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사드 톱타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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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공국]]의 [[퍼르메티 정부]]에서 [[알바니아 전쟁부장관|전쟁부장관]]과 [[알바니아 내무부장관|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알바니아의 군주가 되고자 [[보스니아인]] 난민과 자신의 영지민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국제 헌병대]]와 [[스컨데르베우 2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국제 헌병대]]가 [[두러스]]에 있는 그의 집을 포위하였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국제 헌병대]]의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다.
[[알바니아 공국]]의 [[퍼르메티 정부]]에서 [[알바니아 전쟁부장관|전쟁부장관]]과 [[알바니아 내무부장관|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알바니아의 군주가 되고자 [[보스니아인]] 난민과 자신의 영지민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국제 헌병대]]와 [[스컨데르베우 2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국제 헌병대]]가 [[두러스]]에 있는 그의 집을 포위하였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국제 헌병대]]의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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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생 ==
== 탄생 ==
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중부의 [[티라나]]에서 무슬림 지주 가문인 [[톱타니가]]의 알리 톱타니와 바스피예 알리조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아직까지 논란으로 오랫동안 [[1863년]]으로 예상했다. 10년간 알바니아 수상의 생애를 연구한 롤랜드 카포쿠는 [[1863년]] [[6월 13일]]로, 일리르 이코노미는 그보다 1년 후인 [[1864년]]이라 주장했다. 에사드는 알리 톱타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가니 톱타니는 후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경호원으로 근무했다. 가니 톱타니는 [[1898년]] [[12월 21일]],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하피즈 파샤란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사드의 다른 형제인 베히드 톱타니는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었다. [[1913년]], 에사드가 [[몬테네그로]]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무렵, 그는 [[이오아니나]]에서 그리스군과 맞섰다.
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중부의 [[티라나]]에서 무슬림 지주 가문인 [[톱타니가]]의 알리 톱타니와 바스피예 알리조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아직까지 논란으로 오랫동안 [[1863년]]으로 예상했다. 10년간 알바니아 수상의 생애를 연구한 롤랜드 카포쿠는 [[1863년]] [[6월 13일]]로, 일리르 이코노미는 그보다 1년 후인 [[1864년]]이라 주장했다. 에사드는 알리 톱타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가니 톱타니는 후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경호원으로 근무했다. 가니 톱타니는 [[1898년]] [[12월 21일]],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하피즈 파샤란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사드의 다른 형제인 베히드 톱타니는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었다. [[1913년]], 에사드가 [[몬테네그로]]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무렵, 그는 [[이오아니나]]에서 그리스군과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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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병 장교 ==
== 헌병 장교 ==
에사드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1890년 대, 그의 부모님은 사망하였고, 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10,000ha의 가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연간 약 20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유한 지주 가문의 가장을 고위 공직이나 장교로 임명했기에 [[1893년]], 에사드는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헌병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 경력이 없었으나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 (1897년)|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9년]] 새로이 임명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발리]]는 에사드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902년]] 9월, [[발리]]가 그의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체포하고 이슬람 도덕에 위배된다며 문책했다. 사건 이후 에사드는 재판을 받지 않고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로 발령되었다. [[1902년]] [[9월 15일]], 그는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이 된 에사드는 그곳의 헌병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을 썼다. 취임한 지 얼마 후인 [[1903년]] 2월 무렵,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미르디타]] 지역의 가톨릭 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력과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200여 명의 반군을 체포했다.
에사드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1890년 대, 그의 부모님은 사망하였고, 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10,000ha의 가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연간 약 20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유한 지주 가문의 가장을 고위 공직이나 장교로 임명했기에 [[1893년]], 에사드는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헌병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 경력이 없었으나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 (1897년)|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9년]] 새로이 임명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발리]]는 에사드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902년]] 9월, [[발리]]가 그의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체포하고 이슬람 도덕에 위배된다며 문책했다. 사건 이후 에사드는 재판을 받지 않고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로 발령되었다. [[1902년]] [[9월 15일]], 그는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이 된 에사드는 그곳의 헌병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을 썼다. 취임한 지 얼마 후인 [[1903년]] 2월 무렵,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미르디타]] 지역의 가톨릭 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력과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200여 명의 반군을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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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드의 근무지는 [[슈코더르]]였지만 그는 주로 그의 고향인 [[티라나]]에 거주했다. 그는 이전에 살던 집을 철거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코낙]]을 지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티라나]]를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판자집을 헐어 새 집을 짓고, 거리를 확장하고 포장하며,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두러스]]와의 도로를 현대화했다. 기존의 봉건적인 귀족들의 분노를 샀으나 영지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소규모의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에사드의 근무지는 [[슈코더르]]였지만 그는 주로 그의 고향인 [[티라나]]에 거주했다. 그는 이전에 살던 집을 철거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코낙]]을 지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티라나]]를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판자집을 헐어 새 집을 짓고, 거리를 확장하고 포장하며,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두러스]]와의 도로를 현대화했다. 기존의 봉건적인 귀족들의 분노를 샀으나 영지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소규모의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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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 정계 입문 ==
