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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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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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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표 (조선의 장단) ] | : 본 타임라인에는 한국의 정치적 사건, 혹은 본 세계관에서 한국과 관련을 갖는 문서만을 서술함. |
1910년대 | 경술국치 · 3.1운동 · 상해임시정부 |
1920년대 | 국민대표회의 · 진호합작 |
1930년대 | 수양동우회 사건 |
[ 세계관 소개 ]
[ 세계관 소개 ]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만이 되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맘으로만이 되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가 단결하여 싸우되 마지막 핏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싸워야 되옵니다. – 김규식 (1881~1962) – [ 목록 바로가기 ] [ 허브 문서 바로가기 ] |
개요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중국 상하이 인민정부대례당에서 개최된 한국의 독립운동 계파 간의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 모인 국내외 단체의 대표들은 새로운 임시정부을 수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상세
1923년 1월 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민국로(民國路)의 미국인 예배당에서 첫 회의가 열렸으며 1923년 6월 7일까지 총 74차례의 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 71개, 지역 23개 대표 125명이 참석해 공론과 공결을 통해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과 운동노선을 세울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4]
국민대표회의의 대표는 자격심사를 거쳐 뽑았는데 대표로 확정된 인원은 국내·상해·만주 일대·북경·간도 일대·노령(연해주)·미주 등지의 대표 124명이었다.
창조파(신채호)와 개조파(안창호), 그리고 현상유지파(김구, 이동녕)의 대립이 있었다. 임시정부의 존속을 주장하는 김구, 조소앙, 이동녕 등이 모조리 불참하였기에 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립파를 주축으로 한 이들이 부상하며 정치력 영향력을 확대하고, 김구가 김철수를 암살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자,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양자 간 합의에 도달하였으며, 기존의 임시정부를 대체하며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군사조직을 통할하는 천진임시정부이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지 않는 타협안에 불만을 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5]
배경
임시정부 내 갈등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
국민대표회준비회
국민대표회의 개최
임시정부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탈퇴
결과
천진임시정부 수립
- ↑ 위 사진에는 현 시점 가장 큰 진보정당만을 기재한다.
- ↑ 위 사진에는 현 시점 가장 큰 민주당계 정당만을 기재한다.
- ↑ 위 사진에는 현 시점 가장 큰 보수정당만을 기재한다.
- ↑ 김구의 백범일지 등에 따르면 소련 정부가 지원한 20만원의 자금으로 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했지만, 근거는 부재하다.
- ↑ 소련이 이들을 승인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만의 임시정부라 조선민족을 대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정통성이 천진임시정부에 있다고 판단했고, 둘째로 적백내전을 막 끝낸 소련의 입장에선 이들을 소련 영내에 두면서까지 일본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