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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틀:대한민국 중추원의 원내 구성 (개화)대한민국 중추원 大韓民國 中樞院 General Board of State Legi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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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 단원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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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 | 190N년 |
중추원의정 | |
중추원참정 | |
서기장🤔 | |
중추원의원 | d |
여당 4nn석 (5n.n%) | |
국민의당 4nn석 자유당 nn석 | |
야당 3nn석 (4n.n%) | |
사회민주당 nn석 민국혁신당 nn석 노동자대중전선 nn석 신민당 nn석 녹색당 nn석 | |
주소 | |
링크 | | | |
개요
중양이
대한민국 중추원 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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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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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N대 중추원 의정 박중양 朴重陽 | Bak Jung-y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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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2년 5월 3일 | ||||||||||||||||||||||||||
조선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現 대한민국 경기도 양주시 양주동) | |||||||||||||||||||||||||||
사망 | 1960년 4월 23일 (향년 87세) | ||||||||||||||||||||||||||
한성부 종로구 민국대학교병원 | |||||||||||||||||||||||||||
본관 | 밀양 박씨 | ||||||||||||||||||||||||||
국적 | 조선 (1872~1892) → 대한제국 (1892~1895) → 대한민국 (1895~1960) | ||||||||||||||||||||||||||
재임기간 | 대한민국 제N대 중추원 의정 | ||||||||||||||||||||||||||
19NN년 N월 NN일 ~ 19NN년 N월 NN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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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국의 정치린이자 관료. 제N대 중추원 의정을 역임했다.
생애
사상 및 견해
소속 정당
비판 및 논란
각주
탐라
만총2
바오구안청 양이천 한광 한광 자오더쥔 자오더쥔 뤼핑 뤼핑 천쥔성 영 천쥔성 천쥔성 한주빈 한주빈 쉬친 쉬친 원시전 팡웨이중 왕진샨 왕랸정
만주 총리
1946
화평
1947
화평-자유-대동
1948
자유-노동-대동-추풍
대동-자유-노동
1951
협진-자유-대동
1953
화평-노동-자유
노동-화평-자유
거국내각
1957
노동-자유-대동
1959
협화
.
HHH
틀:만주 입법원의 원내 구성 (개화)ㄴ협화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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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명 | 協和黨 |
만문명 | ᡥᡡᠸᠠᠯᡳᠶᠠᠨ ᡥᠣᡴᡳ[1] |
영문명 | Concordia Party |
창당일 | 1937년 모월 모일 |
주석 | 류궈중[2] / 5선 장칭웨이? |
부주석 | 쿵쉬안유 / 6선 |
의원단장 | |
비서장 | |
이념 | 보수주의 (만주) 만주 내셔널리즘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우익[3] |
입법의원 | 338석 / 600석 (56.3%) |
성급의회의원 | 652석 / 1262석 (51.7%) |
현급의회의원 | 1677석 / 4584석 (36.6%) |
당색 | 청록색 (#007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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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색 (#00C5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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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수 | 13만 6천 명 |
국제조직 | 국제민주연합 |
청년조직 | 청년협화당 |
당기 | |
공식 사이트 | |
SNS | | | | | |
개요
협화당은 만주의 보수주의 정당이다. 현존하는 만주 정당 중 역사가 가장 길다.
59년 체제를 성립해 1959년부터 장장 38년간 집권하였으며, 59년 체제 붕괴 이후로도 리버럴 세력에 비해 전반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다. 현재 입법원 단독 과반을 확보하여 집권중이며, 당주석 겸 총리는 류궈중이다.
역사
성향
협화당의 이념과 성향으로 꼽히는 것에는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신보수주의, 가부장적 보수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만주 내셔널리즘 등이 있다.
황제주권주의를 옹호하는 보수 왕당파 정당이다. 한 설문조사에서는 협화당 지지자의 97%가 황정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강력한 보수주의 성향을 띤다.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며, 공동체의 유교적 윤리와 문화적 기반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관점을 지닌다. 낙태와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며 전통적 가족 가치관을 지지한다. 다만 계파에 따라 온도차가 있다. 또한 만주어의 제2국어화를 통해 만주 국민주의를 부흥시켜 민족적 가치관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성향의 강경우파부터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온건 중도파까지 넓은 스펙트럼으로 퍼져 있다.
외교적으로는 강한 친한 성향을 보이며 극동의 경제적 통합과 공동방위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반중, 반소 성향도 있지만 계파에 따라 그 농도가 상이하다. 미국과 서방 세계에는 기본적으로 지지도 적대도 아닌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지만 서구 세계가 만주의 인권 문제나 강력한 황제권을 지적하면 "내정간섭"이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비친다.