== 오스만 정계 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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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월 12일]], [[알바니아인]] 하원의원 [[이스마엘 체말리]]와 [[하산 프리슈티나]]가 [[알바니아]] 무장 혁명을 위해 [[콘스탄티니예]]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에사드 또한 그의 동포와 함께 이 비밀결사에 참가했으며,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 주민을 무장시켜 투쟁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후 [[알바니아]]로 귀국한 에사드는 [[1912년]] 4월, [[알바니아 봉기 (1912년)|알바니아 봉기]]에 휘말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내무부장관인 [[하즈 아딜 아르다]]의 대표단이 [[티라나]]에 방문하여 에사드와 협상하였다. 그들은 에사드가 봉기에서 손을 떼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온다면 전쟁부에 등용하겠다고 회유했고, 에사드는 봉기 참여를 번복하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1912년]] 8월, 육군사령부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것과 예비 부대를 조직할 것을 명받은 에사드는 [[알바니아]]로 돌아간다.  
[[1912년]] [[1월 12일]], [[알바니아인]] 하원의원 [[이스마엘 체말리]]와 [[하산 프리슈티나]]가 [[알바니아]] 무장 혁명을 위해 [[콘스탄티니예]]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에사드 또한 그의 동포와 함께 이 비밀결사에 참가했으며,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 주민을 무장시켜 투쟁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후 [[알바니아]]로 귀국한 에사드는 [[1912년]] 4월, [[알바니아 봉기 (1912년)|알바니아 봉기]]에 휘말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내무부장관인 [[하즈 아딜 아르다]]의 대표단이 [[티라나]]에 방문하여 에사드와 협상하였다. 그들은 에사드가 봉기에서 손을 떼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온다면 전쟁부에 등용하겠다고 회유했고, 에사드는 봉기 참여를 번복하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1912년]] 8월, 육군사령부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것과 예비 부대를 조직할 것을 명받은 에사드는 [[알바니아]]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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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코더르 공방전 ==
== 슈코더르 공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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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드는 압도적인 열세와 식량 문제에 직면했기에 싸우는 대신 다른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빠르면 2월 말부터 [[슈코더르]]의 [[이탈리아]] 영사를 통해 [[몬테네그로]]와 비밀 협상을 진행한다. [[4월 8일]], [[몬테네그로 왕국]]은 그에게 응답했고, [[4월 21일]], 에사드는 몬테네그로군 사령관인 [[얀코 부코티지]]로부터 24,000여 명의 병력을 자유롭게 철수하는 대가로 [[슈코더르]]와 [[드런강]] 계곡까지의 영토를 [[몬테네그로]]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 에사드는 이에 동의했고, [[얀코 부코티지]]는 그날 오후 3시에 [[슈코더르]]에 입성한다.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몬테네그로군에 포대만 넘겨준 체 [[슈코더르]]에서 철수했다.
에사드는 압도적인 열세와 식량 문제에 직면했기에 싸우는 대신 다른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빠르면 2월 말부터 [[슈코더르]]의 [[이탈리아]] 영사를 통해 [[몬테네그로]]와 비밀 협상을 진행한다. [[4월 8일]], [[몬테네그로 왕국]]은 그에게 응답했고, [[4월 21일]], 에사드는 몬테네그로군 사령관인 [[얀코 부코티지]]로부터 24,000여 명의 병력을 자유롭게 철수하는 대가로 [[슈코더르]]와 [[드런강]] 계곡까지의 영토를 [[몬테네그로]]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 에사드는 이에 동의했고, [[얀코 부코티지]]는 그날 오후 3시에 [[슈코더르]]에 입성한다.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몬테네그로군에 포대만 넘겨준 체 [[슈코더르]]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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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 중앙알바니아 공화국 ==
==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 중앙알바니아 공화국 ==
[[슈코드라 공방전]] 동안 [[알바니아]]에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1912년]] [[11월 28일]], [[블로러 회의]]에서 [[알바니아 독립 선언|알바니아의 독립]]이 선포되었고, [[이스마엘 체말리]]의 지도 아래 [[알바니아 임시 정부|알바이아 최초의 정부]]가 구성되었다. [[런던]]의 회의에서는 [[알바니아]]의 경계가 논의되고 있었다.
[[슈코드라 공방전]] 동안 [[알바니아]]에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1912년]] [[11월 28일]], [[블로러 회의]]에서 [[알바니아 독립 선언|알바니아의 독립]]이 선포되었고, [[이스마엘 체말리]]의 지도 아래 [[알바니아 임시 정부|알바이아 최초의 정부]]가 구성되었다. [[런던]]의 회의에서는 [[알바니아]]의 경계가 논의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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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열강들은 [[스컨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를 [[알바니아의 공작]]으로 옹립했고, 그는 지역 군벌이 자신의 왕위를 인정하고 열강이 그의 결정을 순응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1914년]] [[1월 22일]], [[알바니아 임시 정부]]는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에 권력을 위임하고 해산하였으며, 열강은 에사드 또한 같은 결정을 행할 것을 촉구했다. 에사드는 이 요구를 거절했으나 [[영국]]과 [[독일]]의 대표단은 [[1914년]] [[1월 30일]],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지도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2월 4일]], 에사드는 [[알바니아 공국]]이 [[두러스]]를 수도로 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이 의회를 구성하고, 자신이 직접 [[스컨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에게 왕관을 건낼 것을 대가로 합의하고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해산한다.
한편, 열강들은 [[스컨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를 [[알바니아의 공작]]으로 옹립했고, 그는 지역 군벌이 자신의 왕위를 인정하고 열강이 그의 결정을 순응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1914년]] [[1월 22일]], [[알바니아 임시 정부]]는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에 권력을 위임하고 해산하였으며, 열강은 에사드 또한 같은 결정을 행할 것을 촉구했다. 에사드는 이 요구를 거절했으나 [[영국]]과 [[독일]]의 대표단은 [[1914년]] [[1월 30일]],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지도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2월 4일]], 에사드는 [[알바니아 공국]]이 [[두러스]]를 수도로 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이 의회를 구성하고, 자신이 직접 [[스컨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에게 왕관을 건낼 것을 대가로 합의하고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해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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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 공국과 쿠데타 계획, 그리고 사망 ==
== 알바니아 공국과 쿠데타 계획, 그리고 사망 ==
