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Valdemaro Ligioni/4: 두 판 사이의 차이

문서를 비움
태그: 비우기 수동 되돌리기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1번째 줄:
= 해방정국 =
[[파일:해방정국 타이틀.svg|x1000px|link=해방정국]]
{| class="wikitable" style="float:right; max-width:450px; border:2px solid #000; color:#261F4C;"
|-
! colspan="2" style="width:450px; background:#261F4C; color:#fff;" | {{large|해방정국 '''·''' 解放政局}}
|-
! width=25% style="background:#261F4C; color:#fff;" | 장르
| 대체역사
|-
! style="background:#261F4C; color:#fff;" | 작가
| [[리조니|리조니(李祚泥)]], [[사용자:Goldgrape|금포도(金葡萄)]]
|-
! style="background:#261F4C; color:#fff;" | 발흥일
| 2022년 8월 10일
|-
! rowspan="3" style="background:#261F4C; color:#fff;" | 연재처
|-
| style="text-align: left" | [[파일:이브위키 로고.svg|x15px]]<br>2022.06.10~현재
|}
==개요==
해방정국 세계관은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려운형이 좌우합작을 일찍이 이루어내어 거국내각으로 출발하는 [[조선인민공화국 (해방정국)]]의 역사를 다룬다. 이제 막 해방된 한반도는 아직 지방에서 근근히 살아남은 일본인 지주와, 좌파와 우파의 불신에서 비롯된 격렬한 정권을 향한 투쟁, 그리고 재야에서 투쟁하는 민중과 혁명가들, 만주에서 돌아온 독립투사들의 정치적 투쟁 등의 당시 혼란한 시대상을 그린다.
{{-}}
==스토리라인==


