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솔피/4: 두 판 사이의 차이

솔피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솔피 (토론 | 기여)
92번째 줄: 92번째 줄:


== 개요 ==
== 개요 ==
{{인용문1|"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노니, 그대 신민들은 짐의 뜻을 따르도록 하라.
근래 수십 년 동안에 우리나라에는 난관이 많아서 비록 태황제(太皇帝)와 같은 훌륭한 덕과 지극한 인자함으로 밤낮 근심걱정 했어도 오히려 장차 그렇게 되는 때를 돌이켜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변변치 못한 나로서 어떻게 이미 그렇게 된 뒤에 와서 수습할 수 있겠는가?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신하가 바르면 그 임금도 바르게 되고 신하가 아첨하면 그 임금은 스스로 성군인 줄 아니, 임금이 덕 있는 것도 신하에게 달렸고 덕이 없는 것도 신하에게 달렸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각의정대신 장택상(李完用)은 총리(總理)이니, 너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경계하여 그대의 임금을 인도하되,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게 인도하지 말라. 오늘이 어떤 날이며 이때가 어느 때인가? 신민들의 마음을 통제하여 신민이 각자의 직무에 힘쓰도록 하라. 억조창생의 마음이란 무슨 마음인가? 그것은 일개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세상의 무슨 일이든 공정한 데에서 이루어지고 사사로운 데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나라만 생각하고 가정을 잊으며 공정한 것만 알고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린다면, 무슨 일인들 되지 않으며 무슨 성과인들 나타나지 않겠는가?
아! 짐은 다른 생각이 없으니, 오직 옳은 길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힘쓰겠다. 그대들에게 좋은 계책과 방법이 있으면 짐에게 들어와서 말하라. 그대들의 말만 따르겠다. 그대들은 나 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지나간 시대보다도 더 많은 성과를 거두도록 하라.|국체의 호지를 위한 조서(國體의 護持를 위한 詔書)}}
[[대한제국 (산성)|대한제국]]의 제2대 [[대한제국 대황제 (산성)|대황제]].
[[대한제국 (산성)|대한제국]]의 제2대 [[대한제국 대황제 (산성)|대황제]].



2023년 8월 25일 (금) 12:10 판

틀:역대 대한제국 대황제

대한제국 제2대 대황제
순종 융희태황제 | 純宗 隆熙孝皇帝
출생 1888년 7월 2일
한양부 창덕궁 집복헌
즉위 1924년 2월 20일
한양부 경복궁 근정전
붕어 1946년 1월 9일 (향년 57세)
한성부 경복궁 태극전
능묘 유릉(洪陵)
재위기간 대한제국 제2대 대황제
1924년 2월 16일 ~ 1946년 1월 9일
[ 펼치기 · 접기 ]
본관 전주 이씨
척(坧)
부모 부황 성조 태황제, 모친 덕인태황후
형제자매 장친왕
황후 순명효황후
자녀 장남 문조 혜황제
장녀 충혜공주
차녀 충인공주
학력 수학원 초등과 (졸업)
동궁시강어문소(東宮侍講御問所) (수료)
병역 대한제국군 대원수
종교 유교 (성리학)
신징 175cm
군방(君邦)
정헌(正軒)
전호 효덕전(孝德殿)
묘호 순종(純宗)
시호 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연호 융희(隆熙, 1925 ~ 1946)

개요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노니, 그대 신민들은 짐의 뜻을 따르도록 하라.