[[1914년]] [[2월 21일]], 에사드가 이끄는 17명의 [[알바니아]] 대표단은 [[노이비트]]의 성에서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며 [[스컨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에게 알바니아의 왕좌를 물려준다. 에사드가 [[알바니아어]]로 연설하고 [[에치렘 블로라]]가 통역하여 [[알바니아인]]이 새로운 통치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전했다. [[스컨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는 [[알바니아인]]의 신뢰에 감사를 표하고 왕위를 수락하며 [[알바니아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1914년]] [[2월 21일]], 에사드가 이끄는 17명의 [[알바니아]] 대표단은 [[노이비트]]의 성에서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며 [[스컨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에게 알바니아의 왕좌를 물려준다. 에사드가 [[알바니아어]]로 연설하고 [[에치렘 블로라]]가 통역하여 [[알바니아인]]이 새로운 통치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전했다. [[스컨데르베우 2세|빌헬름 추 비트]]는 [[알바니아인]]의 신뢰에 감사를 표하고 왕위를 수락하며 [[알바니아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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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드의 사병의 무장은 계속되었고, 이것이 [[두러스]]를 향한 공격의 준비임이 [[두러스]]에까지 전해졌다. [[5월 17일]], 에사드의 민병대가 수도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두러스]]를 포위한다. [[5월 18일]], [[국제 헌병대]]의 [[요한 슬라위스]] 소령이 위기감을 느끼고 [[두러스]]의 요새화를 진행하자 에사드는 [[알바니아 전쟁부장관|전쟁부장관]]의 명으로 요새화 작업의 중지를 명령한다. 그러나 갑자기 [[스컨데르베우 2세]]가 해당 결정에 개입하여 [[요한 슬라위스]]에게 [[두러스]]의 요새화 작업을 계속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에사드에게 군대의 해산을 명령했고, 에사드는 부당함을 표출하며 명령을 거부한다. 곧이어 [[스컨데르베우 2세]]는 에사드를 해임하고 동시에 그와 그의 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며 해산시킬 것을 명한다. [[5월 19일]] 새벽, [[국제 헌병대]]의 [[요한 슬라위스]] 소령과 그의 부하들이 에사드의 집을 포위하고 총격을 가한다. [[요한 슬라위스]] 소령은 에사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에사드는 이를 거부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수병이 상륙하여 에사드의 집에 3개의 수류탄을 투척한다. 3개 중 1개가 에사드의 침실에 떨어졌고, 굉음과 함께 에사드는 폭사한다. 그 후 그의 아내가 창문으로 피가 묻은 흰색 목도리를 흔들며 나오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에사드의 사병의 무장은 계속되었고, 이것이 [[두러스]]를 향한 공격의 준비임이 [[두러스]]에까지 전해졌다. [[5월 17일]], 에사드의 민병대가 수도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두러스]]를 포위한다. [[5월 18일]], [[국제 헌병대]]의 [[요한 슬라위스]] 소령이 위기감을 느끼고 [[두러스]]의 요새화를 진행하자 에사드는 [[알바니아 전쟁부장관|전쟁부장관]]의 명으로 요새화 작업의 중지를 명령한다. 그러나 갑자기 [[스컨데르베우 2세]]가 해당 결정에 개입하여 [[요한 슬라위스]]에게 [[두러스]]의 요새화 작업을 계속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에사드에게 군대의 해산을 명령했고, 에사드는 부당함을 표출하며 명령을 거부한다. 곧이어 [[스컨데르베우 2세]]는 에사드를 해임하고 동시에 그와 그의 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며 해산시킬 것을 명한다. [[5월 19일]] 새벽, [[국제 헌병대]]의 [[요한 슬라위스]] 소령과 그의 부하들이 에사드의 집을 포위하고 총격을 가한다. [[요한 슬라위스]] 소령은 에사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에사드는 이를 거부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수병이 상륙하여 에사드의 집에 3개의 수류탄을 투척한다. 3개 중 1개가 에사드의 침실에 떨어졌고, 굉음과 함께 에사드는 폭사한다. 그 후 그의 아내가 창문으로 피가 묻은 흰색 목도리를 흔들며 나오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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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 평가 ==
에사드는 이미 생전에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중요한 몇 가지 사건들을 살펴보자면,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에서 [[발리]]에 대한 폭력으로 인해 [[슈코더르 빌라예트]]로 발령된 것,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하던 [[하산 르자]]를 암살한 후 정치적 이익을 위해 [[몬테네그로 왕국]]에 도시를 넘긴 것, [[두러스]]를 중심으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해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불안정하게 한 것, [[스컨데르베우 2세]]에 대항해 알바니아 중부 주민을 무장시킨 것이 있다. 해당 사건들에서 에사드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1913년]] 10월에는 [[슈코더르]]를 구원하러 갔으나 6개월 후에는 도시를 팔아넘겼으며, [[1914년]] 4월에는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다가 불과 두 달만에 [[알바니아 임시 정부]]의 [[알바니아 내무부장관|내무부장관]]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의 갈등으로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의 제안을 무시하다 두 달 뒤에는 [[스컨데르베우 2세]]의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다시 두 달 뒤에는 반역자가 되어 사망했다.
에사드는 이미 생전에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중요한 몇 가지 사건들을 살펴보자면,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에서 [[발리]]에 대한 폭력으로 인해 [[슈코더르 빌라예트]]로 발령된 것,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하던 [[하산 르자]]를 암살한 후 정치적 이익을 위해 [[몬테네그로 왕국]]에 도시를 넘긴 것, [[두러스]]를 중심으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해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불안정하게 한 것, [[스컨데르베우 2세]]에 대항해 알바니아 중부 주민을 무장시킨 것이 있다. 해당 사건들에서 에사드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1913년]] 10월에는 [[슈코더르]]를 구원하러 갔으나 6개월 후에는 도시를 팔아넘겼으며, [[1914년]] 4월에는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다가 불과 두 달만에 [[알바니아 임시 정부]]의 [[알바니아 내무부장관|내무부장관]]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의 갈등으로 [[국제 통제 위원회 (알바니아)|국제 통제 위원회]]의 제안을 무시하다 두 달 뒤에는 [[스컨데르베우 2세]]의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다시 두 달 뒤에는 반역자가 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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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평가 또한 동시대 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된다. 현대의 역사가들 중 조셉 스와이어는 그를 파렴치한 모험가로 그렸고, [[브렌트 위르겐 피셔]]는 재능있는 군인이지만 종종 야망에 휩싸였다고 하며, [[로베르트 엘지]]는 권력에 굶주린 파렴치한 기회주의자로 묘사했으며, [[헝가리]]의 [[처플라르데고비치 크리스티안]]은 에사드를 그 당시 가장 위대하고 무자비한 사기꾼이라 묘사했다. 현대 [[알바니아]]의 어떤 곳에서도 에사드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며, 그저 [[세르비아]]의 거리에 이름을 남긴 세 명의 [[알바니아인]] 중 한 명으로서(''ulica Esad Pašina'', 에사드 파시나 거리) [[세르비아인]]의 동료로 기억되고 있다.
후대의 평가 또한 동시대 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된다. 현대의 역사가들 중 조셉 스와이어는 그를 파렴치한 모험가로 그렸고, [[브렌트 위르겐 피셔]]는 재능있는 군인이지만 종종 야망에 휩싸였다고 하며, [[로베르트 엘지]]는 권력에 굶주린 파렴치한 기회주의자로 묘사했으며, [[헝가리]]의 [[처플라르데고비치 크리스티안]]은 에사드를 그 당시 가장 위대하고 무자비한 사기꾼이라 묘사했다. 현대 [[알바니아]]의 어떤 곳에서도 에사드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며, 그저 [[세르비아]]의 거리에 이름을 남긴 세 명의 [[알바니아인]] 중 한 명으로서(''ulica Esad Pašina'', 에사드 파시나 거리) [[세르비아인]]의 동료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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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
== 가족 ==
에사드는 총 두 번 결혼했다. 세이리예 볼트와는 3녀를 얻었고, [[1891년]] 이혼 후 샤디예 아지즈트와 재혼했다. 샤디예 아지즈트와 자식은 없었고, [[에디스 더햄]]에 따르면 [[1908년]]에 [[슈코드라]]에서 샤디예 아지즈트를 내쫒고 세 번째 결혼을 했다고 한다.
에사드는 총 두 번 결혼했다. 세이리예 볼트와는 3녀를 얻었고, [[1891년]] 이혼 후 샤디예 아지즈트와 재혼했다. 샤디예 아지즈트와 자식은 없었고, [[에디스 더햄]]에 따르면 [[1908년]]에 [[슈코드라]]에서 샤디예 아지즈트를 내쫒고 세 번째 결혼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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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테페 톱타니 - [[사미 브리오니]]
* 페르테페 톱타니 - [[사미 브리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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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이스마엘 체말리]]
* [[이사 볼레타니]]
* [[스컨데르베우 2세]]
* [[중앙알바니아 공화국]]


