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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1 = 초대 청나라 황제

2023년 3월 19일 (일) 12:4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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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고증 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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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총리
대수 이름 임기 정당 총선
1

김옥균
(1851~1907)
1884년 12월 17일 ~ 1896년 9월 13일
(11년 274일)
개화당 1893
2

이완용
(1858~1931)
1896년 9월 14일 ~ 1899년 2월 22일
(2년 162일)
개화당 1896
3

황현
(1855~1920)
1899년 2월 23일 ~ 1901년 4월 9일
(2년 45일)
보국당 1899
4

김홍집
(1842~1910)
1901년 4월 10일 ~ 1906년 2월 9일
(4년 306일)
보수당 1902
5

박영효
(1861~1939)
1906년 2월 10일 ~ 1912년 5월 27일
(6년 109일)
개화당 1906
1910
6

유길준
(1856~1923)
1912년 5월 28일 ~ 1914년 6월 6일
(2년 10일)
개화당 1913
7

서재필
(1864~1951)
1914년 6월 7일 ~ 1918년 11월 18일
(4년 164일)
개화당 -[1]
8

이승만
(1875~1968)
1918년 11월 18일 ~ 1925년 12월 28일
(7년 41일)
대한국민회 1918
1919
1923
9 파일:손정도 4-3.png

손정도
(1881~1931)
1925년 12월 29일 ~ 1926년 3월 8일
(72일)
대한국민회 -
10

이상설
(1871~1933)
1926년 3월 9일 ~ 1930년 3월 8일
(4년)
자유당 1926
11

양기탁
(1871~1938)
1930년 3월 9일 ~ 1934년 1월 16일
(3년 311일)
한인사회당 1930
12

이동휘
(1873~1935)
1934년 1월 16일 ~ 1935년 1월 31일
(1년 16일)
한인사회당 1934
-[2]

신채호
(1880~1936)
1935년 2월 1일 ~ 1935년 4월 10일
(71일)
한인사회당 -
13

유동열
(1885~1950)
1935년 4월 11일 ~ 1935년 5월 26일
(46일)
한인사회당 -
14

안창호
(1878~1947)
1935년 5월 27일 ~ 1940년 7월 14일
(5년 49일)
대한민주당 1935
1938
15

김창암
(1876~1953)
1940년 7월 15일 ~ 1944년 11월 20일
(4년 128일)
대한국민회 -[3]
16

조만식
(1883~1954)
1944년 11월 21일 ~ 1945년 7월 8일[4]
(230일)
대한민주당 -
17

여운형
(1886~1979)
1945년 7월 9일 ~ 1951년 8월 10일
(6년 32일)
사회민주당 1945
1947
-

조용은
(1887~1958)
1951년 8월 11일 ~ 1951년 10월 9일
(60일)
사회민주당 -
18

조봉암
(1898~1975)
1951년 8월 11일 ~ 1957년 2월 10일
(5년 124일)
사회민주당 1951
1954
19

윤보선
(1897~1975)
1957년 2월 10일 ~ 1959년 6월 10일
(2년 123일)
신한국당 1957
20

장면
(1899~1981)
1959년 6월 11일 ~ 1969년 9월 10일
(10년 92일)
신한국당 1959
1962
1966
21

김성주
(1912~1994)
1969년 9월 11일 ~ 1969년 12월 28일
(109일)
신한국당 -
22

장준하
(1918~1987)
1969년 12월 29일 ~ 1972년 6월 16일
(2년 200일)
자유당 1969
23

김철
(1926~1998)
1972년 6월 17일 ~ 1973년 9월 4일
(1년 80일)
사회민주당 1972
23

김영삼
(1928~2015)
1973년 9월 5일 ~ 1979년 4월 12일
(5년 일)
사회민주당 1974
1977
24

이범석
(1925~2005)
1979년 4월 13일 ~ 1981년 4월 13일
(2년 1일)
무소속 1979
25

김대중
(1924~2011)
1981년 4월 14일 ~ 1990년 1월 25일
(8년 일)
신한국당 1981
1985
1988
26

이기택
(1937~2016)
1990년 1월 26일 ~ 1995년 3월 27일
(5년 일)
신한국당 1990
1992
27

홍숙자
(1933~)
1995년 3월 28일 ~ 1997년 5월 2일
(2년 일)
사회민주당 1994
28

이회창
(1937~)
1997년 7월 26일 ~ 2003년 9월 27일
(4년 일)
신한국당 1997
2000
29

노무현
(1946~)
2003년 12월 29일 ~ 2007년 6월 9일
(3년 일)
자유당 2003
30

김문수
(1951~)
2007년 6월 10일 ~ 2016년 3월 21일
(8년 일)
사회민주당 2007
2010
2012
31

정병국
(1937~)
2016년 3월 22일 ~ 2021년 9월 8일
(5년 일)
신한국당 2016
2019
32 파일:원희룡 4-3.png

원희룡
(1937~)
2016년 3월 22일 ~ 2021년 9월 8일 신한국당 2022
..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K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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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당
한문명 韓人社會黨
영문명 Korean Socialist Party (KSP)
창당일 1917년 5월 11일
전신 노동자협회
분리된 정당 / 1935년 분당
해산일 1938년 9월 5일
후신 틀:대한공산당 (개화) (주류)
틀:국민사회당 (개화)
역대 총리 양기탁 / 제13대 • 1930~1934
이동휘 / 제14대 • 1934~1935
유동열 / 제15대 • 1935
의장 이동휘 / 초대
박헌영 / 말대
이념 • 1917-1935
사회주의
베른슈타인주의, 구조개혁주의 (사회당 우파)
혁명적 사회주의, 좌익민족주의 (사회당 좌파)

• 1935-1938
혁명적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박헌영계)
좌익민족주의 (유동열계)
스펙트럼 • 1917~1935
좌파 빅텐트 (중도~극좌)

• 1935~1938
좌익 ~ 극좌
국민의원 35석 / 300석 (11.7%)[5]
당색
적색 (#B80000)
국제조직 (1919~1935)
(1935~1938)

개요

1917년부터 1938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역사

창당

20세기 초, 사회주의 성향의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추원에서 노동자협회라는 이름의 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노동자의 처우 개선, 근로기준법 제정, 노조 활동 방해 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노동자협회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운동을 벌였으나 별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에 노동자협회 지도부와 회원들은 조직화된 정당의 필요성을 느꼈고 1917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초대 의장으로는 노동자협회 회원 중 대중인지도가 가장 높은 이동휘가 추대되었다.

성장과 집권

급속도로 진행되는 산업화에 도시 노동자들의 수 역시 급속도로 늘었고, 사회당은 이들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했다. 1927년, 공장 관리진 측의 부당한 대우에 원산 노동자연합회가 전면적 파업을 일으킨 원산 총파업 당시 당 지도부가 총출동하여 파업을 지원하며 그 세력이 급속도로 불었다.

