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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제스 독재의 공고화와 당내 정쟁 === | === 장제스 독재의 공고화와 당내 정쟁 === | ||
1960년대 들어서 중국국민당 내의 파벌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제3대 중국 정부총통 선거 (민국 38)|제3대 정부총통 선거]]를 거치면서 장제스의 3선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대부분 거세되었고 [[후스 (민국 38)|후스]], [[레이전 (민국 38)|레이전]], [[우궈전(민국 38)|우궈전]], [[왕징웨이 (민국 38)|왕징웨이]], [[쑹칭링 (민국 38)|쑹칭링]]등 일부 거물급 인물들, 즉 국내외의 여론을 고려할 때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인물들을 제외한 국민당내 야권 인사들과 민주당파 인사들은 투옥되거나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또한 당내의 숙청과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며 장제스로 대표되는 중앙 권력은 정점에 달하였고 이는 [[광서파 (민국 38)|광서파]](계계파), [[광동파 (민국 38)|광동파]]<ref>다만 광동파 일부는 쑹칭링에 의탁하여 미약하게나마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이들은 차후 왕징웨이의 개조파와 함께 [[중국혁명당 (민국 38)|중국혁명당]]으로 이어진다.</ref>, 산서파(염계파), 운남파(전계파)등의 지역 군벌 기반의 파벌들의 자연스러운 소멸을 야기하였다. | 1960년대 들어서 중국국민당 내의 파벌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제3대 중국 정부총통 선거 (민국 38)|제3대 정부총통 선거]]를 거치면서 장제스의 3선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대부분 거세되었고 [[후스 (민국 38)|후스]], [[레이전 (민국 38)|레이전]], [[우궈전 (민국 38)|우궈전]], [[왕징웨이 (민국 38)|왕징웨이]], [[쑹칭링 (민국 38)|쑹칭링]]등 일부 거물급 인물들, 즉 국내외의 여론을 고려할 때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인물들을 제외한 국민당내 야권 인사들과 민주당파 인사들은 투옥되거나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또한 당내의 숙청과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며 장제스로 대표되는 중앙 권력은 정점에 달하였고 이는 [[광서파 (민국 38)|광서파]](계계파), [[광동파 (민국 38)|광동파]]<ref>다만 광동파 일부는 쑹칭링에 의탁하여 미약하게나마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이들은 차후 왕징웨이의 개조파와 함께 [[중국혁명당 (민국 38)|중국혁명당]]으로 이어진다.</ref>, 산서파(염계파), 운남파(전계파)등의 지역 군벌 기반의 파벌들의 자연스러운 소멸을 야기하였다. | ||
중국국민당 내의 일부 자유주의 파벌과 좌익 파벌을 제외한 모든 반장(反將) 파벌이 말살당하고 친장(親將)파벌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되자 이는 결과적으로 친장파 파벌들의 분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구 국민혁명'''군'''의 파벌, 즉 군벌에서 장제스의 의중을 읽고 빠른 속도로 국민'''당'''의 파벌로 전환한 천청의 토목계와 허잉친의 황포계, 장제스의 친위세력인 천리푸의 CC단(중앙구락부)와 다이리의 부흥계<ref>"중국판 친위대"로 악명높은 삼민주의역행사, 통칭 '''남의사'''의 전신인 "중화민족부흥사"에서 따온 이름으로 1970년대까지 이 조직의 존재가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명칭이 아닌 당내 소수의 지칭이었다.</ref>, 장췬을 영수로 하는 비교적 느슨하고 온건한 행정 관료과 일부 민간출신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학계와 장제스 총통의 아들인 장징궈를 중심으로 하는 | 중국국민당 내의 일부 자유주의 파벌과 좌익 파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반장(反將) 파벌이 말살당하고 친장(親將)파벌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되자 이는 결과적으로 친장파 파벌들의 분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구 국민혁명'''군'''의 파벌, 즉 군벌에서 장제스의 의중을 읽고 빠른 속도로 국민'''당'''의 파벌로 전환한 천청의 토목계와 허잉친의 황포계, 장제스의 친위세력인 천리푸의 CC단(중앙구락부)와 다이리의 부흥계<ref>"중국판 친위대"로 악명높은 삼민주의역행사, 통칭 '''남의사'''의 전신인 "중화민족부흥사"에서 따온 이름으로 1970년대까지 이 조직의 존재가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명칭이 아닌 당내 소수의 지칭이었다.</ref>, 장췬을 영수로 하는 비교적 느슨하고 온건한 행정 관료과 일부 민간출신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학계와 장제스 총통의 아들인 장징궈를 중심으로 하는 태자당(太子黨)이 주요 파벌로 존재하였고 이외에도 쑨커를 중심으로 하는 당내 온건주의적 원로들의 모임인 온화파와 쑹메이링을 중심으로 하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경제 카르텔 세력<ref>이른바 4대 가족이라는 단어로 대표된다.</ref>인 국모파, 후스 등의 자유파 인사들을 추종하는 젊은 개혁 세력인 민권계와 왕징웨이 등으로 대표되는 당내 좌파인 민생계등이 기타 파벌로 존재하였다. | ||