{{엔조 전임후임 상자
{{엔조 전임후임 상자

2023년 10월 6일 (금) 15:31 판

 
에사드 톱타니
Esad Toptani
출생일 불명
출생지 오스만 제국 티라나
사망일 1914년 5월 19일
사망지 알바니아 공국 두러스
가문 톱타니가
부친 알리 톱타니
모친 바스피예 알리조티
종교 이슬람교

에사드 톱타니(알바니아어: Esad Toptani, 1863년 4월 혹은 1875년 ~ 1914년 5월 18일)는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자 알바니아 공국의 정치인이었다. 발칸 전쟁 이후 중부 알바니아두러스를 중심으로 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알바니아 공국에 등용되어 쿠데타를 조직하다 실패하고 국제 헌병대가 던진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다.

알바니아 중부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에사드는 이후 1893년, 오스만 제국의 헌병 장교로 경력을 쌓았으며, 1908년에는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하여 콘스탄티니예에서 하원 의원을 지녔다. 1912년 10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의해 포위된 슈코더르를 방어하다가 1913년 1월,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하산 르자를 살해하고 퇴각 시 부대를 공격하지 않는 것과 후일 중부 알바니아의 야망을 지원하는 대가로 비밀 협상을 통해 4월에 도시를 몬테네그로에 양도한다. 이후 자신을 알바니아의 왕으로 선포했지만 1913년 7월, 이스마엘 체말리알바니아 임시 정부에 합류한다. 한 달 후, 알바니아 임시 정부에서 사임하여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갈등은 무력충돌로 발전하였고, 국제 통제 위원회가 중제하며 갈등은 종식된다.

