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st 1968 (토론 | 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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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 대통령의 1기 임기는 1961년 1월 20일 정오에 시작되어 1965년 1월 20일 정오에 종료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바 케네디)|쿠바 미사일 위기]], [[피그스만 침공 사태 (비바 케네디)|피그스만 침공 사태]], [[마틴 루서 킹 (비바 케네디)|마틴 루서 킹]]의 흑인 민권 운동, [[우주 경쟁 (비바 케네디)|우주 경쟁]] 등이 있었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는 [[존 코널리 (비바 케네디)|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 방문 도중 [[리 하비 오스왈드 (비바 케네디)|리 하비 오스왈드]]에 의해 [[존 F.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 (비바 케네디)|암살 미수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의 임기 도중 평균 지지율은 60%대 초반으로 매우 높게 유지되었다. |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1기 임기는 1961년 1월 20일 정오에 시작되어 1965년 1월 20일 정오에 종료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쿠바 미사일 위기 (비바 케네디)|쿠바 미사일 위기]], [[피그스만 침공 사태 (비바 케네디)|피그스만 침공 사태]], [[마틴 루서 킹 (비바 케네디)|마틴 루서 킹]]의 흑인 민권 운동, [[우주 경쟁 (비바 케네디)|우주 경쟁]] 등이 있었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는 [[존 코널리 (비바 케네디)|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 방문 도중 [[리 하비 오스왈드 (비바 케네디)|리 하비 오스왈드]]에 의해 [[존 F.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 (비바 케네디)|암살 미수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의 임기 도중 평균 지지율은 60%대 초반으로 매우 높게 유지되었다. | ||
==== 내정 ==== | ==== 내정 ==== | ||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존 F. 케네디의 국내 정책은 경제 성장, 민권, 의료 개혁, 교육 및 기술 혁신 촉진에 중점을 두었다. | |||
케네디의 경제 정책은 재정 및 통화 조치의 조합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실업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소비자 지출과 기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전면적인 감세를 제안했으며, 이는 [[케네디-존슨 감세 (비바 케네디)|케네디-존슨 감세]]로 명명되었다. 세금 감면법은 1964년 케네디의 재선 직전 제정되었으며 1965년~1968년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또한 케네디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공공 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 지출 증가 정책을 추진했다. | |||
케네디의 국내 정책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시민권이었다. 그는 인종 불평등을 해결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평등을 증진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1963년에 케네디는 포괄적인 민권 입법을 촉구하는 전국적인 텔레비전 연설을 했으며, 그의 재선 직후 통과된 [[1965년 연방 민권법 (비바 케네디)|1965년 연방 민권법]]의 기초가 되었다. 케네디는 또한 연방군을 배치하여 [[미시시피 대학교 (비바 케네디)|미시시피 대학교]]에서 인종 차별 철폐를 시행하고, [[마틴 루터 킹 (비바 케네디)|마틴 루터 킹]]의 워싱턴 행진을 정부 차원에서 지지했다. 1963년 12월 31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민권 운동에 대한 불법적인 개입, 도감청, 성추행 혐의 등으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비바 케네디)|존 에드거 후버]]를 직위에서 파면하고 구속시켰다. [[조지 월리스 (비바 케네디)|조지 월리스]] 등 많은 민주당과 공화당 내 극우 인사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후버 국장의 직위 파면 직후 케네디 대통령의 지지율은 70%까지 상승했다. | |||
의료 개혁에서, 케네디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국가 건강 보험 시스템을 수립하고자 조력했다. 그는 모든 미국인이 적정 가격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메디케어로 알려진 노인을 위한 의료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법안을 제안했다. 몇가지 노력은 보수 단체와 미국 의학 협회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이른바 케네디케어로 알려진 보편적 건강 보험법을 1964년 5월 통과시켰고 높은 지지를 얻었다. 교육 역시 의료 개혁과 마찬가지로 케네디 행정부 1기의 초점 영역이었다. 그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고 교육 기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필요성을 강조했다. 1961년에 존 F. 케네디는 교육과 직장에서의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지위에 관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설립했다. | |||
케네디는 [[우주 경쟁 (비바 케네디)|우주 경쟁]]에 있어서, 기술 혁신의 중요성과 국가 안보 및 경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했다. 그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설정하면서 우주 프로그램의 개발을 우선시했다. 이러한 약속은 NASA에 대한 자금 지원 증가와 [[아폴로 계획 (비바 케네디)|아폴로 계획]]의 궁극적인 성공으로 이어졌다. 우주 프로그램에 대한 케네디의 지원은 과학 지식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기술적 우월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 |||
이러한 핵심 영역 외에도 케네디의 국내 정책에는 빈곤 퇴치 및 사회 복지 프로그램 확대를 위한 구상안이 포함되었다. 그는 최저 임금 인상을 제안하고 일자리 창출과 교육을 통해 빈곤을 완화하는 정책을 옹호했다. 케네디는 또한 1961년에 해외 자원 봉사를 통해 국제 협력과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인 평화 봉사단을 창설했다. | |||
==== 외교 ==== | ==== 외교 ==== | ||
=== 대통령 2기 === | === 대통령 2기 === | ||
2023년 6월 24일 (토) 20:04 판
| Viva Kenne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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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mmunist 1972, 2023 |
미합중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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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F. 케네디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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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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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17년 5월 29일 | ||||||||||||||||||||