{| class="wikitable" style="margin-left: auto; margin-right: auto; border:2px solid #261F4C; text-align: center;"
!<div style="margin: -5.0px -10.0px">{{YouTube|
oRmj6SzSNeQ|450px}}</div><div style="margin: -10.0px 0px"></div>
|-
! style="background:#261F4C; color:#FFF;" | <big>愛 國 歌</big>
|}
{{인용문1|"民主主義(민주주의)가 人民(인민)의 自由權利(자유권리)와 參政權(참정권)을 다 許諾(허락)하되 不良分子(불량분자)들이 民權自由(민권자유)라는 口實(구실)을 利用(리용)하여 政府(정부)를 顚覆(전복)하려는 것을 許諾(허락)하는 國家(국가)는 없읍니다."<br><br>{{여백|5mm}}'''초대 주석 리승만(李承晩)'''}}
{{인용문1|"勞動者(로동자), 農民(농민), 一般(일반) 大衆(대중)을 爲(위)하는 것이 共産主義(공산주의)랍니까. 萬一(만일) 그렇다면 나는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가 되겠읍니다. 勞動大衆(로동대중)을 爲(위)해 餘生(여생)을 바치겠읍니다, 萬一(만일) 右翼(우익)이 反動的(반동적) 彈壓(탄압)을 한다면 외려 共産主義 革命(공산주의 혁명)을 促進(촉진)시킬 뿐웁니다. 나는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읍니다. 그러나 急進的(급진적) 左翼(좌익) 理論(리론)을 나는 正當(정당)하다고 보지 않읍니다."<br><br>{{여백|5mm}}''' 제2대 주석 려운형(呂運亨)'''}}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 (해방정국)|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조선은 갑작스런 광복을 맞이한다. 우리가 압제로부터 벗어난 오늘에 오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목숨을 대가로 하였는가, 시인 이육사는 그의 시 《광야》에서 천고의 뒤라고 표현할 만큼 우리 한민족은 이 식민지란 족쇄를 벗는 날이 아주 먼 훗날이라 생각했었다. 하물며 지금의 1945년이라 생각한 사람이 과연 있었겠는가?
하지만, 조선의 젊은 지식인이자 좌익 운동가였던 [[려운형 (해방정국)|려운형]]은 과연 [[일본제국 (해방정국)|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방정국)|임시정부]]와는 별개로 한반도 내의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조선건국동맹 (해방정국)|조선건국동맹, 이하 건준위]]를 발족한 려운형은 지하조직들을 통해 해외의 각 독립단체에 회유서신을 보내고, 특히나 적통성을 지니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방정국)|임시정부, 이하 임정]]과는 얼굴만 보지 못할 뿐이지 긴밀히 조정하며 거국정부의 형상을 준비해 나갔다.
비록,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우익 독립전선과 조선건국동맹으로 대표되는 좌익 독립전선은 이질적이더라도 그들의 대의적 목표는 '''한민족의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로 단결하여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임시정부가 국내로 들어오고 있을때 건준위는 지방을 장악하고 수도인 [[경성 (해방정국)|경성]]에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해방정국)|아베 노부유키]]와 협의하여 치안과 식량, 무기등을 이양받고 호기롭게 경성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지방에는 악 220여개의 지부가 세워졌으며 일본이 깔은 통신선은 역으로 건준위가 이용해 지방지부에 행정과 치안을 이양하고 명령하달체계를 간소하게나마 구축하였다. YMCY에서 열렸던 조선건국준비회의의 회의에서 려운형은 거국내각을 천명하며 국가건설이 먼저임을 강조하며 좌익의 대부였던 [[박헌영 (해방정국)|박헌영]]에게 협조를 구하고, [[안재홍 (해방정국)|안재홍]]의 제안을 일부 수용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우익 세력과의 협조를 결의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인천을 통해 입국하자 환대히 맞이하며 내각을 발표하고, 공개적으로 그들이 직책 수임에 동의하며 [[김구 (해방정국)|김구]], [[리승만 (해방정국)|리승만]]등의 인사들과 [[조봉암 (해방정국)|조봉암]], [[허정숙 (해방정국)|허정숙]]등의 사민주의 인사들, [[김두봉 (해방정국)|김두봉]]이나 [[정철수 (해방정국)|정철수]], [[김원봉 (해방정국)|김원봉]]같은 무력독립단체 세력, 임시정부 내 개조파였던 [[안창호 (해방정국)|안창호]]등의 개별노선 인물들도 유입되며 여러 세력이 합작한 좌우합작 헝태의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김규식 (해방정국)|김규식]]이나 [[려운형 (해방정국)|려운형]], [[김구 (해방정국)|김구]]는 거국내각을 지지하며 어떻게든 한민족의 단일국가를 주장한 결과 미소공동위원회가 성립되어 군정과 조선인민공화국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주요 인물==
* 리승만 (李承晩)
{{인용문1|[[파일:경천애인 위국진충.svg|100px]]<br>敬天愛人 爲國盡忠 -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
리승만(李承晩), 호는 우남(雩南)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부수반직인 임시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지넀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초대주석을 지냈다. 해방이후 처음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직을 승인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움직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정읍 체포사건 (해방정국)|정읍 체포사건]] 이후 정치적 입지를 잃을 위기에 놓이자 뒤늦게 주석직을 승인하여 좌우합작에 편승하게 되었다. 건국 후 좌측 인사들과 끊임없이 대립하였으며 조선독립촉성국민회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다 차후 그가 주석직 연임을 위해 평안도에서 연설하던 도중 서북청년단에 의해 암살당한다.