알바니아 공국퍼르메티 정부에서 전쟁부장관내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알바니아의 군주가 되고자 보스니아인 난민과 자신의 영지민을 무장시켜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국제 헌병대스컨데르베우 2세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국제 헌병대두러스에 있는 그의 집을 포위하였고, 항복을 거부하다가 국제 헌병대의 수류탄에 의해 사망한다.

탄생

에사드 톱타니는 알바니아 중부의 티라나에서 무슬림 지주 가문인 톱타니가의 알리 톱타니와 바스피예 알리조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아직까지 논란으로 오랫동안 1863년으로 예상했다. 10년간 알바니아 수상의 생애를 연구한 롤랜드 카포쿠는 1863년 6월 13일로, 일리르 이코노미는 그보다 1년 후인 1864년이라 주장했다. 에사드는 알리 톱타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가니 톱타니는 후일 콘스탄티니예의 궁전 근위대의 장교가 되어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경호원으로 근무했다. 가니 톱타니는 1898년 12월 21일,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하피즈 파샤란 인물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사드의 다른 형제인 베히드 톱타니는 오스만 제국의 장교가 되었다. 1913년, 에사드가 몬테네그로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무렵, 그는 이오아니나에서 그리스군과 맞섰다.

헌병 장교

에사드는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공부했다. 1890년 대, 그의 부모님은 사망하였고, 그는 알바니아 중부의 10,000ha의 가문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연간 약 20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부유한 지주 가문의 가장을 고위 공직이나 장교로 임명했기에 1893년, 에사드는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의 헌병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 경력이 없었으나 1897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9년 새로이 임명된 이오안니나 빌라예트발리는 에사드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902년 9월, 발리가 그의 애인과 시간을 보낼 때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체포하고 이슬람 도덕에 위배된다며 문책했다. 사건 이후 에사드는 재판을 받지 않고 알바니아 북부의 슈코더르로 발령되었다. 1902년 9월 15일, 그는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슈코더르 발리예트의 헌병 사령관이 된 에사드는 그곳의 헌병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을 썼다. 취임한 지 얼마 후인 1903년 2월 무렵, 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미르디타 지역의 가톨릭 주민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무력과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200여 명의 반군을 체포했다.

에사드의 근무지는 슈코더르였지만 그는 주로 그의 고향인 티라나에 거주했다. 그는 이전에 살던 집을 철거하고 더 크고 현대적인 코낙을 지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부를 티라나를 개선하는데 사용했다. 판자집을 헐어 새 집을 짓고, 거리를 확장하고 포장하며,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두러스와의 도로를 현대화했다. 기존의 봉건적인 귀족들의 분노를 샀으나 영지의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가축을 제공했으며, 때로는 소규모의 영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오스만 정계 입문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폐위를 직접 전하러 간 대표단. 대표단의 대표인 에사드 톱타니가 가운데에 서 있다.

1908년 여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의 승리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들을 지지한 대가로 자유를 얻어 콘스탄티니예로 건너가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했다. 1908년 12월 17일부터 오스만 제국의 하원에서 두러스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4월 12일에서 13일 새벽, 콘스탄티니예에서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전제정치를 복원하길 원하는 무장 반혁명이 일어났다. 청년 튀르크당은 2주 만에 반혁명을 격퇴했고, 4월 27일, 압뒬하미트 2세는 폐위되었다. 이때 에사드는 압뒬하미트 2세에게 직접 폐위 사실을 전하는 4명의 대표단 중 한 명을 맡았다. 이전까지 하원에서의 에사드의 발언을 본다면 그는 오스만주의로부터 결별하며 알바니아인의 민족 자결권을 지지했다. 1910년에는 라틴 문자의 도입과 이를 비준한 제2차 마나스티리트 회의를 지지했으며, 동년 12월에는 무력으로 알바니아인의 독립을 억압하던 콘스탄티니예의 정부를 공격했다. 그후 에사드는 청년 튀르크당에서 탈당했으며, 1911년부터는 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1912년 1월 12일, 알바니아인 하원의원 이스마엘 체말리하산 프리슈티나알바니아 무장 혁명을 위해 콘스탄티니예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에사드 또한 그의 동포와 함께 이 비밀결사에 참가했으며, 알바니아 중부의 자신의 영지 주민을 무장시켜 투쟁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후 알바니아로 귀국한 에사드는 1912년 4월, 알바니아 봉기에 휘말린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내무부장관인 하즈 아딜 아르다의 대표단이 티라나에 방문하여 에사드와 협상하였다. 그들은 에사드가 봉기에서 손을 떼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온다면 전쟁부에 등용하겠다고 회유했고, 에사드는 봉기 참여를 번복하고 콘스탄티니예로 돌아갔다. 1912년 8월, 육군사령부로부터 슈코더르를 방어할 것과 예비 부대를 조직할 것을 명받은 에사드는 알바니아로 돌아간다.

