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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선과 대한민국의 엄청난 전력 차이는 김일성이 남침을 단행해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으며 국제적으론 1950년 6월 25일 중국의 대만 침공으로 미국의 시선은 모조리 대만으로 돌려져 있었다. 이에 사전에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1950년 7월 4일 새벽 3시에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기습 남침을 의결, 1시간 뒤인 새벽 4시 작전명 '폭풍'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기습 남침을 진행한다. [[조국해방전쟁 (당신들의 조선)|조국해방전쟁]]의 시작이었다. | 이런 조선과 대한민국의 엄청난 전력 차이는 김일성이 남침을 단행해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으며 국제적으론 1950년 6월 25일 중국의 대만 침공으로 미국의 시선은 모조리 대만으로 돌려져 있었다. 이에 사전에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1950년 7월 4일 새벽 3시에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기습 남침을 의결, 1시간 뒤인 새벽 4시 작전명 '폭풍'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기습 남침을 진행한다. [[조국해방전쟁 (당신들의 조선)|조국해방전쟁]]의 시작이었다. | ||
2배나 차이 나는 양 진영의 전력 차이를 방증하듯 조국해방전쟁 발발 3일 만인 7월 7일 [[서울시 (당신들의 조선)|서울시]]가 조선인민군에게 완전히 함락당했고 8월에는 대한민국의 영토 90%가 조선에게 점령당했다. 이 시기 박헌영의 주장대로 약 | 2배나 차이 나는 양 진영의 전력 차이를 방증하듯 조국해방전쟁 발발 3일 만인 7월 7일 [[서울시 (당신들의 조선)|서울시]]가 조선인민군에게 완전히 함락당했고 8월에는 대한민국의 영토 90%가 조선에게 점령당했다. 이 시기 박헌영의 주장대로 약 10만 여명의 남로당 당원과 한국민주당의 방해로 인해 시행되지 못한 농지개혁법 때문에 자신들의 토지를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수 십만의 농민들이 단체로 봉기하였다.<ref>이 때문에 해외의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 당시 대한민국에서 농지개혁법이 통과돼 토지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졌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현재와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ref> 여기에 당시 제대로 된 숙군 작업이 실시되지 못해 일부 좌익 계열의 부대가 인민군에 합류하는 일도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미군에게 모든 기대를 걸어야 했으나 위에서 서술한 대로 미국은 대만 함락을 저지해야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겐 충분한 지원이 돌아가지 못했고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에게 연전연패를 기록한다 | ||
마침내 1950년 9월 12일 마산 전투의 패배를 시작으로 다부동 전투, 영천·신녕 전투에서 한미연합군이 인민군에게 대대적으로 패배해 낙동강 방어선이 돌파당하게 된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에게 제주도로의 정부 이전을 제안하게 되고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던 이승만은 이를 수락하며 대한민국 정부는 수 십만의 피난민을 이끌고 제주도로 도피한다. 마침내 김일성은 1950년 XX월 XX일 부산에서 조국통일을 선언하여 조국해방전쟁은 발발 '''N개월''' 만에 조선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된다. | |||
=== 김일성의 실각, 박헌영과 허가이 === | === 김일성의 실각, 박헌영과 허가이 === | ||
2023년 3월 18일 (토) 06: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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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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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 | 국장 |
| 全 世界 勤勞者들은 團結하라! 전 세계 근로자들은 단결하라![1] | |
| 상징 | |
| 역사 | |
| • 광복 1945년 8월 15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48년 9월 9일 • 통일 1950년 X월 X일 | |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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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코드 | |
| 410, KOR, KR | |
| ccTLD | |
| .kr, .조선[3] | |
| 국제 전화 코드 | |
| +82 | |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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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약칭 조선(朝鮮)은 동아시아의 조선반도와 만주 일부에 걸쳐서 위치한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상징
국호
조선의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은 조선반도 전체와 조선반도에 살고 있는 민족을 아울러 상징하는 용어인 조선에서 유래된 국명으로 조선 내부에선 자국을 조선, 공화국 등으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조선은 보통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와는 달리 민주 공화국(ex : 독일민주공화국)이나 인민공화국(ex : 중화인민공화국)[4], 사회주의 공화국(ex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과 같은 국명을 사용하지 않고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특이한 국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존재한다.
