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사드 톱타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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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중부의 [[티라나]]에서 무슬림 지주 가문인 [[톱타니가]]의 알리 톱타니와 바스피예 알리조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아직까지 논란으로 오랫동안 [[1863년]]으로 예상했다. 10년간 알바니아 수상의 생애를 연구한 롤랜드 카포쿠는 [[1863년]] [[6월 13일]]로, 일리르 이코노미는 그보다 1년 후인 [[1864년]]이라 주장했다. 에사드는 알리 톱타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가니 톱타니는 후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경호원으로 근무했다. 가니 톱타니는 [[1898년]] [[12월 21일]],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하피즈 파샤란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사드의 다른 형제인 베히드 톱타니는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었다. [[1913년]], 에사드가 [[몬테네그로]]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무렵, 그는 [[이오아니나]]에서 그리스군과 맞섰다.
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중부의 [[티라나]]에서 무슬림 지주 가문인 [[톱타니가]]의 알리 톱타니와 바스피예 알리조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아직까지 논란으로 오랫동안 [[1863년]]으로 예상했다. 10년간 알바니아 수상의 생애를 연구한 롤랜드 카포쿠는 [[1863년]] [[6월 13일]]로, 일리르 이코노미는 그보다 1년 후인 [[1864년]]이라 주장했다. 에사드는 알리 톱타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가니 톱타니는 후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경호원으로 근무했다. 가니 톱타니는 [[1898년]] [[12월 21일]],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하피즈 파샤란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사드의 다른 형제인 베히드 톱타니는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었다. [[1913년]], 에사드가 [[몬테네그로]]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무렵, 그는 [[이오아니나]]에서 그리스군과 맞섰다.


=== 헌병 장교 ===
에사드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1890년 대, 그의 부모님은 사망하였고, 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10,000ha의 가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연간 약 20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유한 지주 가문의 가장을 고위 공직이나 장교로 임명했기에 [[1893년]], 에사드는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헌병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 경력이 없었으나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 (1897년)|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9년]] 새로이 임명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발리]]는 에사드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902년]] 9월, [[발리]]가 그의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체포하고 이슬람 도덕에 위배된다며 문책했다. 사건 이후 에사드는 재판을 받지 않고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로 발령되었다. [[1902년]] [[9월 15일]], 그는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이 된 에사드는 그곳의 헌병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을 썼다. 취임한 지 얼마 후인 [[1903년]] 2월 무렵,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미르디타]] 지역의 가톨릭 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력과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200여 명의 반군을 체포했다.
에사드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1890년 대, 그의 부모님은 사망하였고, 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10,000ha의 가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연간 약 20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유한 지주 가문의 가장을 고위 공직이나 장교로 임명했기에 [[1893년]], 에사드는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헌병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 경력이 없었으나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 (1897년)|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9년]] 새로이 임명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발리]]는 에사드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902년]] 9월, [[발리]]가 그의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체포하고 이슬람 도덕에 위배된다며 문책했다. 사건 이후 에사드는 재판을 받지 않고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로 발령되었다. [[1902년]] [[9월 15일]], 그는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이 된 에사드는 그곳의 헌병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을 썼다. 취임한 지 얼마 후인 [[1903년]] 2월 무렵,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미르디타]] 지역의 가톨릭 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력과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200여 명의 반군을 체포했다.