1929년 이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한국의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지자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1930년 총선에서 과반의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제3당으로 굴어떨어지고 한인사회당이 대한국민회를 제치고 중추원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민주적으로 집권한 첫 사례였다.[6]

총리로 선출된 이는 사회당 온건파의 거두 양기탁이었다. 양기탁 내각은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하고 노조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양기탁 내각은 농촌 문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7] 경제 정책 역시 이전 수권 정당들에 비해 상당히 투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동열, 김안산[8], 박헌영 등 사회당 급진파는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대한국민회대한민주당, 그리고 자유당은 한인사회당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집권 축하 편지를 받은 것을 문제삼아 사회당을 소련의 프락치 정당이라는 주장을 하며 파상공세를 가했다.

안팎의 압박에 결국 양기탁은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을 중재하던 이동휘가 당 의장에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분열과 쇠퇴

이동휘와 한인사회당 9기 지도부[9]

이동휘는 당내외의 걱정을 뒤엎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1934년에 치루어진 13회 총선에서 한인사회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우 민족단결연맹의 약진으로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이 연립하여도 한인사회당의 의석수보다 적었기에 한인사회당은 내각구성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만의 단독 소수내각을 꾸리기에는 국정운영의 차질이 불가피해 보였기에 이동휘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자유당과의 연정을 시도하였고 교섭 끝에 연정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35년 이동휘가 급사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급진파와 온건파 양측의 인정을 받던 이동휘가 사라지면서 한인사회당은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총리 대행을 맡았던 신채호와 당 부의장 김립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었지만,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급진파와 온건파 양쪽 모두로부터 불호를 받았기에, 김립은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인해 당 내에서 큰 힘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온건파와 급진파를 중재하는 데에 실패했다.

유일한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급진파와 온건파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맞붙게 되었다. 양측은 차기 의장을 뽑을 전당대회에 사활을 걸었는데, 1935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치루어진 임시 전당대회에서 급진파의 지지를 받은 유동열이 온건파의 지지를 받은 조용은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의장에 선출되면서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직후 유동열이 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 추진을 선언하자 이에 자유당이 반발해 연정 탈퇴를 선언하였다.

총리 선출 직후 민족단결연맹에 의해 발의된 내각불신임안이 민단련,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에 사회당 온건파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총리 유동열에게 코민테른 가입 추진 선언을 철회해 타 정당들을 안심시킬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탈당하겠다고 급진파를 압박했으나 사회당 급진파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조용은, 안공근 등 온건파 인사들을 해당행위를 이유로 제명했고 이에 반발한 온건파는 집단 탈당 후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몰락

그동안 대한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지나치게 온건하고 현실안주적이었다. 이제 대한 인민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박헌영, 제11대 의장 취임사 중

유동열은 국무총리 사퇴를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렇게 하여 치러진 선거가 1935년 제14회 총선이다. 14회 총선에서 국민회민주당은 선거연대를 꾸려 집권에 성공한 반면 사회주의 진영은 지지율도 낮아진 상황에서 한인사회당과 사회민주당으로 분열된 상태였던지라 표가 분산되어 한인사회당은 의석을 절반 이상 잃으며 실권했다.

14회 총선에서의 참패 이후 의장 유동열의 리더십이 흔들렸다. 이미 온건파는 탈당해 다른 살림을 꾸린 상태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박헌영계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성향인 유동열계에 도전해왔다. 결국 유동열은 박헌영계의 압박에 총선 패배와 분열의 책임을 지고 1935년 11월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또다시 열린 임시전당대회에서 박헌영이 의장에 당선되면서 당은 더욱 좌경화되었다. 박헌영은 당명을 대한공산당으로 바꾸고 더욱 좌경화된 당 강령과 노선을 제정하였다.

성향

초중기

사실은 나도 우리 당에 존재하는 정파가 정확히 몇 개인지 모른다. 나 외에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양기탁 당시 국무총리겸 당의장, 1931년

초기에서 중기까지의 한인사회당은 극좌 레닌주의자부터 중도에 가까운 개혁주의자까지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인사들이 모인 정당이었다.

  • 온건파: 양기탁, 이동녕 등의 온건파는 독일의 온건좌파 정치사상가 베른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시대에 따른 자본주의의 변화에 주목하였고, 이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를 통한 민주적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은 폭력혁명을 부정하였으며 자본주의의 다음 발전단계가 사회주의라는 마르크스의 전제에도 의문을 제시했다.
  • 급진파: 유동열, 김안산, 박헌영 등의 급진파는 세계 자본주의가 수십 년 내로 완전히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핸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다만 이들은 의회민주주의에는 회의적이었으나 한국의 견고한 의회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의회 진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 중립파: 이동휘, 김립 등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필연이라고 보았으나 급진파와는 달리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체제 수립 과정이 민주적이고 평화적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들은 의회민주주의에도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위에 나온 3대 정파 외에도 수많은 군소정파들이 사회당 내에 존재했다. 이렇게 지나치게 넓은 스펙트럼은 사회당 분당과 쇠퇴의 단초가 되었다.

말기

유동열이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구조개혁주의를 주장하던 당내 온건파가 사회민주당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 남은 한인사회당은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사회당 내에는 다시 두 거지 정파가 대두되었다. 하나는 유동열로 대표되는 좌익민족주의 계열이었도 또다른 하나는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친소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었다.

유동열이 의장이었던 시기에는 좌익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레닌주의 계열이 그들을 견제하는 모양새였지만 박헌영이 당권을 잡은 후에는 레닌주의 계열이 당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당가

한인사회당 당가
인터내셔널가
The Internationale

깨어라, 노동자의 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 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한인사회당 당가 <인터내셔널가>

창당과 함께 채택된 당가. 인터내셔널가를 한국어로 개사해 사용하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김안산이 개사하였다. 사회당 온건파는 가사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불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동휘, 신채호 등 당 내 중립적인 인사들이 그냥 쓰자(...)고 해서[10] 채택되었다고 한다.

인터내셔널가는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대한공산당, 국민사회당, 자주인연맹 등에서 사용되었으나 인터내셔널가를 불호하던 사회당 온건파가 창당한 사회민주당은 독자적인 당가를 작곡해 쓴다.

역대 지도부


역대 한인사회당 당수
[ 펼치기 · 접기 ]

한인사회당은 의장이 당의 대표였다. 의장의 임기는 2년으로, 중임이 가능했다. 의장은 2년에 한 번 치러지는 전당대회에서 선출되었는데,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후보 4명을 뽑아 2차 투표를, 2차 투표에서도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그중애서 상위 후보 2명을 뽑아 3차 투표를 치러 선출하였다.

역대 선거 결과

연도 지도자 의석수 (의석율) 의석증감 지위
1918 이동휘
9 / 200 (5%)
증가 2석
증가 1%
제2야당
1919
17 / 250 (7%)
증가 8석
증가 2.3%
제2야당
1923 이동녕
39 / 250 (16%)
증가 22석
증가 8.8%
제2야당
1926 홍범도
37 / 250 (15%)
감소 2석
감소 0.8%
제2야당
1930 양기탁
124 / 250 (50%)
증가 87석
증가 34.8%
여당
1934 이동휘
115 / 250 (46%)
감소 9석
감소 3.6%
여당
1935 유동열
43 / 300 (14%)
감소 72석
감소 31.7%
제1야당
1938 박헌영
35 / 300 (12%)
감소 9석
감소 3%
제2야당

각주

gae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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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한문명 開化黨
영문명 Reform Party (RP)
창당일 1884년 12월 4일
전신 급진개화파
분리된 정당 / 1918년 분당
후신
역대 총리 김옥균 / 제1대 • 1884~1896
이완용 / 제2대 • 1896~1899
박영효 / 제5대 • 1906~1912
유길준 / 제6대 • 1912~1914
서재필 / 제7대 • 1914~1918
총재 김옥균 / 초대
서재필 / 말대
이념 자유민주주의
급진적 자유주의
국민자유주의
문명개화론

헌군주의[11] (~1895)
공화주의[12] (1895~)
스펙트럼 중도 ~ 중도좌파
국민의원 77석 / 200석 (38.5%)[13]
당보 독립신문
당색
하늘색 (#00C5FF)
[14]

개요

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 대한국, 그리고 대한민국자유주의 정당.