* 김구 (金九)
{{인용문1|[[파일:건국양심.svg|100px]]<br>國建心良 - 사적인 것을 위해 암투를 벌이기보다, 나라와 민족, 후세를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나라를 세우자}}
김구(金九), 호는 백범(白凡)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부수반직인 국무령과 국무위원회 주석직을 맡았다. 그 외의 여러 중책을 맡았으며 임시정부를 이끈 주역중 하나이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다. 해방 이후 귀국한 뒤 려운형이 매우 못미더웠으나 민족의 분열만은 막아야 한다는 려운형의 제안에 결국 좌우합작에 처음부터 참여하며 [[조선인민공화국 (해방정국)]]의 건국주역중 하나가 되었다. 민족주의 우익정당인 조선독립당의 당수이며 [[이승만 암살사건 (해방정국)|이승만 암살사건]] 이후 대권에 도전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제3대 주석직을 두고 박헌영과 경쟁하게 된다. 려운형, 리승만과 더불어 조선 내에서 인지도가 매우 높은 인물중 하나이다.
* 려운형 (呂運亨)
{{인용문1|[[파일:분즉도합필립.svg|100px]]<br>分則倒合必立 - 나뉘면 넘어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선다}}
려운형(呂運亨), 호는 몽양(夢陽)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의장직을 역임하였으며 언론인으로선 조선중앙일보를 세우고, 해방직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워 [[조선인민공화국 (해방정국)]]의 건국에 주된 역할을 맡았다. 조선인민공화국 제2대 주석을 역임한 바 있다. 정치적 스펙트럼으로는 좌익계열 인물로 분류되지만 범민족주의자 성격이 짙은 인물로, 민족내 분열을 막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이후 자주국가 건설에 주된 역할을 하고 조선인민당의 당수로서 좌익진영의 2대양맥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며 중도좌익 세력의 대부로서 활동하였다.
* 박헌영 (朴憲永)
{{인용문1|[[파일:신심직행.svg|100px]]<br>信心直行 - 옳다고 믿는 것을 곧장 행한다.}}
박헌영(朴憲永), 호는 이정(而丁)이며 고려공산당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조선공산당의 초대 당대표를 지냈고, 소련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가, 경성 콤그룹에서 활동하였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건국 후 조선공산당의 당수로서 활동하였으며, 이남에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이북의 좌익의 길을 따르던 무장투쟁세력과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수용하지 않으며 [[김원봉 (해방정국)|김원봉]] 등과는 개별노선을 걷게 된다. 이후 만주파로 불리던 [[김일성 (해방정국)|김일성(金日成)]]을 축출하고 정통 좌익 내 인물들을 거의 자신의 편으로 만든 뒤 [[김구 (해방정국)|김구]] 와 대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
* 조만식 (曺晩植)
{{인용문1|[[파일:창영조매영영설.svg|140px]]<br>窓映早梅盈映雪 - 창에 비춘 이른 매화 흰 눈에 비추어 가득하여라.}}
조만식(曺晩植), 호는 고당(古堂)이며 [[일제강점기 (해방정국)|일제강점기]] 시대때 주로 시민운동과 비폭력운동을 이끌던 인물로, 3.1운동 참여,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평안도 지방의 수양동우회를 설립하여 개신교를 믿는 인물중 가장 유명한 이중 하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숭실전문대학을 졸업해 충실한 개신교의 신자가 되었으며, 평양과 평안 일대인 북쪽 일대에서 실력양성운동 등의 시민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보수정당의 대두중 하나가 되었으며 높은 인지도를 지닌 인물이다. [[이승만 암살사건 (해방정국)|이승만 암살사건]] 이후 대권을 노리는 잠룡으로서 [[박헌영 (해방정국)|박헌영]]과 [[김구 (해방정국)|김구]] 와의 대권다툼에 있어서 제3세력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 김원봉 (金元鳳)
{{인용문1|[[파일:신청년건립.svg|100px]]<br>新靑年建立 - 새로운 청년을 세우자.}}
김원봉(金元鳳), 호는 약산(若山)이며, [[일제강점기 (해방정국)|일제강점기]] 시대때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의열단을 창설하고 그 수장인 의백을 맡았으며, 민족혁명당의 주역이기도 하였고 조선의용대의 총대장을 맡은 인물이다. 이후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초대 군사부장을 맡았다. 그는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실제론 강성파 민족주의자로 무장투쟁을 통한 조직적인 군대를 형성하여 일본제국으로부터 조국을 해방해야 한다 주장한 인물이었다. 실제론 외력에 의해 항복하였으나, 그는 만주에서 직접 걸어 수도 경성으로 행군하며 사회주의 진영에 있어서 무장독립투쟁을 하였던 인물들의 대표격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문서==
* 국가
** [[조선인민공화국 (해방정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해방정국)]]
** [[일본제국 (해방정국)]]
* 시대
** [[구한말 (해방정국)]]
** [[무단통치 시대 (해방정국)]]
** [[문화통치 시대 (해방정국)]]
** [[말살통치 시대 (해방정국)]]
* 해방 후
** [[광복 (해방정국)]]
** [[미소군정 시대 (해방정국)]]
** [[신탁통치 시대 (해방정국)]]
**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해방정국)]]
* 사건
* 일본
** [[도쿄대공습 (해방정국)]]
**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해방정국)]]
** [[교토 원자폭탄 투하 (해방정국)]]
* 조선