에사드의 근무지는 [[슈코더르]]였지만 그는 주로 그의 고향인 [[티라나]]에 거주했다. 그는 이전에 살던 집을 철거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코낙]]을 지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티라나]]를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판자집을 헐어 새 집을 짓고, 거리를 확장하고 포장하며,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두러스]]와의 도로를 현대화했다. 기존의 봉건적인 귀족들의 분노를 샀으나 영지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소규모의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에사드의 근무지는 [[슈코더르]]였지만 그는 주로 그의 고향인 [[티라나]]에 거주했다. 그는 이전에 살던 집을 철거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코낙]]을 지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티라나]]를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판자집을 헐어 새 집을 짓고, 거리를 확장하고 포장하며,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두러스]]와의 도로를 현대화했다. 기존의 봉건적인 귀족들의 분노를 샀으나 영지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소규모의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 오스만 정계 입문 ===
[[1908년]] 여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의 승리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들을 지지한 대가로 자유를 얻어 [[콘스탄티니예]]로 건너가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했다. [[1908년]] [[12월 17일]]부터 [[오스만 제국]]의 하원에서 [[두러스]]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4월 12일에서 13일 새벽, [[콘스탄티니예]]에서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전제정치를 복원하길 원하는 무장 반혁명이 일어났다. [[청년 튀르크당]]은 2주 만에 반혁명을 격퇴했고, [[4월 27일]], [[압뒬하미트 2세]]는 폐위되었다. 이때 에사드는 [[압뒬하미트 2세]]에게 직접 폐위 사실을 전하는 4명의 대표단 중 한 명을 맡았다. 이전까지 하원에서의 에사드의 발언을 본다면 그는 오스만주의로부터 결별하며 [[알바니아인]]의 민족 자결권을 지지했다. [[1910년]]에는 [[라틴 문자]]의 도입과 이를 비준한 [[마나스티리트 회의|제2차 마나스티리트 회의]]를 지지했으며, 동년 12월에는 무력으로 [[알바니아인]]의 독립을 억압하던 [[콘스탄티니예]]의 정부를 공격했다. 그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에서 탈당했으며, [[1911년]]부터는 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1912년]] [[1월 12일]], [[알바니아인]] 하원의원 [[이스마엘 체말리]]와 [[하산 프리슈티나]]가 [[알바니아]] 무장 혁명을 위해 [[콘스탄티니예]]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에사드 또한 그의 동포와 함께 이 비밀결사에 참가했으며,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 주민을 무장시켜 투쟁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후 [[알바니아]]로 귀국한 에사드는 [[1912년]] 4월, [[알바니아 봉기 (1912년)|알바니아 봉기]]에 휘말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내무부장관인 [[하즈 아딜 아르다]]의 대표단이 [[티라나]]에 방문하여 에사드와 협상하였다. 그들은 에사드가 봉기에서 손을 떼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온다면 전쟁부에 등용하겠다고 회유했고, 에사드는 봉기 참여를 번복하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1912년]] 8월, 육군사령부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것과 예비 부대를 조직할 것을 명받은 에사드는 [[알바니아]]로 돌아간다.
=== 슈코더르 공방전 ===


[[분류:알바니아]] [[분류:알바니아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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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일 (월) 18:44 판

 
에사드 톱타니
Esad Toptani
출생일 불명
출생지 오스만 제국 티라나
사망일 1914년 5월 18일
사망지 알바니아 공국 두러스
가문 톱타니가
부친 알리 톱타니
모친 바스피예 알리조티
종교 이슬람교

에사드 톱타니(알바니아어: Esad Toptani, 1863년 4월 혹은 1875년 ~ 1914년 5월 18일)는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자 알바니아 공국의 정치인이었다. 발칸 전쟁 이후 중부 알바니아두러스를 중심으로 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알바니아 공국에 등용되어 쿠데타를 조직하다 실패하고 국제 헌병대가 발포한 포탄에 의해 사망하였다.

알바니아 중부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에사드는 이후 1893년, 오스만 제국의 헌병 장교로 경력을 쌓았으며, 1908년에는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하여 콘스탄티니예에서 하원 의원을 지녔다. 1912년 10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의해 포위된 슈코더르를 방어하다가 1913년 1월,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하산 르자를 살해하고 퇴각 시 부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과 후일 중부 알바니아의 야망을 지원하는 대가로 비밀 협상을 통해 4월에 도시를 몬테네그로에 양도한다. 이후 자신을 알바니아의 왕으로 선포했지만 1913년 7월, 이스마엘 체말리알바니아 임시 정부에 합류한다. 한 달 후, 알바니아 임시 정부에서 사임하여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갈등은 무력충돌로 발전하였고, 국제 통제 위원회가 중제하며 갈등은 종식된다.