역사

태동

개화당의 기원은 19세기 중후반 고종이 실시한 개화정책과 함께하였다고 평가받는다. 개화 정책에 찬성하는 이들 중 급진적인 개파를 급진개화파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서양의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사회제도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명개화론을 지지하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조선 고유의 제도와 사상을 유지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개화파와 대립했다. 이들의 리더는 김옥균이었으며,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이완용, 서재필, 윤치호 등이 핵심멤버였다.

갑신혁명과 창당

갑신혁명의 주역들[15]

고종의 개화가 지나치게 느리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급진개화파는 장변을 통해 훨씬 더 급진적인 개화를 이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공사관이 공사관 경비대를 동원해 정변을 지원하겠다는 의향을 밝혔으나 급진개화파는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는 갑신혁명을 일으켰다. 정변은 성공적이었다. 급진개화파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함과 동시에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고 한성(경성)의 국가 주요 기관들을 모조리 장악했다. 속전속결이었다.

한성에 주둔하던 청군은 지일 성향의 급진개화파를 견제하고 있었으나, 워낙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급진개화파는 조련국 사관장[16] 서재필 등이 이끄는 조련국 생도부대를 동원해 군권까지 장악하였고 지방조직을 통해 지방행정까지 통제하면서 청군은 개입일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 급진개화파는 고종의 입을 빌려 새 인사와 개혁정강을 발표를 단행하였다. 이 인사로 급진개화파 리더였던 김옥균은 총리서리에 임명되었으며 급진개화파 주요 인사들과 급진개화파에 협조적이었던 일부 온건개화파 인사들도 요직에 배치되었다. 주요 멤버들도 동시에 청군 철수도 요구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한성에서의 외국 세력 간 균형 유지를 위해[17] 보류되었다.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급진개화파는 갑신혁명의 성공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정당이 필요하다 판단하였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정당이 바로 개화당이다. 총재에는 급진개화파의 리더인 김옥균이 추대되었다.

집권과 실권

개화당 집회 (1897)
친서방 지식인과 상공인 등 주로 신흥 계층의 지지를 받던 김옥균 내각은 보통선거에 앞서 국민을 계몽하여 기반을 다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게혁을 통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할 때까지 총선을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갑심혁명 이후 9년만인 1893년, 역사적인 첫 총선이 치러졌다. 총선에서 개화당은 온건개화파의 보수당과 위정척사파의 보국당을 누르고 중추원 내 단독 과반을 확보, 내각을 구성했다. 총리대신에는 기존 총리이자 개화당 총재였던 김옥균이 취임했다.

1895년, 실권 없는 얼굴마담이던 고종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와 모의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비록 고종 아관파천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일국의 군주가 국민의 지지로 구성된 정부를 외세의 힘을 빌려 전복하려 했던 쿠데타였기에 이 사태는 일대의 정치격변을 몰고 왔다. 이 사태를 계기로 개화당은 헌군주의 지지에서 공화주의 지지로 전향하였고 보수당과 함께 군주정을 폐지, 민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896년, 김옥균이 아관파천 사태에 대한책임을 지는 모양새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재무부장관이었던 이완용이 당 총재로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1898년, 영국의 자원을 얻어내기 위해 김옥균 내각이 제주도를 영국에 조차지로 양도하자 대규모의 만심 이반이 발생하였고 개화당은 집권 14년만에 정권을 온건개화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재집권과 1차 세계대전

1906년 총선에서 개롸당은 재집권에 성공했고 박영효를 국무총리로 하는 박영효 내각이 출범했다.

자유당으로

당 강령

개혁개화선언 (改革開放宣言) 현재 조선은 크나큰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세계 열강들은 호시탐탐 이 조선을 종속하려 하고 있으며 내부로는 탐관오리의 부패와 오랜 쇄국정책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조선의 4천년 독립의 불꽃이 결국 꺼져버릴 것이 자명하다.

이에 우리 급진개화파는 조국의 독립과 개혁, 개화의 선봉에 서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출하고자 바야흐로 대한 전국의 개혁•개방 세력의 총연합체이자 총본산인 개화당을 창당한다. 우리 개화당은 헌법의 지배 아래 만민의 권리가 보호받는 대한을 건설할 것을 맹세하며, 이를 위해 개혁, 개방의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개화당은 자유로운 선거를 통한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며, 이를 통한 국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보장되고 장려되는 국가를 만들 것이다. 또한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 하에 만민이 공평한 권리와 기회를 보장받는 국가를 만들 것이다.

개화당은 외국의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여 조국의 현대화를 위해 진력할 것이며, 옛시대에는 천시받았던 상공업과 신학문을 장려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산업과 학문 역시 소외받지 않도록 할 것이다.

개화당은 침략적 제국주의와 배타적 국수주의를 거부하며, 만국공법의 준수와 상호호혜의 실현으로 이루어질 세계 평화를 절대 지지한다. 개화당은 각 민족이 각자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믿으며, 민족의 자결이 보장되는 동시에 이웃 민족간의 화합 역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일천만 국민이여! 지금 조선은 중대한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과거로의 퇴보냐, 미래로의 진보냐의 문제에서 오직 개화당만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개화당은 신시대를 열 준비가 되어있다!

모여라, 개화당의 깃발 아래!

당가

개화당 당가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모두 함께 싸우자 누가 나와 함께 하나
저 너머 장벽 지나서 오래 누릴 세상
자 우리와 싸우자 자유가 기다린다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 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개화당 당가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성향

역대 지도부


역대 개화당 총재
[ 펼치기 · 접기 ]

개화당은 34년의 기간 동안 총 6명이 총쟈의 자리를 거쳐갔는데 그 중 서광범을 제외한 5명이 총리를 역임했다. 34년 중 12년은 김옥균이 총재였다.