** [[경술국치 (해방정국)]]
** [[3·1 운동 (해방정국)]]
** '''[[광복 (해방정국)]]''' (전후 시대구분)
** [[블라디보스토크 밀약 (해방정국)]]
** [[건국준비위원회 선언 (해방정국)]]
** [[소련 군정청 (해방정국)|소련 군정청]] · [[미국 군정청 (해방정국)|미국 군정청]] 진주
** [[임시정부 귀국 (해방정국)]]
** [[모스크바 3상 회의 (해방정국)]]
** [[신탁통치 오보사건 (해방정국)]]
= 스토리 라인 =
* 일본은 패망의 길에 접어들며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격을 당하고, 이것으로 모자라 교토에까지 소이탄 폭격을 맞아 도시 반이 전소되며 처절하게 항복한다.
*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상하이에 있는 비밀거처에서 밀서를 통해 임시정부 인사들을 향후 해방정국의 건국위원회에 반드시 고위직에 천거해주겠다 약속하고, 좌우합작을 제의한다. 당시 국무위원회 주석이었던 김구는 동의한다.
* 한편, 한반도에선 해방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생존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해방 이전부터 빌드업을 쌓아오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과의 좌우합작을 '''민족국가''' 이라는 대의적 기치아래 극적 합의를 이루어 통제되어 조직적으로 일어난 조선인들의 반란으로 경복궁 안에 있던 조선총독부 관사는 점령당한다.
* 당시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는 세번 항복을 선언한다. 첫번째는 조선인들에게 둘러싸인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임시정부 관사에서 항복문서에 서명과, 육성녹음을 통한 일본의 패망과 항복을 강요받아 끝내 항복선언을 하였고, 공개적으로 미국에게 항복하였으며, 소련에게도 항복하여 세번의 항복 끝에 약 일주일간의 수감에서 풀려나 일본으로 귀국한다.
* 38선 기준(세계관 기준 가상)의 이북에는 소련이 군정체제를 다지고 있었으나, 박헌영이 조선건준위를 옹호하자 소련은 군대를 물려주는 호의를 보였고, 미국이 남쪽을 점거하자 반미정서를 보이지 않고 겉으로 그들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이며 반미노선이 아님을 강조하고 미국의 호의를 이끌어냈다.
* 미군이 부산에 사령부를, 소련은 평양에 사령부를 잡고 미묘한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경성(서울)에서 결국 치안을 장악하던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건준위가 치안을 장악하자 본격적으로 건국을 준비한다. 이때 총독부 건물은 이때부터 중앙청으로 불린다.
* 때이른 시기에 양 군정청이 신탁통치를 한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대혼란을 빚는 위기를 겪는다.
* 미국과 소련은 조선건준위를 인정한다는 물밑협약을 통해 양대강국의 호의를 얻는다. 이것은 향후 미국의 기밀문서의 기한이 지나 공개되어, '''블라디보스토크 협정''' 으로 불린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한다. 미리 합의된대로 입국하고, 우파의 주장에 따라 '''임시정부 환국환영회'''를 열고, 내각에 입각할 모든 인물들이 모두 중앙청의 강당에 모여 '''최고건국준비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내각이 결정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외교관이 동참하여 건국선포 날짜까지 조절하였다.
* 지방은 각각 소련과 미국의 협조로 일본을 몰아내고 장악하였다. 각각 합의에 따라 철수시 모든 행정과 통행, 치안의 권리는 향후 건국될 국가에 이양하기로 한다.
* 1947년 5월 5일 전국선거로 "새로운 조선사람의 국가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을 찬성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전국 국민투표의 98% 이상 동의를 얻어 국민의 대의적 정통성을 얻었으며, 몇달여 뒤인 1947년 8월 18일 명칭이 개정된 수도 "한경(漢京)"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선언과 국헌제정, 국민대회를 열며 조선인민공화국은 건국되었다.
* 다음날인 1947년 8월 19일에 행정부가 출범, 20일에는 내각이 모두 입성해 처음 국무회의를 가지며 건국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난립해있는 당파와 좌우간의 세력갈등은 내재적인 큰 문제였다. 특히나 주석인 이승만은 행정부의 내각도 맘에 썩 들지 않았고, 언젠간 좌익과는 결별해야 한다 생각하였으며, 특히나 여운형은 몰라도 박헌영은 꼴보기를 싫어하였다. 게다가 주석이라는 자신의 직책명도 별로 탐탁치 않아하기도 하였다. 이는 훗날 명칭을 바꾸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김구는 좌우합작이라도 민족국가를 세운것에 안도하였으나, 좌익세력을 결코 신용하지 않았다. 좌익세력의 빅텐트라 볼 수 있는 여운형은 중재자를 맡으려 했으나 실질적 좌익의 총수인 박헌영은 암투를 해서라도 주도권을 잡고 싶어하였다.
* 다음해 1948년 1월 20일, 경무청이 설치되다. 십일 뒤 30일엔 조선인민공화국 국군이 건군되다.
* 1948년 2월에 양원제로 구성된 의회의 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공고되다. 이때 등록된 정당은 다음과 같다.
★는 선거연대
**조선공산당 (박헌영) {{글씨 색|#FF0000|★(사회동맹)}}
**조선민주당 (조만식)
**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글씨 색|#010D8E|★(애국동맹)}}
**한국독립당(김구){{글씨 색|#010D8E|★(애국동맹)}}
**조선인민당 (여운형) {{글씨 색|#FF0000|★(사회동맹)}}
**조선국민당 (-)
**민중동맹 (김규식) {{글씨 색|#1900FF|★(민족전선)}}
**대한민주청년동맹(백의사) (염동진)<ref>향후 강제해산</ref>
**신진당 (김원용)
**인민공화당 (김원봉) *항일투쟁계열
**조선신민당 (김두봉) *항일투쟁계열
**사회민주당 (여운홍){{글씨 색|#1900FF|★(민족전선)}}
**조선애국부인회 (박승호){{글씨 색|#010D8E|★(애국동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허성택) {{글씨 색|#FF0000|★(사회동맹)}}
**신한민족당 (권동진)
**호국불자회 (한용운)
**조선예수회 (장길석)
**대종회 (강일심)
**증산법동 (심인성)