슈코더르 공방전

에세드 톱타니가 없는 하산 르자와 그의 참모들

제1차 발칸 전쟁의 발발과 함께 10월 8일, 몬테네그로의 군대는 슈코더르를 공격한다. 슈코더르 빌라예트발리하산 르자는 약 13,000명의 부대로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했다. 에사드가 언제 슈코더르에 합류했는지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르나, 대부분은 10월 초에 1만 여명의 대규모 예비대와 엘바산에 위치했었고, 10월 25일슈코더르로 합류했다고 봤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25일보다 일렀으며, 부대의 규모는 1만 명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월 중순 쯔음부터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해 몇 주만에 두러스,티라나, 카바여, 크루여, 시야크 등지에서 5,500여 명의 알바니아인 예비대를 모집했다. 9월 27일, 에사드는 부대를 이끌고 슈코더르로 가고자 했으나 카톨릭 성향이 다수인 자드리마 지역의 지도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들은 에사드가 슈코더르를 방어하기 위함이 아닌 북부의 기독교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이동한다고 의심했다. 에사드는 그들을 패퇴시키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자드리마에 몇몇 대대를 남겨두고 10월 3일, 에사드와 그의 부대는 슈코더르에 합류한다.

도시의 상황은 11월 중순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몬테네그로군은 추가 병력을 투입했으며, 세르비아군 또한 합류했다. 포위는 4개월 가량 지속되었으며, 수비군은 콘스탄티니예의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1913년 1월 말, 알바니아인하산 르자슈코더르알바니아의 영토로 선포하고 알바니아의 국기를 계양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통해 슈코더르 주교의 기치 아래 싸우고자하는 고지대의 카톨릭 주민들을 도시 방어에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후인 1월 30일, 하산 르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에디스 더햄의 설명에 따르면 에사드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에사드의 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여성의 복장을 한 두 명의 암살자의 총을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암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에사드가 지휘권을 인수하고 그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하산 르자의 암살의 배후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 그의 보좌관 중 한 명은 그로부터 수 년 후 자신과 다른 이가 에사드로부터 암살을 의뢰 받았다고 증언했다. 암살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가 최소한의 피해로 도시를 방어해 내 유리한 평화 조건을 확보함과 동시에 슈코더르의 구세주로써 정치적 입지를 얻고자 했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에사드는 실제로 얼마지나지 않아 2월 6일, 공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고지에서 슈코더르를 포위하는 몬테네그로군

1913년 3월 22일, 런던에서 합석한 열강 대표들은 슈코더르의 신생 알바니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3월 28일, 그들은 몬테네그로에 포위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몬테네그로 정부는 이에 대해 더욱 강력한 공세를 진행한다. 몇 주간 몬테네그로 정부는 열강의 요구를 무시했다.

에사드는 압도적인 열세와 식량 문제에 직면했기에 싸우는 대신 다른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빠르면 2월 말부터 슈코더르이탈리아 영사를 통해 몬테네그로와 비밀 협상을 진행한다. 4월 8일, 몬테네그로 왕국은 그에게 응답했고, 4월 21일, 에사드는 몬테네그로군 사령관인 얀코 부코티지로부터 24,000여 명의 병력을 자유롭게 철수하는 대가로 슈코더르드런강 계곡까지의 영토를 몬테네그로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4월 23일, 에사드는 이에 동의했고, 얀코 부코티지는 그날 오후 3시에 슈코더르에 입성한다. 에사드와 그의 부하들은 몬테네그로군에 포대만 넘겨준 체 슈코더르에서 철수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 중앙알바니아 공화국

슈코드라 공방전 동안 알바니아에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1912년 11월 28일, 블로러 회의에서 알바니아의 독립이 선포되었고, 이스마엘 체말리의 지도 아래 알바이아 최초의 정부가 구성되었다. 런던의 회의에서는 알바니아의 경계가 논의되고 있었다.

슈코드라를 떠난 지 나흘 후인 1913년 4월 27일, 에사드는 세르비아가 통제하던 레저에서 군사 행진을 통해 자신을 알바니아의 왕으로 선포했다. 이후 남하하여 자신의 영지의 중심인 티라나에서 통치를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이 알바니아 중부를 제외하고는 기반이 없으며, 이는 알바니아인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그리스 왕국과 협력하고자 협상을 병행했다. 5월 5일, 에사드는 몬테네그로세르비아와 협상에 들어섰으나, 쉬레야 블로라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입장을 대변하며 개입해 에사드가 이스마엘 체말리와 손을 잡도록 설득했다. 결국 1913년 7월 3일, 에사드는 블로러로 가 이스마엘 체말리의 제안을 수락하고, 7월 5일, 무피드 리보호바를 대신하며 알바니아 임시 정부내무부장관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에사드의 등용을 우려했다. 코소보의 군벌인 이사 볼레티니는 에사드를 몰아낼 계획까지 세웠으나 이스마엘 체말리의 주장에 굴복하며 포기했다. 취임 직후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로 떠났다는 사실로 인해 우려는 잦아들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8월 1일,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반이슬람적이라 비난하며 사임하였고, 블로러를 떠나 두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지지자와 함께 알바니아 중부를 장악할 준비를 마쳤다.