59년 체제 당시 협화당에는 중도파가 상당히 거대한 주류 계파로 존재하였으나 중도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자유당 계열의 보수자유주의 계파가 59년 체제 붕괴 당시 만주신당과 민본당 등으로 이탈하면서 현재 당에 엄밀한 의미의 중도주의 계파는 당내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 또한 협화당은 풀뿌리 민주주의나 대중주의와는 거리가 먼 엘리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따라서 일반적인 의미의 극우 포퓰리즘도 당 내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내부 계피
- 온건보수주의, 가부장적 보수주의
- 자유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 보수주의, 국민자유주의
- 보수주의, 빅텐트
- 국민보수주의, 만주 내셔널리즘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옥균's 내각
현장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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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파 SDPK Fieldists | 중추원 평등사회 포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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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일 | 1990년대 중반[4] |
1999년[5] | |
전신 | 영암계 |
거산계 (일부) | |
표어 | 답은 현장에 있다! |
의정 | ㅇㅇ |
좌장 | 김문수 |
역대 총리 | 김철 / 제23대 • 1972~1973[6] 김문수 / 제30대 • 2007~2016 |
이념 | 사회민주주의 구좌파 반신자유주의 좌익 내셔널리즘 사회보수주의 보호무역주의 자국우선주의 (김철 독트린)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좌익 |
중추원의원 (사민당 의석) |
93석 / 285석 (32.6%) |
외곽조직 | 평등사회연대 |
유관단체 | 전국노동조합총연맹 전국농민회총연맹 |
개요
현장파는 사회민주당의 내부 계파이다. 보수적 사회민주주의 및 좌익 내셔널리즘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사회민주당 좌파로 통한다.
역사
성향
지지 기반
현장파의 핵심 지지기반은 노조다. 한국의 양대 노조 중 강경파로 분류되는 전국노동조합총연맹(전노총)의 지지를 받는다. 덕분에 현장파는 전노총의 조직력을 쏠쏠하게 활용하고 있는데, 대규모 장외 집회나 지방선거 등에서 전노총의 조직력이 현장파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현장파도 이에 맞춰 전노총의 요구를 상당수 수용하며 전노총 주도의 파업이 단행될 경우 앞장서서 달려가 지지를 표한다.
전통적으로 공단이 있어 블루카라 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울산, 대구, 원산 같은 지역에서의 지지율이 높다. 또한 사민당의 소규모 자영농 지원과 농산물 수입 제한 정책 덕에 농촌 지역에서의 득표율도 성당히 높으며,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지원을 받는다. 이외에도 좌익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들과 일부 환뽕단체(…)로부터 지지받고 있다.
역대 수장
현장파 역대 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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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이름 | 임기 |
0 | 김철 박용만 예춘호 |
1990년대[7] |
1 | 백찬기 | 1999-2001 |
2 | 장기표 | 2001-2002 |
대행 | 김문수 | 2002-2002 |
3 | 이재오 | 2002-2006 |
4 | 김문수 | 2006-2018 |
5 | 추미애 | 2018-2022 |
6 | 김기현 | 2022- |
굵은 글씨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인물 |
타 계파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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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파
새길파
아이신기오로
금위대
은항
어떻게 된 거야 무서워
네놈들의 지도는 망했어!
감독선생
민국정보
한국의 진보 정당 | |||||
(창당) | → | 녹색당 | → | (현재) | |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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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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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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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대안의 숲, 전환의 씨앗 |
영어명 | Green Party Korea |
약칭 | 녹색, 녹 |
창당일 | 1976년 모월 모일 |
영임 | 박용진 / 4선 |
원무총사 | 하승수 / 4선 |
사무총사 | 김경준 / 3선 |
정책위의정 | 이정미 / 재선 |
대변인 | 박지현 / 초선 |
이념 | 녹색 정치 진보주의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좌익 |
중의원 | 20석 / 805석 (2.5%) |
도부의원 | 46석 / 2720석 (1.7%) |
당색 | 녹색 (#599848)
|
당원 수 | 16만 명 |
청년조직 | 녹색당 청년회 |
청년조직 | 녹색발전소 |
국제조직 | 글로벌 그린스 |
유관단체 | 녹색연합 |
공식 사이트 | |
SNS | | | |
개요
대한민국의 생태·진보정당. 현재 중추원 원내 6당이자 제4야당이다.
1976년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의 주도로 자유당 좌파(사상계)와 사회민주당의 환경주의 파벌이 갈라져 나와 창당되었다.
당 상징
당 로고
당가
역사
성향
지지 기반
지도부
계파
- 녹연계: 녹색연합 출신의 인사들로 구성된 계파. 녹색당 창당을 주도한 세력이자 전통적 당권파이다. 생태주의를 표방하며 환경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지만 기타 이슈에 대해서는 대중파에 비해 온건한 편이다. 녹색당 의원단 내에서의 최대 계파이다. 현 원무총사인 하승수가 소속되어 있다.
