었다.

바크티아르는 진보 세력의 우상,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의도적으로 언급하고 자신이 그의 노선을 계승하였다고 선전하여 진보 세력을 흡수, 좌익 계열 반군을 분열시켰다. 또한 주도적으로 부패 관료를 숙청해 팔라비 황조가 아닌 자신이 실질적 국가지도자라는 점을 보여주어 '팔라비 폭정 타도'라는 반군의 명분을 약화시켰다.

은퇴 이후

평가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이란당 (국민전선) 1949 - 1979 정계 입문, 입당
무소속 1979 - 1988 탈당
1988 - 1996 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