2023년 2월 12일 (일) 14:19 판

해방정국

해방정국 · 解放政局
장르 대체역사
작가 리조니(李祚泥), 금포도(金葡萄)
발흥일 2022년 8월 10일
연재처

2022.06.10~현재

개요

해방정국 세계관은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려운형이 좌우합작을 일찍이 이루어내어 거국내각으로 출발하는 조선인민공화국 (해방정국)의 역사를 다룬다. 이제 막 해방된 한반도는 아직 지방에서 근근히 살아남은 일본인 지주와, 좌파와 우파의 불신에서 비롯된 격렬한 정권을 향한 투쟁, 그리고 재야에서 투쟁하는 민중과 혁명가들, 만주에서 돌아온 독립투사들의 정치적 투쟁 등의 당시 혼란한 시대상을 그린다.

스토리라인


愛 國 歌
"民主主義(민주주의)가 人民(인민)의 自由權利(자유권리)와 參政權(참정권)을 다 許諾(허락)하되 不良分子(불량분자)들이 民權自由(민권자유)라는 口實(구실)을 利用(리용)하여 政府(정부)를 顚覆(전복)하려는 것을 許諾(허락)하는 國家(국가)는 없읍니다."

 초대 주석 리승만(李承晩)
"勞動者(로동자), 農民(농민), 一般(일반) 大衆(대중)을 爲(위)하는 것이 共産主義(공산주의)랍니까. 萬一(만일) 그렇다면 나는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가 되겠읍니다. 勞動大衆(로동대중)을 爲(위)해 餘生(여생)을 바치겠읍니다, 萬一(만일) 右翼(우익)이 反動的(반동적) 彈壓(탄압)을 한다면 외려 共産主義 革命(공산주의 혁명)을 促進(촉진)시킬 뿐웁니다. 나는 共産主義者(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읍니다. 그러나 急進的(급진적) 左翼(좌익) 理論(리론)을 나는 正當(정당)하다고 보지 않읍니다."

