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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7일 (토) 08:15 판

문주국
文洲國
국기 국장
상징
국가 애국가
국조
까마귀(삼족오)
국화
연꽃
위치
width: calc(100% + 5px)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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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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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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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출산율
1.98%
기대 수명
82세
공용어
문주어
지역어
라란어
공용 문자
한글
종교
국교
없음
분포
군대
문주국 국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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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자치단체
1특별시, 7광역시, 1특별자치시, 13도, 2특별자치도, 3광역부, 1특별행정구[1]
기초자치단체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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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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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
1인당 GDP
$
GDP
(명목)
전체 GDP
$
1인당 GDP
$
무역
수입
$
수출
$
외환 보유고
$
신용 등급
AA-
화폐
공식 화폐
문주국 양(兩)
ISO 4217
MJ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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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태화(太華)(2012 원년)
시간대
GMT +9
도량형
미터법
ccTLD
.mj / .문주 / .문주국 / .com
국가 코드
MJ,MNJ
전화 코드
83

문주국(文洲國)은 동북아시아. 동중국해에 위치한 도서 국가이다. 해상국경은 북쪽으로는 대한민국과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일본국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동중국해와 라란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접한다. 수도는 연성특별시이다.

문주국은 입헌군주제대통령제를 조합한 문주식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특이한 입헌군주정 국가이다. 국무령이 존재하며 국무령을 선거로 선출한다.[2]

국명

문주국(文洲國)이란 국명은 안평왕 대에 발해에 책봉받은 문성군왕(혹은 문성공)에서 유래한다. 이후 국명을 고려에서 문성국(文成國)으로 변경하였고 문주왕 대에 한번더 문주국으로 바꾸었다.

역사

문주국/역사 문서 참조

고대

라란시대

중국인이 넘어와 라란국을 건국하였는데 기원후 1세기 이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라란국은 동쪽의 무단[3]을 속주로 편입하고 무강족과 충돌하였으며 주로 남쪽의 앙골족과 교류하였다.

양국시대

라란국과 남고구려(문성국)를 중심으로 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던 고구려가 멸망하고 유민들의 일부가 라란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며 살다가[4] 라란국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고 란주 동성을 공격하여 라란국 강왕을 죽이고 이를 발판 삼아서 남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남고구려는 무단을 복속하고 무강과 전쟁하는 한편 라란국과는 교류를 하고 라란국 사신단과 같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가 가끔씩 전쟁을 하기도 하였는데 남고구려가 라란국의 란주 동성을 함락하고 왕성을 공격하다가 철군한적도 있었다. 이렇게 전쟁과 교류를 반복하면서 지내오다가 결국 라란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중세

전기 문성국시대

이 시대는 라란국의 말왕이 문성국 양명왕에게 항복한 시점부터 애명여왕의 부군(夫君)인 란경휘가 반란으로 라란국을 재건하여 후라란국이 성립된 시점까지를 이르는 시대이다.
라란국이 멸망한 직후 양명왕대부터 경선왕대까지 라란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란경휘가 애명여왕을 옹립하고 이후 후라란국을 건국하여 문성국은 잠시 역사에서 사라진다.

후라란국시대

애명여왕의 부군(夫君)인 란경휘가 반란으로 라란국을 재건하여 후라란국이 성립된 시점부터 후라란국이 멸망하고 문성국이 재건된 시점까지를 이르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2차 동강국이 성국과 하국을 정벌하고 후라란국과 전쟁을 했는데 이를 노려 후라란국을 멸망시키고 문성국을 다시 세운것이다. 이 때 동강국도 침공하여 멸망하였고 성국과 하국도 점령하여 문주도를 통일하였다.[5][6]

후기 문성국시대

근세

중세 문주국시대

문주왕이 즉위한 시기부터 성종이 즉위하기 직전의 시대를 제1왕국으로 분류한다.

근대

근대 문주국시대

성종이 집권한 시기부터 일제강점기 직전까지의 시대로 제2왕국으로 분류한다.

현대

일제강점기
미군정 ~ 현대문주국시대

문화

고구려가 멸망한 뒤 라란국으로 넘어온 고구려 유이민들이 정착하여 문화를 보존하였다. 약 20만명의 고구려인들이 라란족에 오랜시간에 걸쳐 동화되어야 맞는게 아닌가 생각되지만. 한화되긴 했지만 본토인(또는 한인)이라고 부르는 고구려•백제•신라•발해•고려 출신의 유이민들과 조선인들이 문성국(남고구려)과 문주국에 걸쳐 이주해왔으므로 그들의 문화를 수용함과 동시에 왕이 직접 내탕고를 사용해 극진히 대접해주는 경우도 있었기에 고구려 문화를 전파하는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또한 남고구려의 건국 주체가 된 연합군을 제외한 점령지의 유력 가문들을 멸족하거나 중앙으로 불러들여 동화시켜 라란족의 문화를 제거하는데에도 노력을 하였다.[7] 다만 고대 한족의 방계 민족이었던 라란족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므로 일부는 한화되어 현재까지 중국식 지명과 인명을 사용해오고 있다.

각주

  1. 특별자치구역으로 광역행정구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2.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정치체제에서 대통령을 군주로, 부통령을 국무령으로 바꾼 형태로 보면 이해가 쉽다.
  3. 한반도 도래인과 무강족의 혼혈인이 대다수인 무강의 한 일파
  4. 대략 그 수가 약 30만 명으로 추측된다. 이는 고려로 망명한 약 20만 명의 발해 유민들보다 많은 숫자이다.
  5. 무강족을 완전히 복속한 것은 아니고 이후에 서서히 동화되면서 복속되었다.
  6. 이 시기 여도에 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여도에 관한 기록은 12세기 초반에 나오며 이전에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에 12세기 이전에도 여도를 영토로 두었음은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어 여도에 위치하였나 싶지만 앙골어를 알 수 없어 확증은 없다.
  7. 건국의 주체가 된 지역들은 유력 가문들을 중앙으로 불러들이거나 해당지역에 고구려인들을 이주시켜 융화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