|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라인 빌즈 가 83 | |||||||||||||||||||||
| 사망 | 1999년 7월 16일 (향년 82세) | ||||||||||||||||||||
| 미국 뉴욕 주 뉴욕시 맨해튼 | |||||||||||||||||||||
| 재임기간 | 제35대 대통령 | ||||||||||||||||||||
| 1961년 1월 20일 ~ 1969년 1월 20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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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 We all breathe the same air. 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 And we are all mortal." "우리들(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연계고리는 이 작은 행성의 주민이며, 모두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모두 자손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며,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1963년 아메리칸 대학 연설 中[6] |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JFK라는 약칭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본격적인 TV 이미지 정치의 개막을 알린 대통령이자, 정식 선거로는 미국 최연소 대통령[7], 최초의 가톨릭 신자인 미국 대통령이자, 최초의 20세기 출생 대통령이다. 1961년 1월 20일부터 1969년 1월 20일까지 재임했다. 그의 동생인 테드 케네디와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도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조지 맥거번 등과 함께 민주당을 대표하는 대통령이자 미국 진보층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대통령이다.[8] 제3차 세계 대전이 될 수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잘 해결했으며, 아폴로 계획을 출범시켜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절대우위를 갖게 했다. "국가가 당신에게 뭘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물으라."는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을 주장한 것으로 미국인의 기억에 남아있다. 오늘날에는 제럴드 포드와 함께 진영을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대통령이다.
약력
- 1947. 제80대 하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1구)
- 1949. 제81대 하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1구)
- 1951. 제82대 하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제11구)
- 1953. 제83대 상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클래스 1)
- 1959. 제86대 상원의원 (민주당 / 매사추세츠 클래스 1)
- 1961. 1. 제35대 미국 대통령 (임기 1기, 초선)
- 1965. 1. 제35대 미국 대통령 (임기 2기, 재선)
- 1999.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서훈
생애
존 F. 케네디는 1918년 주영 미국 대사인 조지프 P. 케네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존 F. 케네디는 어릴 때 공부를 못해서 아버지의 속을 많이 썩혔지만, 아버지의 기부 입학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본래 조지프 케네디는 "케네디 가에서 대통령이 한명 이상 나와야한다"라는 생각 하에 장남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는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차남 존 F. 케네디가 케네디가문을 이끄는 신예로 떠올랐다. 존 F. 케네디 역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본래 나쁜 건강으로 참전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빽을 이용해 나중에 정치에 입문할 때 불리한 점이 되지 않도록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그는 항해병과 대위 계급으로 전역했고, 자신이 이끄는 전함이 일본군에 의해 격침되자 손수 나서 부하들을 구출한 사건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전후 존 F. 케네디는 케네디 가문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매사추세츠주의 제11번 하원 의원 선거구에 출마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후 1948년, 1950년 선거에서도 재선했는데, 그의 참전 용사 경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던 1952년, 그는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하는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매사추세츠주의 연방 상원의원은 공화당 소속의 헨리 케벗 로지였는데, 그는 공화당 내에서 대표적인 외교 전문가로 불리는 중진 의원이었다. 당연히 케네디가 낙선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케네디는 근소한 표차로 캐벗 로지를 꺾고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0년대 내내, 존 F. 케네디는 자유무역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민주당 내의 소장파였다. 1956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로 입후보 하려 하였으나, 경선에서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에 밀렸고, 유력한 부통령 후보자로도 꼽혔지만 결국 배제되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대통령 후보감으로 꼽힌 케네디의 입지는 당 내에서 커져만 갔고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자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린든 B. 존슨 상원 원내대표를 꺾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지지율은 60%를 상회했다. 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은 인기 최고조의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었고 그 누구도 닉슨의 낙선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자신의 잘생긴 이미지와 언변을 무기로 닉슨을 추격했고, TV 토론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잡으며 닉슨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불과 0.1%p차로 케네디는 닉슨을 꺾고 1960년 대선에서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키며 42세의 나이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 당선인의 기록을 깬다.
대통령 1기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1기 임기는 1961년 1월 20일 정오에 시작되어 1965년 1월 20일 정오에 종료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쿠바 미사일 위기, 피그스만 침공 사태, 마틴 루서 킹의 흑인 민권 운동, 우주 경쟁 등이 있었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는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 방문 도중 리 하비 오스왈드에 의해 암살 미수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의 임기 도중 평균 지지율은 60%대 초반으로 매우 높게 유지되었다.
내정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존 F. 케네디의 국내 정책은 경제 성장, 민권, 의료 개혁, 교육 및 기술 혁신 촉진에 중점을 두었다.