에사드는 이스마엘 체말리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최후통첩의 내용으로는 정부를 완전히 개편하고 두러스를 수도로 지정하고, 의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이스마엘 체말리는 최후통첩을 거절했고, 1913년 11월 18일, 에사드는 반정부를 결성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다른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고, 1913년 10월 12일 혹은 10월 14일,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선포한다.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영역에는 두러스 외에도 티라나, 시야크, 카바여, 페친, 크루여 등이 포함되었다.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입법 기관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의 대표로 구성된 플레처시아였다. 에사드는 세르비아와도 계속 소통한 것으로 보인다. 세르비아 왕국의 계획은 에사드를 지원하여 그를 알바니아의 총독으로, 이후 알바니아 북부 통합이 완료된 이후에 그를 알바니아의 왕으로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몰아내고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에사드와 알바니아 임시 정부의 갈등은 내전으로 발전할 우려를 줌과 동시에 알바니아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흔들었다. 1913년 11월, 알바니아 임시 정부 내무부장관하산 프리슈티나는 두 정부를 화해시키기 위해 중립지대인 엘바산으로 그들을 초청한다. 내부의 반대 세력의 위협이 있었기에 타협의 의사를 보였고, 하산 프리슈티나는 새 내각에서 전쟁부장관직을 약속한다. 국제 통제 위원회하산 프리슈티나의 제안을 지지했으나, 알바니아의 분열을 원한 프랑스는 에사드가 제안에 반대하도록 종용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913년 말, 알바니아는 내전 직전에 처한다. 1914년 1월, 콜로보르다에서 알바니아 임시 정부 충성파와 에사드의 군벌 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1월 9일, 에사드의 군벌 300명이 마을을 포위하자 엘바산 전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된다. 1914년 1월 18일, 국제 헌병대가 마을에 부대를 보내 해산시키면서 비상사태는 해결되었다.

한편, 열강들은 빌헬름 추 비트알바니아의 공작으로 옹립했고, 그는 지역 군벌이 자신의 왕위를 인정하고 열강이 그의 결정을 순응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1914년 1월 22일, 알바니아 임시 정부국제 통제 위원회에 권력을 위임하고 해산하였으며, 열강은 에사드 또한 같은 결정을 행할 것을 촉구했다. 에사드는 이 요구를 거절했으나 영국독일의 대표단은 1914년 1월 30일,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의 지도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2월 4일, 에사드는 알바니아 공국두러스를 수도로 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이 의회를 구성하고, 자신이 직접 빌헬름 추 비트에게 왕관을 건낼 것을 대가로 합의하고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해산한다.

알바니아 공국과 쿠데타 계획, 그리고 사망

1914년 2월 21일, 에사드가 이끄는 17명의 알바니아 대표단은 노이비트의 성에서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며 빌헬름 추 비트에게 알바니아의 왕좌를 물려준다. 에사드가 알바니아어로 연설하고 에치렘 블로라가 통역하여 알바니아인이 새로운 통치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전했다. 빌헬름 추 비트알바니아인의 신뢰에 감사를 표하고 왕위를 수락하며 알바니아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스컨데르베우 2세가 디자인한 제복을 입은 에사드 톱타니

빌헬름 추 비트1914년 3월 7일, 두러스에 도착하였고, 에사드는 그가 디자인한 진줏빛 제복을 착용하였다. 3월 14일, 스컨데르베우 2세투르한 퍼르메티에게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3월 18일, 투르한 퍼르메티의 공식적인 선서로 새 내각이 수립되었고, 에사드는 내무부전쟁부의 장관직을 맡는다. 중대한 두 부서의 장관이 된 에사드는 퍼르메티 정부의 독재자가 되었다.

1914년 4월 10일, 에사드의 조카인 아메트 조골리가 가능한 빨리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청하자 에사드는 즉각적인 행동을 취한다. 스컨데르베우 2세로부터 독립된 입법 기관인 알바니아 국민의회가 자신의 권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마트 지역에 수 천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한 아메트 조골리가 위협이 된다 판단하여 '위험한 사상'을 퍼트리고 있는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스컨데르베우 2세가 이에 개입하여 아메트 조골리의 체포를 막았고, 분노한 에사드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알바니아 중부에 있는 그의 추종자들과 코소보보스니아의 난민들을 무장시켜 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의 요원들은 두러스의 기독교왕이 무슬림들을 소아시아로 추방할 것이라 선전하였고, 마침 북이피로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이동하자 선전은 효과를 보였다. 한편 5월 8일, 에사드는 스컨데르베우 2세에게 자신을 둘러싼 음모로 인해 임수를 수행할 수 없어졌다며 사직서를 제출하고 국가의 평화를 위해 해외에 정착하겠다 선언했다. 그러나 스컨데르베우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계속 등용할 것을 보장했다.

1914년 4월, 두러스의 에세드 톱타니의 집 계단에서 에세드 톱타니와 투르한 페르메티 수상

에사드의 사병의 무장은 계속되었고, 이것이 두러스를 향한 공격의 준비임이 두러스에까지 전해졌다. 5월 17일, 에사드의 민병대가 수도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두러스를 포위한다. 5월 18일, 국제 헌병대요한 슬라위스 소령이 위기감을 느끼고 두러스의 요새화를 진행하자 에사드는 전쟁부장관의 명으로 요새화 작업의 중지를 명령한다. 그러나 갑자기 스컨데르베우 2세가 해당 결정에 개입하여 요한 슬라위스에게 두러스의 요새화 작업을 계속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에사드에게 군대의 해산을 명령했고, 에사드는 부당함을 표출하며 명령을 거부한다. 곧이어 스컨데르베우 2세는 에사드를 해임하고 동시에 그와 그의 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며 해산시킬 것을 명한다. 5월 19일 새벽, 국제 헌병대요한 슬라위스 소령과 그의 부하들이 에사드의 집을 포위하고 총격을 가한다. 요한 슬라위스 소령은 에사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에사드는 이를 거부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의 수병이 상륙하여 에사드의 집에 3개의 수류탄을 투척한다. 3개 중 1개가 에사드의 침실에 떨어졌고, 굉음과 함께 에사드는 폭사한다. 그 후 그의 아내가 창문으로 피가 묻은 흰색 목도리를 흔들며 나오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평가