본부

당보

역대 선거 결과

연도 지도자 의석수 (의석율) 의석증감 지위
1893 김옥균
56 / 100 (56%)
- 여당
1896 이완용
58 / 100 (58%)
증가 2석
증가 2%
여당
1899
53 / 120 (44%)
감소 5석
감소 13.8%
야당
1902 서광범
58 / 120 (48%)
증가 5석
증가 4.2%
야당
1906 박영효
77 / 120 (64%)
증가 19석
증가 15.1%
여당
1910
65 / 120 (54%)
감소 12석
감소 10%
여당
1913 유길준
80 / 120 (67%)
증가 15석
증가 12.5%
여당
1918 서재필
77 / 200 (39%)
감소 3석
감소 28.2%
야당

각주

K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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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회
한문명 大韓國民會
영문명 Korean Nationalist Association (KNA)
창당일 1918년 1월 10일
전신
흡수한 정당 / 1919년 흡수합당
분리된 정당 / 19■■년 분당
해산일 195■년 ■월 ■일
후신 틀:신한국당 (개화)
역대 총리 이승만 / 제8대 • 1918~1925
손정도 / 제9대 • 1925
김창암 / 제15대 • 1940~1944
총재 이승만 / 초대
윤보선 / 말대
이념 보수주의
일민주의[18]
중도실용주의

내부 계파
보수자유주의
자유방임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스펙트럼 우파 빅텐트 (중도 - 우익)
국민의원 68석 / 300석 (22.7%)[19]
당기
당색
남색 (#254170)

개요

1918년부터 19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보수주의 정당.

역사

대한국민회 창립대회[20]

성향

대한국민회는 보수주의 빅텐트 정당이었다. 좌로는 보수자유주의자부터 우로는 국민보수주의자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정치인들이 분포해 있었으며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대한민주당과 함께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을 대표했다.

국민회는 애국심 강조, 사회 체제의 안정 추구, 급진적 반공정책 실시 등 보수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 여성 인권 신장과 취업훈련 지원을 주장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들도 일부 지지했다.

일민주의

대한국민회는 일민주의(一民主義/Ilminism)라는 이념을 당 강령에 명시해두었다. 일민주의는 1918년 이승만이 8회 총선 직전에 창시한 이념으로, 대한국민회가 대한민주당과 합당해 신한국당을 창당할 때꺼지 당의 공식 이념이었다.

일민주의는 (시민)민족주의에 사회자본주의를 결합시킨 이념으로, 하나의 국민(一民)은 모두가 인간적인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상이었다. 주로 이승만의 기독교 인본주의적 사상에서 기원했다고 평가받는다.

일민주의는 1920년대까지는 경제적으로 중도좌파적인 사상이었으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의 등장으로 다소 우경화되어 1930년대부터는 중도적인 이념이 되었다. 그와 별개로 일민주의는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익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역대 지도부

틀:역대 대한국민회 총재 (개화)

역대 선거 결과

연도 지도자 의석수 (의석율) 의석증감 지위 비고
1918 이승만
92 / 200 (46%)
- 여당
1919
139 / 250 (56%)
증가 47석
증가 9.4%
여당
1923
122 / 250 (49%)
감소 17석
감소 6.8%
여당
1926 손정도
80 / 250 (32%)
감소 42석
감소 16.8%
야당
1930 이시영
87 / 250 (35%)
증가 5석
증가 2.8%
야당
1934
63 / 250 (25%)
감소 24석
감소 9.6%
야당
1935 함태영
74 / 300 (25%)
증가 11석
감소 0.5%
연립여당 [21]
1938 김창암
80 / 300 (27%)
증가 6석
증가 2%
연립여당 [21]
1945 윤치영
65 / 300 (22%)
감소 15석
감소 5%
야당 [21]
1947 이범석
72 / 300 (24%)
증가 7석
증가 2.3%
야당 [21]
1951
61 / 300 (20%)
감소 11석
감소 3.7%
야당 [21]
1954 윤보선
90 / 400 (23%)
증가 29석
증가 2.3%
야당 [21]

각주

bo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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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당
한문명 保守黨
영문명 Conservative Party
창당일 1884년 7월 8일
전신 온건개화파
해산일 1919년 8월 19일 / 대한국민회에 흡수합당
역대 총리 김홍집 / 제3대 • 1901~1906
당수 김윤식 / 초대
홍종우 / 말대
이념 보수주의
동도서기론

헌군주의[22] (~1895)
공화주의[23] (1895~)
스펙트럼 중도우파
국민의원 4석 / 250석 (1.6%)[24]
당색
녹색 (#254170)

옥균's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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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대한민국 국무원 내각 (개화)
김옥균 내각
李承晩内閣 | Rhee Syng-man Cabinet
1884년 12월 17일 ~ 1896년 9월 13일
출범 이전 이후
- 이완용 내각
국무총리 김옥균 / 제8대
부총리 박정양 / 외무장관 겸직 (1884년~1889년)
한규설 / 법무장관 겸직 (1889년~1892년)
이상재 / 문교장관 겸직 (1892년~1896년)
주요 선거 8회 총선 (1918)
9회 총선 (1919)
10회 총선 (1923)
여당
김옥균 국무총리

개요

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상세

정치

외교·국방

내정

각주

싱먼's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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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대한민국 국무원 내각 (개화)
이승만 내각
李承晩内閣 | Rhee Syng-man Cabinet
1918년 11월 18일 ~ 1925년 12월 18일
출범 이전 이후
서재필 내각 손정도 내각
국무총리 이승만 / 제8대
부총리 이용익 / 국방장관 겸직 (1918년~1919년)
박용만 / 내무장관 겸직 (1919년~1922년)
손정도 / 교통장관 겸직 (1922년~1925년)
주요 선거 8회 총선 (1918)
9회 총선 (1919)
10회 총선 (1923)
여당
연립여당 / 1918~1919
이승만 국무총리

개요

1918년 11월부터 1925년 12월까지 약 7년 1개월간 이어진,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한 내각. 대한국민회의 첫 내각이었다.

상세

정치

외교·국방

내정

각주

okg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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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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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홍집 권동진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유길준 서재필 이승만 김가진 안창호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김규식 김창암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조만식 여운형 조봉암 윤보선 장면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김성주 장준하 김철 김영삼 김대중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이기택 홍숙자 이회창 노무현 김문수
제31대 제32대
정병국 유승민

고구려 국상 · 고구려 대막리지 · 신라 상대등 · 고려 문하시중 · 조선 영의정 · 대한국 총리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김옥균
金玉均 | Kim Ok-kyun
시호 충달 (忠達)
출생 1851년 2월 23일
조선의 기 대조선국 충청우도 공주목
사망 1907년 9월 14일 (향년 56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경성부 노원구
임기 조선국 내각총리대신
1884년 12월 17일 ~ 1889년 월 일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1889년 월 일 ~ 1895년 월 일
초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1895년 월 일 ~ 1896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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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김병기 (양부)
전주 이씨 부인 (양모)
풍양 조씨 부인 (양계모)

김병태 (생부)
은진 송씨 부인 (생모)
배우자 기계 유씨 부인
자녀 1남 2녀
본관 신 안동 김씨
고균 (古筠)
종교 유교 → 불교
신체 키 155cm
소속 정당 (최종 당적)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
지역구 경성 종로
성향 중도 - 중도좌파

급진적 자유주의, 계몽주의, 민족주의
약력 1872년 문과 알성시
1874년 홍문관 교리
1882년 승정원 우부승지
1883년 동남개척사
1883년 이조 참의
1883년 호조 참판
1883년 판서 서리
1884년 총리 서리
1884년 내각총리대신
1884년 개화당 총재
1895년 국무총리