케네디의 경제 정책은 재정 및 통화 조치의 조합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실업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소비자 지출과 기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전면적인 감세를 제안했으며, 이는 케네디-존슨 감세로 명명되었다. 세금 감면법은 1964년 케네디의 재선 직전 제정되었으며 1965년~1968년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또한 케네디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공공 사업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 지출 증가 정책을 추진했다.
케네디의 국내 정책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시민권이었다. 그는 인종 불평등을 해결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평등을 증진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1963년에 케네디는 포괄적인 민권 입법을 촉구하는 전국적인 텔레비전 연설을 했으며, 그의 재선 직후 통과된 1965년 연방 민권법의 기초가 되었다. 케네디는 또한 연방군을 배치하여 미시시피 대학교에서 인종 차별 철폐를 시행하고, 마틴 루터 킹의 워싱턴 행진을 정부 차원에서 지지했다. 1963년 12월 31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민권 운동에 대한 불법적인 개입, 도감청, 성추행 혐의 등으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를 직위에서 파면하고 구속시켰다. 조지 월리스 등 많은 민주당과 공화당 내 극우 인사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후버 국장의 직위 파면 직후 케네디 대통령의 지지율은 70%까지 상승했다.
의료 개혁에서, 케네디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국가 건강 보험 시스템을 수립하고자 조력했다. 그는 모든 미국인이 적정 가격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메디케어로 알려진 노인을 위한 의료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법안을 제안했다. 몇가지 노력은 보수 단체와 미국 의학 협회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이른바 케네디케어로 알려진 보편적 건강 보험법을 1964년 5월 통과시켰고 높은 지지를 얻었다. 교육 역시 의료 개혁과 마찬가지로 케네디 행정부 1기의 초점 영역이었다. 그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고 교육 기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필요성을 강조했다. 1961년에 존 F. 케네디는 교육과 직장에서의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 지위에 관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설립했다.
케네디는 우주 경쟁에 있어서, 기술 혁신의 중요성과 국가 안보 및 경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했다. 그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설정하면서 우주 프로그램의 개발을 우선시했다. 이러한 약속은 NASA에 대한 자금 지원 증가와 아폴로 계획의 궁극적인 성공으로 이어졌다. 우주 프로그램에 대한 케네디의 지원은 과학 지식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기술적 우월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러한 핵심 영역 외에도 케네디의 국내 정책에는 빈곤 퇴치 및 사회 복지 프로그램 확대를 위한 구상안이 포함되었다. 그는 최저 임금 인상을 제안하고 일자리 창출과 교육을 통해 빈곤을 완화하는 정책을 옹호했다. 케네디는 또한 1961년에 해외 자원 봉사를 통해 국제 협력과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인 평화 봉사단을 창설했다.
외교
대통령 2기
1964년 11월 3일 치러진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는 압도적 지지를 받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재도전했다. 부통령 후보는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으로 교체되었는데, 빌리 솔 에스테스(Billy sol estes), 바비 베이커(Bobby Baker) 비리 논란에 휘말린 린든 B. 존슨이 스스로 부통령 후보 재도전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의 후보 배리 골드워터는 베트남 핵폭격 발언으로 심각하게 낮은 지지율로 선거 운동을 시작해야했다. 비록 TV 토론에서 골드워터가 선전하고 남부 민주당원들이 케네디의 민권법 제정 공약에 반발해 골드워터를 지지하며 선거날 골드워터의 지지율이 상승했지만, 결과적으로 케네디는 57% 대 41%로 골드워터를 압살하고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2기 임기는 1965년 1월 20일 정오에 시작되어 1969년 1월 20일 정오에 종료되었으며, 후임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었다. 이 시기의 주요 사건으로는 1965년 연방 민권법 제정, 아폴로 계획, 빈곤과의 전쟁, 6일 전쟁 등이 있었다. 존 F. 케네디는 63.0%에 달하는 지지율로 퇴임하여, 역사상 가장 높은 퇴임 지지율 기록을 세웠다.[9]
내정
외교
존 F. 케네디 행정부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 후보가 승리하여 성립된 행정부로, 1961년 1월 20일부터 1969년 1월 20일까지 존속했다. 부통령은 린든 B. 존슨(1961.01.20 ~ 1965.01.20), 휴버트 험프리(1965.01.20 ~ 1969.01.20)이었다.
퇴임 후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소속 정당
선거 이력
|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 194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매사추세츠 11구 | 민주당 | 69,093 (71.87%) | 당선 (1위) | 초선 |
| 194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06,366 (100.00%) | 재선 | |||
| 1950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87,699 (82.28%) | 3선 | |||
| 1952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매사추세츠 | 1,211,984 (51.35%) | 초선 | ||
| 195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1,362,926 (73.20%) | 재선 | |||
| 1960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국 | 34,220,984 (49.72%, 303명) | 초선 | ||
| 1964 | 미국 대통령 선거 | 40,773,510 (57.35%, 350명) | 재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