에사드는 이미 생전에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중요한 몇 가지 사건들을 살펴보자면, 이오안니나 빌라예트에서 발리에 대한 폭력으로 인해 슈코더르 빌라예트로 발령된 것, 슈코더르의 방어를 담당하던 하산 르자를 암살한 후 정치적 이익을 위해 몬테네그로 왕국에 도시를 넘긴 것, 두러스를 중심으로 중앙알바니아 공화국을 수립해 알바니아 임시 정부를 불안정하게 한 것, 스컨데르베우 2세에 대항해 알바니아 중부 주민을 무장시킨 것이 있다. 해당 사건들에서 에사드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1913년 10월에는 슈코더르를 구원하러 갔으나 6개월 후에는 도시를 팔아넘겼으며, 1914년 4월에는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다가 불과 두 달만에 알바니아 임시 정부내무부장관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와의 갈등으로 국제 통제 위원회의 제안을 무시하다 두 달 뒤에는 스컨데르베우 2세의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다시 두 달 뒤에는 반역자가 되어 사망했다.

에사드의 측근이자 보좌관, 요원, 부하이던 오스만 발린을 제외하고는 그가 오랫동안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협력한 인물은 없었다. 이스마엘 체말리와의 협력은 한 달도 채 되지 못했고, 스컨데르베우 2세와도 마찬가지였다. 톱타니가의 다른 친척들은 에사드에 대해 좋은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촌 중 한 명인 아브디 톱타니아치프 엘바사니는 에사드의 정적이었고, 조카인 아메트 조골리는 에사드를 지원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면서 관계를 끊었다. 사위인 사미 브리오니에 따르면, 에사드의 자식들은 그를 미워했고, 차녀인 마흐무데 톱타니(혹은 마흐무디예 톱타니)는 그가 사망한 이후 장례를 치르기를 거부하고 한 평생 그의 무덤에 성묘하러 가지 않았다. 후일 사미 브리오니는 "나는 그의 입에서 '알바니아'라는 단어가 좋은 느낌으로 나오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경멸했다.

에사드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현대 알바니아인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융통성 없는 정치 체제에 대해 에사드를 언급한다. (현대 정치 설정 시 채울 것). 동시에 에사드와 동시대 사람들 중 권위 있고 때로는 온건한 정치인으로 알려진 정치인들이 그의 정치적 목표에 동의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예를 들어 알바니아 중부에 대한 야망은 아지즈 브리오니, 쉬레야 블로라, 메흐디 프라셔니, 데르비시 히마, 파이크 코니차 등이 공유했고, 에사드의 지지자로는 무사 유카, 아바즈 쿠피 등이 있었다. 스컨데르베우 2세와 그의 보좌관 윌리엄 던컨 히튼암스트롱은 처음에 에사드의 외모를 보고 그의 악명을 믿기 힘들다고 느꼈다.

에사드 파샤는 좋은 인상을 준다. 그는 평균 키의 건장한 남성으로, 크고 지적인 이마와 날카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다. 50년 세월의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1914년 3월, 윌리엄 던컨 히튼암스트롱

후대의 평가 또한 동시대 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묘사된다. 현대의 역사가들 중 조셉 스와이어는 그를 파렴치한 모험가로 그렸고, 브렌트 위르겐 피셔는 재능있는 군인이지만 종종 야망에 휩싸였다고 하며, 로베르트 엘지는 권력에 굶주린 파렴치한 기회주의자로 묘사했으며, 헝가리처플라르데고비치 크리스티안은 에사드를 그 당시 가장 위대하고 무자비한 사기꾼이라 묘사했다. 현대 알바니아의 어떤 곳에서도 에사드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며, 그저 세르비아의 거리에 이름을 남긴 세 명의 알바니아인 중 한 명으로서(ulica Esad Pašina, 에사드 파시나 거리) 세르비아인의 동료로 기억되고 있다.

가족

에사드는 총 두 번 결혼했다. 세이리예 볼트와는 3녀를 얻었고, 1891년 이혼 후 샤디예 아지즈트와 재혼했다. 샤디예 아지즈트와 자식은 없었고, 에디스 더햄에 따르면 1908년슈코드라에서 샤디예 아지즈트를 내쫒고 세 번째 결혼을 했다고 한다.

  • 나피예 톱타니
  • 마흐무데 톱타니 혹은 마흐무디예 톱타니 (? - 1935년 경) - 사미 브리오니
    • 오메르 브리오니 혹은 위메르 브리오니
  • 페르테페 톱타니 - 사미 브리오니

같이 보기

제2대 알바니아 내무부장관
전임 임기 후임
무피드 리보호바 1913년 7월 5일 - 1913년 8월 1일 하산 프리슈티나
중앙알바니아 공화국 정부 수반
전임 임기 후임
(초대) 1913년 10월 12일 혹은 10월 14일 - 1914년 2월 4일 (해산)
제3대 알바니아 전쟁부장관
전임 임기 후임
페이지 알리조티 1914년 3월 14일 - 1914년 5월 18일 카라 세이트
제6대 알바니아 내무부장관
전임 임기 후임
페이지 알리조티 1914년 3월 14일 - 1914년 5월 18일 아치프 엘바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