Pokémon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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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조선국왕 (개화)
조선국 26대 국왕 | 대한국 황제
고종
高宗 | Gojong
본명 이형 (李㷗)
시호 고종 (高宗)
출생 1852년 9월 8일
조선의 기 대조선국 한성부 정선방
사망 1918년 7월 19일 (향년 65세)
노를란드 (도거랜드)의 기 노를란드
재위 제26대 조선국 국왕
1864년 12월 17일 ~ 1889년 월 일
대한국 황제
1889년 월 일 ~ 1895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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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김병기 (양부)
전주 이씨 부인 (양모)
풍양 조씨 부인 (양계모)

김병태 (생부)
은진 송씨 부인 (생모)
배우자 기계 유씨 부인
자녀 1남 2녀
본관 신 안동 김씨
고균 (古筠)
종교 유교
신체 키 153cm, 체중 73kg
소속 정당 (최종 당적)

juk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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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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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8대 국무총리
조봉암
曺奉岩 | Cho Bong-am
출생 1898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
사망 1975년 3월 18일 (향년 76세)
경성부 송파구 경성아산병원
임기 제18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1951년 8월 11일 ~ 1957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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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김금옥 (사별)
김조이 (재혼)
자녀 1남 3녀
본관 창녕 조씨
죽산 (竹山)
학력 주오대학 (정치학 / 중퇴)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소속 정당 (최종 당적)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12, 13, 15, 16, 17, 18, 19, 21, 22
소속 위원회 농림위원회
성향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자유사회주의, 민족주의, 반공주의

개요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

생애

청년기와 정계입문

사회민주당으로

국무총리

연설하는 조봉암 총리

1951년, 여운형이 본인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사민당에서는 차기 대표, 즉 국무총리가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임시 전당대회가 치루어졌다.

전당대회에 참가한 조봉암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는 총리 대행을 맡고 있던 현직 부총리 조용은이었다. 64세의 조용은은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한 반면 53세의 조봉암은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두 사람 다 조씨였기에 언론에서는 그 전당대회를 '양조대전'이라고 불렀다. 당시 전당대회는 여운형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의 여파로 치러진 전당대회였기 때문에 당원들은 조용은보다 반공주의 성향이 짙은 조봉암을 더 선호했고 결선투표에서 57%를 득표한 조봉암이 사민당 대표에 선출되어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어록

…또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공산당은 조국을 완전히 쏘련의 괴뢰화하여 민족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칭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며 쏘련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등 맹동을 하고 있습니다.[25]
1941년, 태평양전쟁 중 라디오 연설
'국가에 의한 자유'란 무엇인가. 각 개인이 자신의 정당한 꿈을 펼치는 데에 있어 국가가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어주는 것이 진정한 '국가에 의한 자유'입니다.
1950년, 국민원 원내총무 기조 연설
우리들 자신이 더욱 민주주의 이념에 철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1953년, 전승절 8주년 기념 연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을 가리켜서 한국의 사민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1957년, 국무총리 퇴임 연설

사상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19 - 1935 정계 입문
입당
무소속 1935 노선 차이로 탈당
1935 - 1975 창당
사망

각주

run and r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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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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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여운형 조봉암 윤보선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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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장준하 김철 김영삼 김대중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이기택 홍숙자 이회창 노무현 김문수
제31대 제32대
정병국 유승민

고구려 국상 · 고구려 대막리지 · 신라 상대등 · 고려 문하시중 · 조선 영의정 · 대한국 총리

틀:이승만 관련 틀틀 (개화)

대한민국 제8대 국무총리
이승만
李承晩 | Rhee Syng-man
출생 1875년 3월 26일
조선의 기 대조선국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사망 1979년 10월 10일 (향년 104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경성부 종로구 경성대학교병원
묘소 대한민국 현충원 국무총리묘역
임기 제8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1918년 11월 18일 ~ 1925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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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박승선 (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재혼)
본관 전주 이씨
우남 (雩南)
학력 배재학당 (졸업)
조지 워싱턴 대학교 (정치학 / 학사)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박사)
종교 유교 → 개신교
소속 정당 틀:신한국당 (개화) (최종 당적)
의원 선수 18[26]
의원 대수 4, 5, 6, 7, 8, 9, 10, 11, 13, 15, 16, 17, 18, 19, 21, 22
소속 위원회 외무위원회 → 상공위원회 → 문교위원회 → 외무위원회
성향 중도우파

진보적 보수주의, 기독교 인본주의, 일민주의, 반공주의

개요

대한민국의 제8대 국무총리.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며 1차 세계대전 전후 동아시아 질서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애

초기 이력

이승만은 1875년 조선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에서 태어났다. 배제학당에서 수학하며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이승만은 서구 신학문에 큰 관심을 보였고 개화당 인사들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이후 서재필로부터 미국 유학을 권유받고 18세의 나이에 미국 선교사들의 추천장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 히버드 대학교에서 각각 정치학 석사 학위와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01년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 8년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이승만은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되었고, 이는 그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개화당에서

1901년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 귀국한 이승만는 서재필의 권유로 개화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고향인 황해도 봉산에서 중추원 의원에 당선된 그는 앞서 미국에서의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중추원 외무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10년, 박영효 내각의 와무장관에 임명되면서 처음 입각했으며, 외교 성과를 인정받아 박영효 내각 후 이어진 유길준 내각서재필 내각에서도 외무성 장관을 맡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동아시아에 동맹국의 세력이 미약하고 참전 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대한민국이 협상국의 편으로 참전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온건파인 국무총리 서재필과의 의견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둘의 관계도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결국 1918년 이승만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이끌고 개화당을 박차고 나와 대한국민회를 창당하였다.

국무총리

이승만 국무총리 취임식[27]

개화당에서 탈당한 후 이승만을 주축으로 한 대한국민회는 1918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보수당과 연립해 집권하였고, 총재였던 이승만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과반 의석 확보 실패는 이승만에게 있어 정치적 부담이 되었고, 이승만은 이듬해인 1919년 이승만의 중추원 해산하고 총선를 치렀다. 총선에서 국민회가 과반 의석을 획득하면서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은 안정되었다.

이승만은 외교적 성과와 복지 정책을 통해 민심을 사로잡았으나 독선적인 태도와 권력과 재정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서서히 지지를 잃었다. 이후 1923년에 치러진 10회 총선에서 여당인 대한국민회가 과반에 한 석 모자른 122석을 얻었다. 비록 결선투표에서 이승만이 총리로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총선에서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던 와중 의외의 부진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0회 총선 이후 이승만 내각은 권력 누수를 겪았고 결국 이승만은 1926년 국무총리직을 사퇴했다.

