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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열조 의황제 (한나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개요
1897년 태어나 1926년 중순 즉위하여 1970년 죽을 때까지 재위한 열조 의황제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즉위 이전
출생
1897년(광무 원년) 10월 20일 경운궁 숙옹재에서 고조 태황제와 순헌황귀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8월 8일 의정부 의정서리 탁지부대신 조병식 친왕봉호망단자(親王封號望單子)를 고조에게 올렸고, 궁내부대신 서리협판 윤정구는 황자의 정명단자(定名單子)를 상주하여 은(垠)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8월 1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이은을 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하며 금책과 금인, 칠장복을 하사하였다.
1902년에 대한천일은행(지금의 우리은행 제2대 은행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를 보좌하기 위한 부장에 내장원경 이용익이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은 영친왕 명의로 16주를 인수하고, 8,000원을 자본금으로 납입함에 따라 총회에서 대주주인 영친왕이 은행장으로 추대되었다. 영친왕을 은행장으로 세운 것은 은행의 창립 초기에 기반을 확실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대한천일은행은 한성의 유력 상인들이 주도하고, 고조가 내탕금 3만원을 지원하면서 설립되었다. 영친왕의 은행장 취임과 더불어 주주와 자본금이 크케 늘어나 1901년에 주주가 24명에서 1905년에 51명으로 증가하였고, 자본금 56,000원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1906년 12월 7일부터 수학원에서 강학을 받았고, 이듬해인 1907년 3월 11일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관례가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