알바니아 공국퍼르메티 정부에서 전쟁부장관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알바니아의 군주가 되고자 보스니아인 난민과 자신의 영지민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국제 헌병대스칸데르베우 2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국제 헌병대두러스에 있는 그의 집을 포위하였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국제 헌병대의 포탄에 맞아 사망한다.

생애

탄생

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중부의 티라나에서 무슬림 지주 가문인 톱타니가의 알리 톱타니와 바스피예 알리조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아직까지 논란으로 오랫동안 1863년으로 예상했다. 10년간 알바니아 수상의 생애를 연구한 롤랜드 카포쿠는 1863년 6월 13일로, 일리르 이코노미는 그보다 1년 후인 1864년이라 주장했다. 에사드는 알리 톱타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가니 톱타니는 후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경호원으로 근무했다. 가니 톱타니는 1898년 12월 21일,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하피즈 파샤란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사드의 다른 형제인 베히드 톱타니는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었다. 1913년, 에사드가 몬테네그로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무렵, 그는 이오아니나에서 그리스군과 맞섰다.

헌병 장교

에사드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1890년 대, 그의 부모님은 사망하였고, 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10,000ha의 가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연간 약 20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유한 지주 가문의 가장을 고위 공직이나 장교로 임명했기에 1893년, 에사드는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헌병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 경력이 없었으나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9년 새로이 임명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발리는 에사드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902년 9월, 발리가 그의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체포하고 이슬람 도덕에 위배된다며 문책했다. 사건 이후 에사드는 재판을 받지 않고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로 발령되었다. 1902년 9월 15일, 그는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이 된 에사드는 그곳의 헌병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을 썼다. 취임한 지 얼마 후인 1903년 2월 무렵,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미르디타 지역의 가톨릭 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력과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200여 명의 반군을 체포했다.

에사드의 근무지는 슈코더르였지만 그는 주로 그의 고향인 티라나에 거주했다. 그는 이전에 살던 집을 철거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코낙을 지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티라나를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판자집을 헐어 새 집을 짓고, 거리를 확장하고 포장하며,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두러스와의 도로를 현대화했다. 기존의 봉건적인 귀족들의 분노를 샀으나 영지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소규모의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오스만 정계 입문

1908년 여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의 승리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들을 지지한 대가로 자유를 얻어 콘스탄티니예로 건너가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했다. 1908년 12월 17일부터 오스만 제국의 하원에서 두러스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4월 12일에서 13일 새벽, 콘스탄티니예에서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전제정치를 복원하길 원하는 무장 반혁명이 일어났다. 청년 튀르크당은 2주 만에 반혁명을 격퇴했고, 4월 27일, 압뒬하미트 2세는 폐위되었다. 이때 에사드는 압뒬하미트 2세에게 직접 폐위 사실을 전하는 4명의 대표단 중 한 명을 맡았다. 이전까지 하원에서의 에사드의 발언을 본다면 그는 오스만주의로부터 결별하며 알바니아인의 민족 자결권을 지지했다. 1910년에는 라틴 문자의 도입과 이를 비준한 제2차 마나스티리트 회의를 지지했으며, 동년 12월에는 무력으로 알바니아인의 독립을 억압하던 콘스탄티니예의 정부를 공격했다. 그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에서 탈당했으며, 1911년부터는 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1912년 1월 12일, 알바니아인 하원의원 이스마엘 체말리하산 프리슈티나알바니아 무장 혁명을 위해 콘스탄티니예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에사드 또한 그의 동포와 함께 이 비밀결사에 참가했으며,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 주민을 무장시켜 투쟁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후 알바니아로 귀국한 에사드는 1912년 4월, 알바니아 봉기에 휘말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내무부장관인 하즈 아딜 아르다의 대표단이 티라나에 방문하여 에사드와 협상하였다. 그들은 에사드가 봉기에서 손을 떼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온다면 전쟁부에 등용하겠다고 회유했고, 에사드는 봉기 참여를 번복하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1912년 8월, 육군사령부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것과 예비 부대를 조직할 것을 명받은 에사드는 알바니아로 돌아간다.

슈코더르 공방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