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헌병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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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파비위스 대위, 크론 소령, 더발 소령, 슬라위스 소령, 도르만 중령, 룰프세마 소령, 더흐로트 박사, 사르 대위, 페르휠스트 소령, 스넬런 반 폴렌호번 소령, 말링크롯 일등중위, 레이머르스 대위, 소너 대위
| style=" border: 0px; " | 왼쪽부터 파비위스 대위, 크론 소령, 더발 소령, 슬라위스 소령, 도르만 중령, 룰프세마 소령, 더흐로트 박사, 사르 대위, 페르휠스트 소령, 스넬런 반 폴렌호번 소령, 말링크롯 일등중위, 레이머르스 대위, 소너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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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7일 (화) 18:33 판

 
국제 헌병대
Xhandarmeria ndërkombëtare
1913년 알바니아 남부의 국제 헌병대
국적 알바니아 공국
병과 헌병대
역할 법 집행 기관
지휘 체계
참전


국제 헌병대(알바니아어: Xhandarmeria ndërkombëtare 잔다르메리아 은더르콤버타레, 영어: International Gendarmerie)는 알바니아 공국의 최초의 법집행기관이다. 1913년 5월 30일 체결된 런던 조약의 결과로 6개 강대국의 결정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구성원이 네덜란드인이었기에 네덜란드 군사 사절단이라고도 불렸다.

1913년 11월 10일, 헌병대 첫 인원이 알바니아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14년, 농민 반란에 직면하여 많은 장교가 사망하고 투옥되었으나 성공적으로 두러스를 방어했다. 7월 4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장교들이 두러스에 합류하면서 네덜란드 장교들은 점차 귀국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완전히 귀환했다.

배경

1913년 7얼 29일, 제54차 런던 회의에서 알바니아 공국의 수립이 결정된다. 새 국가에는 헌병대가 필요했고, 중립성을 위해 6개 강대국 외의 인물로 구성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논의된 국가는 스웨덴이었으나 이미 페르시아에서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동인도에서 여러 실전 경험이 있던 네덜란드를 선택하였다.

지도부

 
왼쪽부터 파비위스 대위, 크론 소령, 더발 소령, 슬라위스 소령, 도르만 중령, 룰프세마 소령, 더흐로트 박사, 사르 대위, 페르휠스트 소령, 스넬런 반 폴렌호번 소령, 말링크롯 일등중위, 레이머르스 대위, 소너 대위

네덜란드 전쟁부 장관은 처음으로 로데베이크 톰손 소령을 헌병대장으로 임명했으나 네덜란드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 새로 교체된 전쟁부 장관1913년 10월 20일, 로데베이크 톰손 소령에서 빌럼 더페이르 대령으로 교체한다. 더페이르와 톰손은 국제 헌병대 설립에 대한 150쪽 가량의 기밀 문서를 작성하였고, 장교 5,000명 규모를 목표로 한 국제 헌병대가 설립된다. 1914년 2월 24일, 블로러에 크론 소령, 더발 소령, 슬라위스 소령, 룰프세마 소령, 페르휠스트 소령, 스넬런 판 폴렌호번 소령, 파비위스 대위, 도르만 대위, 사르 대위, 레이머르스 대위, 소너 대위, 말링크롯 중위, 더흐로트 박사, 총 13명의 장교가 상륙하였다.

임무

청년 튀르크당베키르 피크리가 오스만-알바니아 장교인 아흐메트 이제트를 군주로 옹립할려는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국제 헌병대가 이들을 기습하여 음모를 저지한다. 알바니아 임시 정부는 해체되고 국제 통제 위원회알바니아의 행정 전반을 장악한다.

알바니아 유기헌법에 의해 국제 헌병대는 민병대와 함께 알바니아군을 이루었다. 그러나 알바니아 공국에는 국제 헌병대와 민병대 뿐만 아니라 남부의 민병대, 알바니아인 무법자, 불가리아인 코미타지, 북이피로스그리스인 반군, 중앙 알바니아의 농민 반군, 에사드 톱타니의 헌병대, 이사 볼레티니가 이끄는 코소보 자원병, 프렌크 비버 도다를 따르는 미르디타 가톨릭 자원병 등 여러 군벌이 난립하던 상황이었다.

국제 헌병대의 첫 임무는 1914년 2월 28일, 북이피로스의 독립 선언 이후 알바니아 남부를 장악하기 위한 신병 훈련이었다. 전쟁부 및 내무부의 장관인 에사드 톱타니는 해당 문제의 평화 해결을 반대하였고, 국제 통제 위원회에사드 톱타니의 주장을 수용했다. 이탈리아제 소총 수천정과 오스트리아제 기관총 및 산악포가 중부 알바니아 민병대에 보급되었다.

자신이 군주가 되겠단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에사드 톱타니1914년 5월 17일, 보스니아인 난민과 자신의 소작농들을 무장시켜 두러스를 향한 쿠데타를 계획한다. 명목상 북부 해적의 토벌을 위함이었으나, 국제 헌병대의 요한 슬라위스 소령은 위협을 느끼고 두러스의 요새화를 진행한다. 에사드 톱타니는 전쟁부 장관의 이름으로 중지를 명령했으나 요한 슬라위스 소령은 이를 거부했고, 스칸데르베우 2세 또한 국제 헌병대의 결정을 지지했다. 동시에 스칸데르베우 2세는 그의 군대의 해산을 명령했고, 5월 18일, 에사드 톱타니는 이를 불복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요한 슬라위스의 부대는 에사드 톱타니의 집을 포위하여 포격하였고, 에사드 톱타니는 항복을 거부하다가 포탄에 맞아 사망한다.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