당내의 야권 포지션인 민권계와 민생계, 국모파와 온화파를 제외한 나머지 6개 주요 파벌들은 장제스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총통 아래의 차석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정쟁을 벌였다. 당초 가장 유력하던 파벌은 천청의 토목계와 허잉친의 황포계, 천리푸의 중앙구락부였으나 전자는 1965년 천청의 서거로 인하여 구심점을 잃었고 후자는 천청의 사망 이후 당의 최대 파벌로 부상하였으나 1968년 [[제1차 전민항쟁 (민국 38)|제1차 전민항쟁]] 당시의 실책으로 인하여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 |||
두 파벌의 몰락 이후 잠시동안 허잉친의 황포계가 당권을 잡았다. 그러나 장제스가 아들인 장징궈를 이미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상황에서 장징궈는 장제스의 전폭적인 신뢰아래 허잉친의 황포계를 "구태세력"으로 몰아가며 실각시켰고 관료 중심의 정학계와 쑨커의 온화파와 연합하여 당권을 잡았다. 당권을 잡은 장징궈와 태자당은 반대파들을 숙청하며 절대 다수파의 지위에 올랐고 결과적으로 1970년대부터 장징궈의 사망 시점까지 장징궈와 태자당은 국민당을 주도하게 되었다. | |||
=== 장제스의 사망과 민주화 정국 === | === 장제스의 사망과 민주화 정국 === | ||
2024년 1월 18일 (목) 11:0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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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보수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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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혁명당 | → | 중국국민당 | → | 현재 |
→ | 중화혁명당 (분당) | |||
→ |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분당) |
중국국민당 中國國民黨 | Kuomintang[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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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 國民黨(국민당), 國民(국민), 國(국), KMT, CNP |
표어 | 民族、民權、民生 민족, 민권, 민생 |
창당일 | 1914년 7월 8일 (중화혁명당)[3] |
1919년 10월 10일 (중국국민당) |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난징시 구러우구 후난로 10호 (중국국민당 중앙당부) | |
주석 | 장완안 / 재선 (입, 21·22대) |
부주석 | 롄성원 / 4선 (입, 21-24대) |
장치천 / 4선 (입, 20-22·24대) | |
한정 / 5선 (입, 20-24대) | |
비서장 | 왕유민 / 4선 (입, 20·21·23·24대) |
당단총소집인 | 예젠춘 / 재선 (14·15대) |
리간제 / 4선 (입, 21-24대) | |
이념 | 삼민주의 보수주의 중화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4] 반제국주의 한족민족주의[5] 국민당 우파 • 우익권위주의 • 후한민 사상 (국민정부 전기)[6] • 장제스 사상 (국민정부 후기 ~ 제1공화국)[7] 국민당 좌파 • 혁명적 사회주의 • 마르크스주의 그 외 • 자유주의[8] • 반기독교[9]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극우[10]
• 빅 텐트 |
국민대회 대표 | n석[11] / n석 (nn.nn%) |
입법위원 | n석[12] / n석 (nn.nn%) |
성급행정구장 | n석 / 36석 (00.00%) |
현급행정구장 | n석[13] / n석 (nn.nn%) |
성급행정구의원 | n석[14] / n석 (nn.nn%) |
현급행정구의원 | n석[15] / n석 (nn.nn%) |
당색 | 파란색 (#0000AA) |
파란색 (#000095) | |
정책연구소 | 국가정책연구기금회 |
교육기관 | 혁명실천연구원 |
자매정당 | 티베트 혁명당 말레이시아 화인 협회 |
국제조직 | 국제민주연합 |
중도민주 인터내셔널 | |
국제 삼민주의 포럼 | |
정당원 수 | 53,816,379명 (2030년 1월 기준) |
학생조직 | 중국청년구국단 |
청년조직 | 중국국민당청년단 |
중국국민당전국청년공작총회 | |
여성조직 | 중화민국부녀연합회 |
노동조합 | 중화민국전국총공회 |
당보 | 중앙일보(中央日報) |
당가 | 삼민주의가 |
당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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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1월 포스터 - 새로운 생각으로 중국을 움직인다.[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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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중국국민당은 중국의 보수정당으로 현재 중국의 제1야당이다.