근래 수십 년 동안에 우리나라에는 난관이 많아서 비록 태황제(太皇帝)와 같은 훌륭한 덕과 지극한 인자함으로 밤낮 근심걱정 했어도 오히려 장차 그렇게 되는 때를 돌이켜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변변치 못한 나로서 어떻게 이미 그렇게 된 뒤에 와서 수습할 수 있겠는가?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신하가 바르면 그 임금도 바르게 되고 신하가 아첨하면 그 임금은 스스로 성군인 줄 아니, 임금이 덕 있는 것도 신하에게 달렸고 덕이 없는 것도 신하에게 달렸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각의정대신 장택상(李完用)은 총리(總理)이니, 너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경계하여 그대의 임금을 인도하되,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게 인도하지 말라. 오늘이 어떤 날이며 이때가 어느 때인가? 신민들의 마음을 통제하여 신민이 각자의 직무에 힘쓰도록 하라. 억조창생의 마음이란 무슨 마음인가? 그것은 일개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세상의 무슨 일이든 공정한 데에서 이루어지고 사사로운 데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나라만 생각하고 가정을 잊으며 공정한 것만 알고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린다면, 무슨 일인들 되지 않으며 무슨 성과인들 나타나지 않겠는가?

아! 짐은 다른 생각이 없으니, 오직 옳은 길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힘쓰겠다. 그대들에게 좋은 계책과 방법이 있으면 짐에게 들어와서 말하라. 그대들의 말만 따르겠다. 그대들은 나 한 사람을 도움으로써 지나간 시대보다도 더 많은 성과를 거두도록 하라.
국체의 호지를 위한 조서(國體의 護持를 위한 詔書)

대한제국의 제2대 대황제.

3세(만 2세)에 보위에 올라 60세(만 38세)의 나이에 붕어하기까지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며 특히 전쟁에 대해서는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여 대한의 강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성조가 즉위할 당시 동아의 변방에 불과했던 대한제국은 성조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동아를 대표하는 열강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휘는 이희(李熙)였다. '연수'(然淑)라는 연호는 성조가 대황제로 재위했을 때 사용한 연호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명군(聖君)으로 꼽힌다. 한국사에서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복자이자,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대제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는 군주이며, 아예 성조대제(大帝), 연수대제, 연수성제(聖帝)라고도 부른다.

생애

유년기

성조는 조선의 25대 국왕인 중조와 충헌왕후의 아들로 1860년에 태어났다. 성조가 3살 때에 부황인 중조가 승하하자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성조의 나이가 너무 어려 흥선군 이하응이 섭정을 맡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재위 기간

성조는 12년간의 섭정기간 동안 부황인 중조가 궐내에서 즉각적으로 서양식 교육을 장려하며 설립한 수학원에서 유럽 선교사들의 교육을 받았다. 수학원 시기 성조는 특히 서구식 군대 전술, 제왕학 등에 관심을 가졌고, 전반적인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또래의 사대부 자제들을 모아 병정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최신 군사기술을 습득해나갔다.

병약한 황제

융희 민주주의

섭정이 끝난 15세부터 성조는 정치, 경제, 사회 개혁에 주력하였다. 중조흥선군의 섭정 시기에 쌓아올린 역량을 통해 세도정치 시기 문란해진 중앙집권체제를 복원하고 내각관제 도입, 행정조직 개편, 서구식 생활양식 도입, 단발령, 군사개혁, 원화 발행, 토지개혁 실시, 조세 개혁 등의 근대화에 매진했으며 국민교육 체계를 확립하고 병원과 의료,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대공황과 민주주의의 위기

특히 1889년에는 동아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손꼽히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를 도입하였고, 이는 추후 아들인 순종대에 활발하게 진행된 융희 민주주의 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혁신 내각의 수립

즉위 이후 봉건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청나라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성조는 조선이 유구와 맺은 책봉관계를 빌미로 내정간섭을 시도하는 청을 선제적으로 타격하는 한청전쟁을 치루어 광대한 요동 남부 지역과 대만섬을 차지했으며, 이후 요동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던 노서아와 한노전쟁을 벌여 요동과 화태도, 북해도를 포함한 넓은 땅을 병합하는등 영토를 크게 넓힘으로써 대한의 국력을 크게 키웠다.

붕어

평가

가족관계 및 후사

어록

대중 매체에서

기타

상훈(賞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