  제2대 주석 려운형(呂運亨)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조선은 갑작스런 광복을 맞이한다. 우리가 압제로부터 벗어난 오늘에 오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목숨을 대가로 하였는가, 시인 이육사는 그의 시 《광야》에서 천고의 뒤라고 표현할 만큼 우리 한민족은 이 식민지란 족쇄를 벗는 날이 아주 먼 훗날이라 생각했었다. 하물며 지금의 1945년이라 생각한 사람이 과연 있었겠는가?

하지만, 조선의 젊은 지식인이자 좌익 운동가였던 려운형은 과연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한반도 내의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조선건국동맹, 이하 건준위를 발족한 려운형은 지하조직들을 통해 해외의 각 독립단체에 회유서신을 보내고, 특히나 적통성을 지니고 있던 임시정부, 이하 임정과는 얼굴만 보지 못할 뿐이지 긴밀히 조정하며 거국정부의 형상을 준비해 나갔다.

비록,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우익 독립전선과 조선건국동맹으로 대표되는 좌익 독립전선은 이질적이더라도 그들의 대의적 목표는 한민족의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로 단결하여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임시정부가 국내로 들어오고 있을때 건준위는 지방을 장악하고 수도인 경성에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협의하여 치안과 식량, 무기등을 이양받고 호기롭게 경성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지방에는 악 220여개의 지부가 세워졌으며 일본이 깔은 통신선은 역으로 건준위가 이용해 지방지부에 행정과 치안을 이양하고 명령하달체계를 간소하게나마 구축하였다. YMCY에서 열렸던 조선건국준비회의의 회의에서 려운형은 거국내각을 천명하며 국가건설이 먼저임을 강조하며 좌익의 대부였던 박헌영에게 협조를 구하고, 안재홍의 제안을 일부 수용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우익 세력과의 협조를 결의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인천을 통해 입국하자 환대히 맞이하며 내각을 발표하고, 공개적으로 그들이 직책 수임에 동의하며 김구, 리승만등의 인사들과 조봉암, 허정숙등의 사민주의 인사들, 김두봉이나 정철수, 김원봉같은 무력독립단체 세력, 임시정부 내 개조파였던 안창호등의 개별노선 인물들도 유입되며 여러 세력이 합작한 좌우합작 헝태의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김규식이나 려운형, 김구는 거국내각을 지지하며 어떻게든 한민족의 단일국가를 주장한 결과 미소공동위원회가 성립되어 군정과 조선인민공화국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주요 인물

  • 리승만 (李承晩)

敬天愛人 爲國盡忠 -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

리승만(李承晩), 호는 우남(雩南)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부수반직인 임시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지넀으며 조선인민공화국 초대주석을 지냈다. 해방이후 처음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직을 승인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움직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정읍 체포사건 이후 정치적 입지를 잃을 위기에 놓이자 뒤늦게 주석직을 승인하여 좌우합작에 편승하게 되었다. 건국 후 좌측 인사들과 끊임없이 대립하였으며 조선독립촉성국민회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다 차후 그가 주석직 연임을 위해 평안도에서 연설하던 도중 서북청년단에 의해 암살당한다.

  • 김구 (金九)

國建心良 - 사적인 것을 위해 암투를 벌이기보다, 나라와 민족, 후세를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나라를 세우자

김구(金九), 호는 백범(白凡)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부수반직인 국무령과 국무위원회 주석직을 맡았다. 그 외의 여러 중책을 맡았으며 임시정부를 이끈 주역중 하나이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다. 해방 이후 귀국한 뒤 려운형이 매우 못미더웠으나 민족의 분열만은 막아야 한다는 려운형의 제안에 결국 좌우합작에 처음부터 참여하며 조선인민공화국 (해방정국)의 건국주역중 하나가 되었다. 민족주의 우익정당인 조선독립당의 당수이며 이승만 암살사건 이후 대권에 도전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제3대 주석직을 두고 박헌영과 경쟁하게 된다. 려운형, 리승만과 더불어 조선 내에서 인지도가 매우 높은 인물중 하나이다.