성향
역사
신해혁명과 대(對)군벌 투쟁
국민혁명과 황금 10년
9년 항쟁과 국공내전
내전 승리와 전후 복구
장제스 독재의 공고화와 당내 정쟁
1960년대 들어서 중국국민당 내의 파벌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제3대 정부총통 선거를 거치면서 장제스의 3선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대부분 거세되었고 후스, 레이전, 우궈전, 왕징웨이, 쑹칭링등 일부 거물급 인물들, 즉 국내외의 여론을 고려할 때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인물들을 제외한 국민당내 야권 인사들과 민주당파 인사들은 투옥되거나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또한 당내의 숙청과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며 장제스로 대표되는 중앙 권력은 정점에 달하였고 이는 광서파(계계파), 광동파[17], 산서파(염계파), 운남파(전계파)등의 지역 군벌 기반의 파벌들의 자연스러운 소멸을 야기하였다.
중국국민당 내의 일부 자유주의 파벌과 좌익 파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반장(反將) 파벌이 말살당하고 친장(親將)파벌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되자 이는 결과적으로 친장파 파벌들의 분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구 국민혁명군의 파벌, 즉 군벌에서 장제스의 의중을 읽고 빠른 속도로 국민당의 파벌로 전환한 천청의 토목계와 허잉친의 황포계, 장제스의 친위세력인 천리푸의 CC단(중앙구락부)와 다이리의 부흥계[18], 장췬을 영수로 하는 비교적 느슨하고 온건한 행정 관료과 일부 민간출신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학계와 장제스 총통의 아들인 장징궈를 중심으로 하는 태자당(太子黨)이 주요 파벌로 존재하였고 이외에도 쑨커를 중심으로 하는 당내 온건주의적 원로들의 모임인 온화파와 쑹메이링을 중심으로 하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경제 카르텔 세력[19]인 국모파, 후스 등의 자유파 인사들을 추종하는 젊은 개혁 세력인 민권계와 왕징웨이 등으로 대표되는 당내 좌파인 민생계등이 기타 파벌로 존재하였다.
당내의 야권 포지션인 민권계와 민생계, 국모파와 온화파를 제외한 나머지 6개 주요 파벌들은 장제스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면서도 총통 아래의 차석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정쟁을 벌였다. 당초 가장 유력하던 파벌은 천청의 토목계와 허잉친의 황포계, 천리푸의 중앙구락부였으나 전자는 1965년 천청의 서거로 인하여 구심점을 잃었고 후자는 천청의 사망 이후 당의 최대 파벌로 부상하였으나 1968년 제1차 전민항쟁 당시의 실책으로 인하여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두 파벌의 몰락 이후 잠시동안 허잉친의 황포계가 당권을 잡았다. 그러나 장제스가 아들인 장징궈를 이미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상황에서 장징궈는 장제스의 전폭적인 신뢰아래 허잉친의 황포계를 "구태세력"으로 몰아가며 실각시켰고 관료 중심의 정학계와 쑨커의 온화파와 연합하여 당권을 잡았다. 당권을 잡은 장징궈와 태자당은 반대파들을 숙청하며 절대 다수파의 지위에 올랐고 결과적으로 1970년대부터 장징궈의 사망 시점까지 장징궈와 태자당은 국민당을 주도하게 되었다.
장제스의 사망과 민주화 정국
첫 야당 생활
장쩌민 시대
롄잔 vs 쑹추위
마잉주 시대
다시 야당으로
2028년 총선거 이후
2028년 총통 선거에 출마한 시진핑 후보가 현직 총통 후춘화에 의하여 58.31% 대 40.33%로 20%p 가량의 차이를 벌리며 2024년에 이어 참패하였다. 또한 리창 주석 체제로 진행되었던 25대 입법위원 선거 역시 범람연맹이 도합 700석도 안되는 의석을 얻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시진핑 후보와 리창 주석에 대한 책임론이 거세지고 있다.
계파
중국국민당의 계파 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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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국민당에는 크게 3가지 파벌이 존재한다.