조선의 국명은 조선 정계 내부 갈등의 타협물과도 같은 존재다. 조선 공산주의의 거물로 조선의 제1~3대 국가주석을 지낸 박헌영은 과거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에 선포하였으나 1년 후인 1946년에 멸망한 공화국인 조선인민공화국을 그대로 국명으로 사용하길 희망했으나, 중국공산당에 몸담았던 조선로동당 내부 당원들은 중국의 초대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이론을 내포한 조선민주공화국을 국명으로 사용하길 희망하고 있었다. 이에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낸 김두봉이 이 둘을 섞어놓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제안하고 이를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검토, 소련군 제25군 정치위원이자, 당시 조선 주둔 소련군의 최고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가 최종적으로 현재와 같은 국명을 승인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조선의 공식인 최종 국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5]
조선의 공식 영문 국명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과거 조선반도에 위치해 있던 중세 국가 고려에서 유래된 칭호인 코리아(Korea)를 사용하고 있다.[6] 베트남에선 Triều Tiên으로, 러시아에선 러시아어 공식 국명인 Корейская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7]를 줄인 КНДР로 조선을 부르고 있다.
국기
| 람홍색공화국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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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는 국가의 존엄과 자주권, 우리 인민의 행복과 휘황찬란한 전망의 상징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법 제2조 中 |
조선의 법적 국기는 1948년 7월 10일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제정한 람홍색공화국기(藍紅色共和國旗)이다.
국가
| 애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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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적 국가는 1947년 6월 29일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제정한 애국가(愛國歌)이다.
역사
| 조선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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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건국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이 마침내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35년간의 강점기를 뒤로 한 채 조선은 독립을 맞이한다. 독립 직후 아베 노부유키의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 치안권 등을 이양받은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동년 9월 6일, 조선사 최초의 현대적인 민주공화국인 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주석으론 후일 제주의 대통령을 역임하는 이승만이, 부주석으론 건준의 수장인 여운형이 취임한다.
그러나 조선반도 북부에서 밀고 들어온 소련군과 남부에서 치고 올라온 미군은 각 군대의 점령지에 군정청을 세우는 등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은 1946년 2월 19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조선반도의 북부에 세워진 소련군 소비에트 민정청[8]에 소련군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던 군인이자 소련군 제88국제여단 소속의 김일성을 수반으로 세워 조선을 통치했다.
이 시기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소련군이 통치하던 조선반도 북부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소련군의 페드로프 중령은 '우리 군인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을 자행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하며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여기에 '대낮에도 거리에서 술에 취한 군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신의주 내 70곳 이상의 여관과 공공건물에서는 밤마다 질펀한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고 추가로 덧붙였다.
한편으론 소비에트 민정청은 조선반도 남부의 미 군정청이 인민위원회를 해산시킨 것과 달리 소비에트 민정청은 인민위원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행정공백을 최소화시켰으며 조선반도 남부에선 곡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던 반면에 소비에트 민정청은 강력한 물가통제 정책으로 곡물 가격을 안정화하는 등 미 군정청보다 더 나은 통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소비에트 민정청은 이후 1946년 2월 15일, 동년 2월 9일 '북조선 각 정당·사회단체·각 행정국 및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에 의거하여 세워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 전권을 이양하고 해산한다.
소비에트 민정청에게 전권을 이양받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토지 분배, 주요 산업 국유화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1946년 7월 30일엔 조선 최초로 남녀평등권을 법제화한 문서인 '북조선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을 발표하였으며 동년 11월 3일에는 인민위원회 선거를 개최하였다. 1947년 2월 22일에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명칭을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변경하였다. 1947년 6월 29일에는 현 조선의 국가인 애국가가 제작되었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현 조선의 국방을 담당하는 실질적인 무장 집단인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고 동년 7월 10일에는 현 조선의 국기인 람홍색공화국기가 제정됨과 동시에 태극기가 폐지되었다.
1948년 8월 15일, 결국 조선반도 남부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도 이에 발맞춰 동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총선거를 개최, 마침내 1948년 9월 9일 공식적으로 초대 내각 수상을 김일성,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김두봉으로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결국 조선반도는 이념의 차이를 이겨내지 못한 채 두 개의 국가로 갈라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조국해방전쟁, 김일성의 통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소련의 경제를 성장시킨 스탈린,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원 전체를 장악한 마오쩌둥과는 달리 반쪽짜리 반도의 지배자였던 김일성은 앞서 말한 그 둘과 같이 '혁명가'로서의 명분이 상당히 부족했던 인물이었다. 김일성은 이 부족했던 명분을 조선반도 통일로 무마하려고 했다. 당시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인민군이 남조선으로 밀고 들어오면 남조선의 30만 남로당원이 봉기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20만 봉기론을 주장하며 김일성의 남침을 꼬드겼으며 당시 전력을 봐도 1950년대 조선의 병력은 135,438명, 대한민국의 병력은 64,697명으로 조선이 대한민국 총 병력의 2배였으며 여기에 더불어 당시 조선은 소련으로부터 원조받은 T-34-76과 T-34-85 전차로 무장해 당시로선 동아시아 최강의 기갑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차가 단 한 대도 없었다.