장수만세

이승만은 총리직 사퇴 후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어록

나는 사회주의와 연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것을 혐오하오. 나의 국내 정책은 철저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계획된 것이니 날더러 사회주의자니 뭐니 하지 마시오.
1920년, 중추원 국무총리 질의 중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을 내실 제, 아무 데에도 쓸모 없도록 내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1932년

여담

  • 한국 헌정사상 최다선 중추원 의원이다. 1901년부터 1966년까지, 중간의 1930년부터 1934년까지의 4년을 제외하고 자그마치 총 61년간 중추원 의원을 역임했다.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00 - 1917 정계 입문
입당
무소속 1917 정계 개편 위해 탈당
1917 - 1953 창당
틀:신한국당 (개화) 1953 - 1979년 신설합당
사망


pu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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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태동만주 배너 틀:만주 건국 삼걸 (태동만주) 틀:역대 만주국 황제 (태동만주)

만주국 초대 황제
강덕제| 康德帝
본명
중국식 : 아이신줴러(愛新覺羅, 애신각라)
만쥬어 : 아이신기오로(ᠠᡳ᠌ᠰᡳᠨ ᡤᡳᡠ᠋ᡵᠣ)
영문 : Aisin-Gioro


중국식 : 푸이(溥儀, 부의)
만주어
 : 푸이(ᡦᡠ ᡳ)
영문
 : Puyi
출생 1906년 2월 7일
청나라의 기 청나라 직예성 북경
국적 청나라의 기 청나라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기 중화민국
타이완의 기 중화민국
틀:나라자료 만주 (태동만주) 만주국
사망 1984년 10월 17일 (향년 78세)
틀:나라자료 만주 (태동만주) 만주국 신징특별시[28] 아만황궁 (婀满皇宫)
묘소 강덕릉
임기 초대 청나라 황제
1908년 12월 2일 ~ 1912년 2월 12일
초대 청나라 황제 (복위)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초대 만주국 황제
1932년 3월 9일 ~ 1979년 3월 23일
만주국 태상황
1979년 3월 24일 ~ 1984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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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 (海藏)
학력 청나라 향시 급제
종교 티베트 불교
혈통 한족
소속 정당 틀:민주건국회 (태동만주) (최종 당적)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 2
지역구 신징
성향 중도

중도주의, 현능정주의, 이상주의, 시민민족주의, 반공주의
서훈 대한민국 무궁화 대훈장 (1933)
녹우크라이나 영웅 훈장 (1935)
만주 광영대훈장 (1939) / 사후 추서

개요

오늘 우리 나라를 세움에 있어, 도덕과 인애를 주로 하여 종족 간의 마찰과 국제 간의 분쟁을 해소하여 왕도낙토를 이루고자 하니 마땅히 이를 실행할 것이라. 무릇 모든 국민은 이를 위해 힘쓸지어다.
정샤오쉬, 내각총리대신 취임연설 (1932)

만주의 초대 수상. 만주가 국가로서 자리잡는 데에 큰 공헌을 세웠으며 1939년 수상 재임 중 사망했다. 강덕제, 장징후이와 함께 만주 건국 삼걸이라 불리며 만주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생애

사상

현능정제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틀:민주건국회 (태동만주) 1932 - 1939 창당
사망

선거 이력

각주

zhé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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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태동만주 배너 틀:만주 건국 삼걸 (태동만주) 틀:역대 만주국 내각총리대신 (태동만주)

만주국 초대 내각총리대신
정샤오쉬
郑孝胥 | Zheng Xiaoxu
출생 1860년 5월 2일
청나라의 기 청나라 강소현 소주부
국적 청나라의 기 청나라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기 중화민국
타이완의 기 중화민국
틀:나라자료 만주 (태동만주) 만주국
사망 1939년 11월 24일 (향년 79세)
틀:나라자료 만주 (태동만주) 만주국 신징특별시[29] 내각총리대신공관
직업 외교관, 서예가, 정치가, 사상가
임기 초대 만주국 내각총리대신
1932년 3월 9일 ~ 1939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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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 (海藏)
학력 청나라 향시 급제
종교 티베트 불교
혈통 한족
소속 정당 틀:민주건국회 (태동만주) (최종 당적)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 2
지역구 신징
성향 중도

중도주의, 현능정주의, 이상주의, 시민민족주의, 반공주의
서훈 대한민국 무궁화 대훈장 (1933)
녹우크라이나 영웅 훈장 (1935)
만주 광영대훈장 (1939) / 사후 추서

개요

오늘 우리 나라를 세움에 있어, 도덕과 인애를 주로 하여 종족 간의 마찰과 국제 간의 분쟁을 해소하여 왕도낙토를 이루고자 하니 마땅히 이를 실행할 것이라. 무릇 모든 국민은 이를 위해 힘쓸지어다.
정샤오쉬, 내각총리대신 취임연설 (1932)

만주의 초대 수상. 만주가 국가로서 자리잡는 데에 큰 공헌을 세웠으며 1939년 수상 재임 중 사망했다. 강덕제, 장징후이와 함께 만주 건국 삼걸이라 불리며 만주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생애

사상

현능정제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틀:민주건국회 (태동만주) 1932 - 1939 창당
사망

선거 이력

각주

z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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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태동만주 배너 틀:만주 건국 삼걸 (태동만주) 틀:역대 만주국 내각총리대신 (태동만주)

만주국 제3대 내각총리대신
장징후이
张景惠 | Zhang Jinghui
출생 1871년 9월 8일
청나라의 기 청나라 봉천성 태안현
국적 청나라의 기 청나라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기 중화민국
타이완의 기 중화민국
틀:나라자료 만주 (태동만주) 만주국
사망 1960년 7월 16일 (향년 88세)
틀:나라자료 만주 (태동만주) 만주국 신징특별시[30] 자택
직업 군인, 정치가
임기 초대 만주국 내각총리대신
1940년 월 일 ~ 1951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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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叙五)
학력 강무학당
소속 정당 틀:협화회 (태동만주) (최종 당적)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1, 2, 3, 4, 5, 6
지역구 태안
성향 우익

국민보수주의, 만주 내셔널리즘, 황정주의, 반공주의
최종 계급 상장
주요 보직 북양군 제26보병여단장
참전 한청전쟁
서훈 대한민국 무궁화 대훈장 (1943)
만주 광영대훈장 (1960) / 사후 추서

개요


장징후이

만주의 제3대 수상. 태평양전쟁 당시 만주의 전시수상이었으며 종전 이후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만주를 재건하는 데에 힘썼다. 정샤오쉬와 함께 만주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정치가 중 한 명이다.

생애

사상

현능정제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22 - 1928 입당
무소속 1928 - 1931 탈당
틀:협화회 (태동만주) 1931 - 1960 창당
사망

선거 이력

각주

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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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태동만주 배너 틀:역대 만주국 내각총리대신 (태동만주)

만주국 제3대 내각총리대신
천쥔성
陈俊生 | Chen Junsheng
출생 1871년 9월 8일
청나라의 기 청나라 봉천성 태안현
국적 청나라의 기 청나라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기 중화민국
타이완의 기 중화민국
틀:나라자료 만주 (태동만주) 만주국
사망 1960년 7월 16일 (향년 88세)
틀:나라자료 만주 (태동만주) 만주국 신징특별시[31] 자택
직업 군인, 정치가
임기 초대 만주국 내각총리대신
1940년 월 일 ~ 1951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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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叙五)
학력 강무학당
소속 정당 틀:협화회 (태동만주) (최종 당적)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1, 2, 3, 4, 5, 6
지역구 태안
성향 우익

국민보수주의, 만주 내셔널리즘, 황정주의, 반공주의
최종 계급 상장
주요 보직 북양군 제26보병여단장
참전 한청전쟁
서훈 대한민국 무궁화 대훈장 (1943)
만주 광영대훈장 (1960) / 사후 추서

개요


장징후이

만주의 초대 수상. 만주가 국가로서 자리잡는 데에 큰 공헌을 세웠으며 1939년 수상 재임 중 사망했다. 현재까지도 만주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생애