  • 려운형 (呂運亨)

分則倒合必立 - 나뉘면 넘어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선다

려운형(呂運亨), 호는 몽양(夢陽)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의장직을 역임하였으며 언론인으로선 조선중앙일보를 세우고, 해방직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워 조선인민공화국 (해방정국)의 건국에 주된 역할을 맡았다. 조선인민공화국 제2대 주석을 역임한 바 있다. 정치적 스펙트럼으로는 좌익계열 인물로 분류되지만 범민족주의자 성격이 짙은 인물로, 민족내 분열을 막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이후 자주국가 건설에 주된 역할을 하고 조선인민당의 당수로서 좌익진영의 2대양맥으로 자리매김 하였으며 중도좌익 세력의 대부로서 활동하였다.

  • 박헌영 (朴憲永)

信心直行 - 옳다고 믿는 것을 곧장 행한다.

박헌영(朴憲永), 호는 이정(而丁)이며 고려공산당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조선공산당의 초대 당대표를 지냈고, 소련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가, 경성 콤그룹에서 활동하였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건국 후 조선공산당의 당수로서 활동하였으며, 이남에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이북의 좌익의 길을 따르던 무장투쟁세력과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수용하지 않으며 김원봉 등과는 개별노선을 걷게 된다. 이후 만주파로 불리던 김일성(金日成)을 축출하고 정통 좌익 내 인물들을 거의 자신의 편으로 만든 뒤 김구 와 대권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

  • 조만식 (曺晩植)

窓映早梅盈映雪 - 창에 비춘 이른 매화 흰 눈에 비추어 가득하여라.

조만식(曺晩植), 호는 고당(古堂)이며 일제강점기 시대때 주로 시민운동과 비폭력운동을 이끌던 인물로, 3.1운동 참여,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평안도 지방의 수양동우회를 설립하여 개신교를 믿는 인물중 가장 유명한 이중 하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숭실전문대학을 졸업해 충실한 개신교의 신자가 되었으며, 평양과 평안 일대인 북쪽 일대에서 실력양성운동 등의 시민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보수정당의 대두중 하나가 되었으며 높은 인지도를 지닌 인물이다. 이승만 암살사건 이후 대권을 노리는 잠룡으로서 박헌영김구 와의 대권다툼에 있어서 제3세력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 김원봉 (金元鳳)

新靑年建立 - 새로운 청년을 세우자.

김원봉(金元鳳), 호는 약산(若山)이며, 일제강점기 시대때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의열단을 창설하고 그 수장인 의백을 맡았으며, 민족혁명당의 주역이기도 하였고 조선의용대의 총대장을 맡은 인물이다. 이후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초대 군사부장을 맡았다. 그는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실제론 강성파 민족주의자로 무장투쟁을 통한 조직적인 군대를 형성하여 일본제국으로부터 조국을 해방해야 한다 주장한 인물이었다. 실제론 외력에 의해 항복하였으나, 그는 만주에서 직접 걸어 수도 경성으로 행군하며 사회주의 진영에 있어서 무장독립투쟁을 하였던 인물들의 대표격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문서