이런 조선과 대한민국의 엄청난 전력 차이는 김일성이 남침을 단행해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으며 국제적으론 1950년 6월 25일 중국의 대만 침공으로 미국의 시선은 모조리 대만으로 돌려져 있었다. 이에 사전에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1950년 7월 4일 새벽 3시에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기습 남침을 의결, 1시간 뒤인 새벽 4시 작전명 '폭풍'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기습 남침을 진행한다. 조국해방전쟁의 시작이었다.
2배나 차이 나는 양 진영의 전력 차이를 방증하듯 조국해방전쟁 발발 3일 만인 7월 7일 서울시가 조선인민군에게 완전히 함락당했고 8월에는 대한민국의 영토 90%가 조선에게 점령당했다. 이 시기 박헌영의 주장대로 약 10만 여명의 남로당 당원과 한국민주당의 방해로 인해 시행되지 못한 농지개혁법 때문에 자신들의 토지를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수 십만의 농민들이 단체로 봉기하였다.[9] 여기에 당시 제대로 된 숙군 작업이 실시되지 못해 일부 좌익 계열의 부대가 인민군에 합류하는 일도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미군에게 모든 기대를 걸어야 했으나 위에서 서술한 대로 미국은 대만 함락을 저지해야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겐 충분한 지원이 돌아가지 못했고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에게 연전연패를 기록한다
마침내 1950년 9월 12일 마산 전투의 패배를 시작으로 다부동 전투, 영천·신녕 전투에서 한미연합군이 인민군에게 대대적으로 패배해 낙동강 방어선이 돌파당하게 된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에게 제주도로의 정부 이전을 제안하게 되고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던 이승만은 이를 수락하며 대한민국 정부는 수 십만의 피난민을 이끌고 제주도로 도피한다. 마침내 김일성은 1950년 XX월 XX일 부산에서 조국통일을 선언하여 조국해방전쟁은 발발 N개월 만에 조선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된다.
김일성의 실각, 박헌영과 허가이
개문정책, 강성산의 개혁개방
조선의 21세기와 현대
지리
행정구역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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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가주석
정무원 총리
최고인민회의
틀:조선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의 원내 구성 (당신들의 조선)
정당
경제
화폐

조선의 공식적인 법정 통화로 ISO 4217 코드는 KPW이다. 2023년 1월 기준 원화는 1달러 당 100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오원짜리 지폐부터 오천원짜리 지폐까지 다양한 종류의 지폐가 존재한다. 현재 통용되는 제5차 조선 원은 총 9장(오원, 십원, 오십원, 백원, 이백원, 오백원, 천원, 이천원, 오천원)의 지폐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원화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 1947년 12월까지 사용된 소련 군표를 대체하기 위해 생겨났으며 현재의 원화는 총 4번의 화폐 개혁을 거쳐 챙겨난 원화이다. 1979년부터 2009년까지의 과거에는 모든 화폐 앞면에 박헌영의 초상이 삽화로 새겨져 있어 주석돈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었다. 그러나 현재 통용되는 5차 원화에는 박헌영의 초상화가 모두 지워져버려 주석돈이라는 별칭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끊임없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 신뢰도를 잃어버린 제주 원을 대체하여 사용되는 제주의 비공식 화폐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 당국에서는 조선 원의 사용을 막기 위해 검열단까지 조직하면서 단속하고 있으나 조선 원의 사용률은 현재도 꾸준히 올라가는 중이다.
사회
종교
언어
군사
문화
문학
음악
영화
외교
남북관계
조미관계
조중관계
조일관계
조러관계
- ↑ 이 외에도 강성대국(强盛大國), 강성국가(强盛國家), 지상락원(地上樂園)도 비공식적 표어로서 군데군데 사용되곤 한다.
- ↑ 헌법상 조선은 다당제 국가로 조선사회민주당과 같은 정당이 원내 의석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여당인 조선로동당의 의석 수에 미치지 못하며 이마저도 정부에서 깊게 관여하고 있는 관제야당(우당)이기에 조선은 사실상의 일당제 국가로 취급된다.
- ↑ 국제화 국가 코드 최상위 도메인.
- ↑ 단, 공식 국명에 '인민공화국'이 들어가지만, 자본주의 국가인 방글라데시처럼 인민공화국이라는 칭호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가리지 않고 사용되는 명칭이다.
- ↑ 이 때문에 박헌영 집권 초기인 1956년에서 1957년 사이에는 국명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변경하는 안건이 긍정적으로 검토되기도 했으나 이는 허가이와 소련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 조선(Joson)도 이와 견줄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플래그 캐리어인 고려항공에서는 조선을 Korea 대신 Joson으로 표기하고 있다.
- ↑ 직역하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으로, 해외에서는 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 ↑ 소련은 구 나치 독일 본토에 세워진 점령지에만 군정청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폴란드와 같이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지역에 세워진 점령지에는 민정청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 ↑ 이 때문에 해외의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 당시 대한민국에서 농지개혁법이 통과돼 토지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졌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현재와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