사상

현능정제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22 - 1928 입당
무소속 1928 - 1931 탈당
틀:협화회 (태동만주) 1931 - 1960 창당
사망

선거 이력

각주

bori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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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동방의 오극란 배너 틀:역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동방의 오극란)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 제3대 대통령
보리스 흐레샤티츠키
Борис Хрещатицький
출생 1881년 7월 23일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돈 지방 뮤스카 군
국적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사망 1956년 6월 21일 (향년 74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경성부 종로구 경성대학교병원
묘소 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볼로디보스토크 성 안드레아 사도 국립묘원[32]
임기 초대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
1918년 7월 29일 ~ 1924년 4월 5일
제3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1934년 6월 10일 ~ 1950년 3월 23일[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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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황립 페이지 군단
종교 동방정교회
소속 정당 무소속 (최종 당적)
성향 중도우파 - 우익

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녹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반공주의
최종 계급 우크라이나 극동군 대장 (☆☆☆☆)
최종 보직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
참전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내전
서훈 야로슬라우 현공 훈장 (1918)
만주 광영대훈장 (1935)
대한민국 무궁화 대훈장 (1939)
녹우크라이나 영웅 훈장 (1958) / 사후 추서
우크라이나 영웅 훈장 (1995) / 사후 추서

개요

녹우크라이나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의 제3대 대통령. 군인 출신으로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녹우크라이나가 소련에 합병된 후에는 망명정부 수장을 지냈다.

상세

보리스 흐레샤티츠키는 1881년 러시아 제국 서남부 돈 지방의 부유한 코사크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러시아 제국군 보병 장교로 임관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였다.

러시아 내전 발발 당시 그는 극동 지방에서 고위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우크라이나 극동 공화국을 선포한 극동 지방의 우크라이나인들이 흐레샤티츠키에게 우크라이나 극동군의 사령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하였다. 흐레샤티츠키는 시베리아 지방의 백군 군벌이었던 알렉산드르 콜차크와의 관계도 무난했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은 흐레샤티츠키를 통해 백군과 협력하여 안전을 보장받으려 한 것이다.

우크러이나인들의 제안을 수락한 흐레샤티츠키는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적군과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극동군을 이끌고 콜차크가 지휘하는 백군에 합류했지만 콜차크군이 적군에 패배하면서 흐레샤티츠키는 극동군을 이끌고 녹우크라이나로 서둘러 복귀하였다.

흐레샤티츠키는 극동군 전력만으로는 러시아 적군을 상대할 수 없으므로 외교적 해결책의 필요성을 녹우크라이나 최고의회와 정부에 타진했고 녹우크라이나 정부는 서방 간섭군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이후 1920년 흐레샤티츠키는 극동 지역의 새로운 질서를 결정한 하바로우스크 조약에서 녹우크라이나측 협상단 부대표를 맡았다.

1924년 극동군 총사령관직을 내려놓은 흐레샤티츠키는 자서전과 회고록을 출판하고 녹우크라이나 안보재단 상임이사 등을 맡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30년 정계에 투신했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보수 정당인 우크라이나 국민당에 입당하였고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1934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1938년 재선에 성공하였으나 1940년 극동전쟁에서 녹우크라이나가 소련에 합병되자 한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한국에서 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를 이끌다가 녹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56년 경성대학교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사후에 원래는 함경북도 종원군에 위치한 오극란인 공동묘지에 묻혀있었으나 소련의 붕괴로 녹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녹우크라이나 정부의 요청으로 유해가 녹우크라이나 측에 인도되었고, 1994년 녹우크라이나판 현충원인 성 안드레아 사도 국립묘원으로 이장되었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1930 - 1931 정계 입문
틀:우크라이나 국민당 (동방의 오극란) 1931 - 1934 입당
무소속 1934 - 1956 탈당
사망

선거 이력

각주

김구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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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암 총리 피살사건
金昌巖總理被殺事件
Assassination of Prime Minister Kim Chang-am
▲ 당시 조선일보 기사[34]
발생일시 1944년 11월 20일 오전 7시 40분 경
유형 살인, 적색테러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피의자 김천호 (金天浩, 26세) 등 4인[35]
동기 대한공산당 잔여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기도
피해자 김창암 (제15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개요

1944년 11월 20일, 태평양전쟁 도중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김창암대한청년적위대 단원 김천호 일당에게 백주대낮에 살해된 사건.

전개

1944년 11월 20일,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날 역시 김창암 총리는 관저에서 나와 기자들과 짧은 질의응답을 하고 총리부 청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 앞에서 대기하던 관용차를 탔다.

차가 이동하던 중 다른 차 한 대가 김참암이 타고 있던 차를 들이박았다. 다행히도 김칭암 총리와 운전기사가 가벼운 부상을 입은 걸로 끝났고 사고 직후 두 명의 청년이 사고 현장에 모여든 인파 속에서 나와 차로 접근하더니 김창암 총리와 일행이 차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맙네, 자네들.
김창암이 자신을 도와준 청년들에게 한 말.[36] 이 말이 사실상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 순간, 그 두 명의 청년은 품 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내 김창암과 김창암의 보좌관인 선우진[37], 운전기사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암살범들은 김창암에게만 최소 30여 발을 쏘았다.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총격에 놀라 흩어지자 암살범들은 도망쳤다.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으나 김창암 총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김창암을 살해한 범인 2명은 도주하였으나 사건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장경찰들의 총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범인과 배후

경찰은 사살된 남자들의 지문을 통해 그들이 과거 대한공산당 산하조직인 대한청년전위대에서 활동하다가 수감되었었던 이들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곧 대한공산당을 사건의 배후라고 판단, 수사를 시작하였다.

영향

각주

재건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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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재건정부
大韓國再建政府
Re-established Government of State of Korea
일본의 기 일본제국의 괴뢰국
국기 국장
光明天地
광명천지
1940년 9월 10일 ~ 1942년 2월 16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가 대한국 애국가
수도 경성부 (명목)
동래부 (실질)[38]
정치체제 명목: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동군연합국가

실질: 일본제국의 괴뢰국
황제 소화 황제[39]
내각총리대신 윤치호

개요

태평양전쟁기 일본이 대한민국에 세운 단명한 괴뢰국.

국호

정식 국호는 대한국(재건정부)이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인민공화국 정부는 동래정권 혹은 동래괴뢰정권이라고 불렀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보통 동래정권이라 불린다.

일본이 중국에 세운 괴뢰국인 중화민국 남경국민정부가 왕징웨이 정권이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대한국 재건정부는 윤치호 장권이라 불리지 않는데, 이는 왕징웨이 달리 윤치호는 반강제로 괴뢰정부 수장이 되었고 울며 겨자먹기로 수상직을 슈락한 후에도 일본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부가 위치해있던 동래부의 이름을 따 동래정권이라 부른다.

역사

정치

동래정권은 일본과의 동군연합을 기반으로 하는 입한군주제, 의원내각제 국가를 표방하였다. 주한일본군사령부는 대한민국 정부를 불법정부로 규정하고 대란민국 이전에 존재했던 입헌군주국인 대한국을 재건하였다는 의미에서 괴뢰정권의 이름을 '대한국 재건정부'라고 붙였다.