  • 사건

스토리 라인

  • 일본은 패망의 길에 접어들며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격을 당하고, 이것으로 모자라 교토에까지 소이탄 폭격을 맞아 도시 반이 전소되며 처절하게 항복한다.
  •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상하이에 있는 비밀거처에서 밀서를 통해 임시정부 인사들을 향후 해방정국의 건국위원회에 반드시 고위직에 천거해주겠다 약속하고, 좌우합작을 제의한다. 당시 국무위원회 주석이었던 김구는 동의한다.
  • 한편, 한반도에선 해방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생존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해방 이전부터 빌드업을 쌓아오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과의 좌우합작을 민족국가 이라는 대의적 기치아래 극적 합의를 이루어 통제되어 조직적으로 일어난 조선인들의 반란으로 경복궁 안에 있던 조선총독부 관사는 점령당한다.
  • 당시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는 세번 항복을 선언한다. 첫번째는 조선인들에게 둘러싸인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임시정부 관사에서 항복문서에 서명과, 육성녹음을 통한 일본의 패망과 항복을 강요받아 끝내 항복선언을 하였고, 공개적으로 미국에게 항복하였으며, 소련에게도 항복하여 세번의 항복 끝에 약 일주일간의 수감에서 풀려나 일본으로 귀국한다.
  • 38선 기준(세계관 기준 가상)의 이북에는 소련이 군정체제를 다지고 있었으나, 박헌영이 조선건준위를 옹호하자 소련은 군대를 물려주는 호의를 보였고, 미국이 남쪽을 점거하자 반미정서를 보이지 않고 겉으로 그들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이며 반미노선이 아님을 강조하고 미국의 호의를 이끌어냈다.
  • 미군이 부산에 사령부를, 소련은 평양에 사령부를 잡고 미묘한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경성(서울)에서 결국 치안을 장악하던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건준위가 치안을 장악하자 본격적으로 건국을 준비한다. 이때 총독부 건물은 이때부터 중앙청으로 불린다.
  • 때이른 시기에 양 군정청이 신탁통치를 한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대혼란을 빚는 위기를 겪는다.
  • 미국과 소련은 조선건준위를 인정한다는 물밑협약을 통해 양대강국의 호의를 얻는다. 이것은 향후 미국의 기밀문서의 기한이 지나 공개되어, 블라디보스토크 협정 으로 불린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한다. 미리 합의된대로 입국하고, 우파의 주장에 따라 임시정부 환국환영회를 열고, 내각에 입각할 모든 인물들이 모두 중앙청의 강당에 모여 최고건국준비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내각이 결정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외교관이 동참하여 건국선포 날짜까지 조절하였다.
  • 지방은 각각 소련과 미국의 협조로 일본을 몰아내고 장악하였다. 각각 합의에 따라 철수시 모든 행정과 통행, 치안의 권리는 향후 건국될 국가에 이양하기로 한다.
  • 1947년 5월 5일 전국선거로 "새로운 조선사람의 국가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을 찬성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전국 국민투표의 98% 이상 동의를 얻어 국민의 대의적 정통성을 얻었으며, 몇달여 뒤인 1947년 8월 18일 명칭이 개정된 수도 "한경(漢京)"에서 조선인민공화국 건국선언과 국헌제정, 국민대회를 열며 조선인민공화국은 건국되었다.
  • 다음날인 1947년 8월 19일에 행정부가 출범, 20일에는 내각이 모두 입성해 처음 국무회의를 가지며 건국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난립해있는 당파와 좌우간의 세력갈등은 내재적인 큰 문제였다. 특히나 주석인 이승만은 행정부의 내각도 맘에 썩 들지 않았고, 언젠간 좌익과는 결별해야 한다 생각하였으며, 특히나 여운형은 몰라도 박헌영은 꼴보기를 싫어하였다. 게다가 주석이라는 자신의 직책명도 별로 탐탁치 않아하기도 하였다. 이는 훗날 명칭을 바꾸는 이유중 하나가 된다. 김구는 좌우합작이라도 민족국가를 세운것에 안도하였으나, 좌익세력을 결코 신용하지 않았다. 좌익세력의 빅텐트라 볼 수 있는 여운형은 중재자를 맡으려 했으나 실질적 좌익의 총수인 박헌영은 암투를 해서라도 주도권을 잡고 싶어하였다.
  • 다음해 1948년 1월 20일, 경무청이 설치되다. 십일 뒤 30일엔 조선인민공화국 국군이 건군되다.
  • 1948년 2월에 양원제로 구성된 의회의 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공고되다. 이때 등록된 정당은 다음과 같다.

★는 선거연대

    • 조선공산당 (박헌영) ★(사회동맹)
    • 조선민주당 (조만식)
    • 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애국동맹)
    • 한국독립당(김구)★(애국동맹)
    • 조선인민당 (여운형) ★(사회동맹)
    • 조선국민당 (-)
    • 민중동맹 (김규식) ★(민족전선)
    • 대한민주청년동맹(백의사) (염동진)[1]
    • 신진당 (김원용)
    • 인민공화당 (김원봉) *항일투쟁계열
    • 조선신민당 (김두봉) *항일투쟁계열
    • 사회민주당 (여운홍)★(민족전선)
    • 조선애국부인회 (박승호)★(애국동맹)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허성택) ★(사회동맹)
    • 신한민족당 (권동진)
    • 호국불자회 (한용운)
    • 조선예수회 (장길석)
    • 대종회 (강일심)
    • 증산법동 (심인성)
  1. 향후 강제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