- 청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장완안 주석 중심의 개혁파
- 롄잔 전 행정원장, 마잉주 전 총통의 노선을 따르는 롄성원 부주석 중심의 보수파
- 국군퇴제역인원당부, 일명 "황푸싱당부"를 기반으로 한 왕후닝 입법위원 중심의 강경파
개혁파는 현재 국민당의 당권을 잡고 있는 파벌로 난샹권(南上圈)이라 불리는 수도권과 대도시의 청년층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다. 2020년대 이후 급부상한 파벌로서 계보 상으로 이들은 리덩후이 전 관선 난징시장과 왕진핑 전 입법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상하이방 내의 개혁파로부터 이어지고 있다. 국민당의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파에 비해 사회·문화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을 보이며 경제적으로는 좀 더 노동친화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보수파는 국민당의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파벌로 국민당의 주 지지층인 중국 남부와 서부 지역을 주 지지층으로 삼는 파벌이다. 장쩌민 총통 이래 국민당의 주류를 점하고 있으며 롄잔 전 행정원장, 주룽지 전 행정원장, 우방궈 전 주석, 마잉주 전 총통 등의 국민당 주요 인사들을 배출해 왔다. 보수파 내부적으로는 롄잔 전 행정원장의 아들인 롄성원 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롄계(連系)와 비롄계(非連系)로 나눠지며 대부분의 보수파 인사들은 전자에 속한다. 이들은 사회·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면모를 보이며 경제적으로는 실용주의를 표방하나 비교적 기업 친화적·관료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국민우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강경파는 시진핑 전 저장성장과 왕후닝 입법위원을 중심으로 한 파벌로 수도권보다는 지방의 청년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계보상으로 이들은 하오보춘 전 주석과 린양강 전 부총통, 위무밍 전 행정원장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국민당 연선을 전신으로 하고 있으며 2010년대 경에는 훙슈주 전 주석을 중심으로 계파를 유지하였으나 마잉주 총통의 지지로 성장한 시진핑이 2018년 이후로 국민당의 당권을 잡으며 크게 성장하였다. 이들은 종종 "극우"라고 불릴 정도로 보수적인 사회 정책과 외교 정책을 지지하며 급진적인 중화사상을 표방하며 지방의 빈곤한 청년층으로 부터 지지를 얻으며 2020년대 내내 국민당의 당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2028년 총선거에서 대패한 이후에는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 ↑ Chinese Nationalist Party라는 표현도 복수 영문명으로 지정되어있다.
- ↑ 병음에서 성조기호를 뺀 "Guomindang" 이라는 표현도 매우 드물게(주로 중국 내에서 나온 논문 등) 쓰인다.
- ↑ 홍중회, 중국동맹회, 국민당(1912년) 등도 있으나 당의 직접적인 전신은 중화혁명당이다.
- ↑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의 민생주의부터가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 ↑ 초기 중국국민당은 한족 중심의 공화국 설립을 지향하였으며 장제스 생전까지만 하더라고 "중화민족"이나 "만족공화"와 같은 이념들은 유명무실하였다. 민주화 이후에는 중화민족주의라는 일종의 시민 내셔널리즘으로 입장을 선화하였다.
- ↑ 반장제스 성격이 있다.
- ↑ 남의사 등 유사 파시즘적 성격도 있었다.
- ↑ 후스를 비롯한 소수 리버럴들
- ↑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쑨원, 장제스와 달리 후한민과 왕징웨이는 반기독교 성향이 있었고 특히 리쭝런의 광서파는 극렬한 반기독교 성향이었다. 이들은 기독교마저도 제국주의 침략의 산물이자 유교/이슬람 질서에 반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 ↑ 과거에는 중도 ~ 중도좌파 성향의 당원들도 다수 존재하였으나 대부분 중국혁명당으로 빠져나갔다.
- ↑ 지역구 n석, 비례대표 n석
- ↑ 지역구 n석, 비례대표 n석
- ↑ n도 n석
- ↑ 지역구 n석, 비례대표 n석
- ↑ 지역구 n석, 비례대표 n석
- ↑ 포스터 속 인물은 중국국민당 주석 장완안.
- ↑ 다만 광동파 일부는 쑹칭링에 의탁하여 미약하게나마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이들은 차후 왕징웨이의 개조파와 함께 중국혁명당으로 이어진다.
- ↑ "중국판 친위대"로 악명높은 삼민주의역행사, 통칭 남의사의 전신인 "중화민족부흥사"에서 따온 이름으로 1970년대까지 이 조직의 존재가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명칭이 아닌 당내 소수의 지칭이었다.
- ↑ 이른바 4대 가족이라는 단어로 대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