하지만 동래정권은 실제로는 일본의 완벽한 괴뢰국이었다. 일본은 총리와 각 부 장관을 한국인으로 두되 각 부의 실권 고문에 일본인을 임명해 한국인 장관은 사실상 권력이 전혀 없었다. 정부 운영 경비는 대부분 일본이 제공했으며 치안 역시 일본군이 담당하였다.

각료 임용사

일본은 각부 장관에 한국인을 임명해 독립국의 구색을 맞추어 명목상으로나마 동래정권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고 선전했으나 일본이 장관으로 점찍은 인물들은 한결같이 장관직을 거부했다. 총리의 경우 지역원로 윤치호를 임명하려 했으나 윤치호는 괴뢰정부의 총리직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일본군의 협박에 마지못해 총리직을 받아들였다. 다른 장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기에 괴뢰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전후에도 괴뢰정부에서의 의도적인 태업이 인정되어 처벌받지는 않았다.

군사

동래정권은 보안군이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운용하였다. 총병력은 10만 명으로 계획되었으나 지원자가 없어 최대 병력은 4천 명에 불과했으며 훈련도도 낮아 실전 투입은 되지 못했다. 국군은 보통 괴뢰군이리고 불렀다.

평가

대한이라는 간판만 덩그러니 달아둔 왜놈 집단
김창암, 1940년 12월
경성 정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아성이라면, 동래 정권은 국가의 구색도 못 갖춘 일제 파시스트의 허수아비
박헌영, 1940년 10월

각주

치올코우스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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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올코우스키 전투
Битва за Ціолковський[40]
Битва при Циолковский[41]
▲ 파괴된 소련군 BA-3[42] 장갑차와 한국군 기관총부대
날짜 1936년 4월 11일 ~ 1936년 4월 29일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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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치올코우스키
결과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의 승리
영향 한소분쟁 일단락
소련의 전면전 준비
교전국
공격군
방어군
소비에트 연방의 기 소련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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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의 기 니콜라이 페클렌코[43]
소비에트 연방의 기 그리고리 시테른[44]
소비에트 연방의 기 야코프 스무시케비치[45]
대한민국의 기 홍사익[46]
대한민국의 기 김좌진[47]
대한민국의 기 안창남[48]
녹우크라이나의 기 흐리호리 세메노우[49]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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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7만 8천 명
전차 520대
장갑차 500대
야포 600문
항공기 700기
병력 6만 5천 명
전차 450대
장갑차 378대
야포 530문
항공기 830기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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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손실
사망 6천 5백 명
포로 2천 4백 명
부상 8천 명

◇장비손실
전차 283대
장갑차 216대
야포 134문
항공기 285기
◇병력손실
사망 2천 8백 명
포로 2백 명
부상 5천 9백 명

◇장비손실
전차 126대
장갑차 78대
야포 89문
항공기 233기
각주 [ 펼치기 · 접기 ]
  1. 전시 (제1차 세계대전)
  2. 전임 국무총리 이동휘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한 국무총리 대행
  3. 전시 (제2차 세계대전 - 극동전쟁&태평양전쟁)
  4. 국무총리대행: 1944년 11월 20일 ~ 1945 1월 21일
  5. 해산 당시 기준
  6.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집권정당은 1924년 집권한 몽골 인민혁명당. 다만 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하지 않았다.
  7. 한인사회당의 주 지지기반이 도시 노동자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농촌문제에는 무지했고 관심도 별로 없었다.
  8. 러시아어 이름은 김알렉산드라.
  9. 검은바지 콧수염이 이동휘. 앞줄 맨 오른쪽이 부의장 김립
  10. 실제로는 가사가 뭐 어때서 그러냐고 했다고 한다.
  11. 입헌군주제
  12. 고종아관파천 이후 공식적으로 공화주의를 명시했다.
  13. 당명 변경 당시 기준
  14. 1910년대 초반까지는 특별한 정당색이 없었으나 1918년 총선 직전 하늘색을 당색으로 채택했다.
  15.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16. 현재와 비교하자면 육군사관학교장
  17. 당시 한성에는 청군과 일본군이 공사관 경비를 명분으로 주둔해있었다.
  18. 민족주의+사회자본주의
  19. 해산 당시 기준
  20. 오른쪽 열 한 번째가 이승만.
  21. 21.0 21.1 21.2 21.3 21.4 21.5 대한민주당과 선거연대
  22. 입헌군주제
  23. 고종아관파천 이후 공식적으로 공화주의를 명시했다.
  24. 해산 당시 기준
  25. 출처
  26. 역대 최다선 중추원 의원이다.
  27. 오른쪽 세 번째가 이승만, 두 번째가 안창호.
  28. 옛이름 하얼빈
  29. 옛이름 하얼빈
  30. 옛이름 하얼빈
  31. 옛이름 하얼빈
  32. 1994년 이장
  33. 1940년 부터는 망명정부 대통령
  34. 기사 제목은 '김총리 급서에 각계애도'
  35. 실제로 암살을 실행한 인원 수. 준비와 계획 과정에 연루된 사람의 수는 더 많다.
  36.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의 증언.
  37. 성이 선우고 이름이 진이다.
  38. 정부청사는 현재의 동래부 사상구 동주중학교 일대에 있었다.
  39. 일본제국과 동군연합
  40. 우크라이나어
  41. 러시아어
  42. BA-6일 가능성도 있다. 사진만으로는 식별 불가. 둘의 차이는 차체 후방 문의 유무밖에 없어 구별이 무의미하기도 하다.
  43.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44. 소련 극동군 참모장
  45. 소련 극동군 공군사령관
  46. 주오한국군 총사령관
  47. 주오한국군 지상부사령관
  48. 주오한국군 항공부사령관
  49.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

개요

1936년 녹우크라이나 서북부 치올코우스키에서 벌어진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 대 소련군의 전투. 한-녹오 동맹의 승리로 끝나면서 연해주 지방의 분쟁이 잠시동안 멈췄다.

배경

연해주는 역사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제정 러시아의 후신인 소비에트 연방이 당연히 연해주의 주인이어야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
만주녹오는 대한의 입술이다. 순망치한, 입술이 없으면 시린 법이다.
이승만

러시아는 해양 진출을 위해 대대로 부동항을 손애 넣고 싶어 해왔다. 극동에서 러시아가 보유하고있던 항구 중 그나마 가장 부동항의 가까운 항구도시는 연해주 프리모리예 지방의 볼로디보스토크[1]였는데, 러시아 내전 이후 한국일본이 연해주 지방에 완충지대를 두기 위해 극동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건국한 녹우크라이나를 지원하자 녹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볼로디보스토크를 상실했다. 이에 소련은 부동항을 확보하고 극동에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녹우크라이나를 병합하려 하였다.

한국의 입장에서 녹우크라이나는 일종의 방파제였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한국 정부는 국민회, 자유당, 사회당, 민주당 내각을 가리지 않고 녹우크라이나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안창호 내각은 소련으로부터의 증대되는 위험에 맞서 녹우크라이나와 동맹을 맺고 4만 여 명의 병력을 녹우크라이나 영내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전개

결과

영향

  1. 당시 명칭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