- 대중파: 환경운동 외의 진보운동을 하던 인사들로 구성된 계파. 녹연계에 비해 경제, 사회적 이슈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18], 사회민주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선호한다. 의원단 내에서는 녹연계에 밀리지만 대중적 지지도는 더 높다. 현 영임인 박용진이 대중파 소속이다.
- 연대: 사회자유주의, 리버럴 페미니즘 성향의 소수계파.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문제에 관심이 많다. 사민당 새길파에 우호적이다.
- 녹색좌파: 생태사회주의와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당내 좌파이자 비주류 계파. 신좌파로 분류되며 노동자대중전선에 우호적이다.
당 기관
녹색연구소
다른 정당과의 관계
국민의당
사회민주당
선거 결과
각주
민국정보2
틀:대한민국 중추원의 원내 구성 (개화)민국혁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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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명 | Minguk Hyeokshindang, MH |
한자명 | 民國革新黨 |
약칭 | 혁신당, 혁신, 혁 |
창당일 | 2010년 모월 모일 |
영임 | 민국 / 5선 |
원무총사 | 박춘식 / 7선 |
사무총사 | 오경덕 / 4선 |
정책위의정 | 성채원 / 3선 |
이념 | 한국 내셔널리즘 우익대중주의 국민보수주의 |
스펙트럼 | 우익 ~ 극우, 혼합정치[19] |
중의원 | 21석 / 805석 (2.6%) |
도부의원 | 43석 / 2720석 (1.2%) |
당색 | 파랑 (#152484)
|
보라 (#5A1B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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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006464)
| |
당원 수 | 33만 명 |
국제조직 | 무소속 |
청년조직 | 청년혁신당 |
공식 사이트 | |
SNS | | | |
개요
대한민국의 민족주의 급진우파 정당. 현재 중추원 원내 4위의 정당이자 제2야당이다.
명칭
- 영어 : Minguk Hyeokshindang, MK
- 중국어
- 정체자(번체자) : 民國革新黨
- 표준중국어 발음
- 한어병음 :
-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법 :
- 한국어 한자음 :
- 우크라이나어: Мінґук Хьокшиндан
- 우크라이나어의 외래어 표기법 : 민구크 효크신단
영어 당명이 다른 정당들과는 달리 독특하게도 한국어 당명의 발음을 그대로 영어로 옮긴 것이다. 이는 민국혁신당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기인한다고 알려져 있다. 영어 당명이 영어 화자가 읽기에는 워낙 어색하고 어렵기 때문에 영어권 언론에서는 보통 영어 당명의 이니셜을 딴 'MK' 혹은 'MK Party'라고 부른다.
역사
성향
지지 기반
민국혁신당의 가장 큰 지지기반은
지도부
계파
타 정당과의 관계
국민의당
국민의당 |
---|
사회민주당
사회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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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결과
각주
건빵
개요
한국군의 전투식량에 관해 설명하는 문서.
역사
19세기
한국군은 20세기 이전까지는 전투식량이라는 개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장거리 작전에 나가는 병사들이 떡이나 쌀가루 등의 전근대적인 휴대용 식량을 사용했다고 추정될[20] 뿐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전투식량은 건뻥이었는데, 이는 중국의 의화단 반란 당시 한국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서재창[21] 당시 정령이 일본군이 건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상부에 건의해 도입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서재창과 통역무관 서기학 참위 사이의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서재창: (일본군 병사들이 건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 이보게, 서 참위. 일본군 무관한테 저 병졸들이 먹고 있는 저 전병처럼 생긴 것이 무엇인고 하고 한 번 물어보게. 서기학: 예, 연대장 각하. (일본군 무관에게 일본어로) 저 병사들이 먹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본군 무관: 아, 칸판(乾パン)이라는 거요. 빵을 여러 번 구워 물기를 완전이 빼낸 보존식이오. 서재창: 서 참위, 저 무관이 무어라고 하던? 서기학: 아, 그게… 마를 건 자에… 어… 건빵이라고 하덥니다. |
서재창은 ‘건빵’에 대해 조금 더 조사한 뒤 군용 식량으로써의 건빵의 가치를 다룬 보고서를 본국에 제출했다. 파병된 병력의 식량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군무성은 이 보고서를 눈여겨보았고 건빵 생산을 결정한다. 1900년 가을, 건빵공장이 평안북도 정주에 완공되었고 그곳에서 한국 최초의 전투식량인 건빵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빵을 섭취한 일선 병사와 간부들의 평가는 최악이었다. 이전까지는 건빵은 고사하고 근대적인 전투식량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한국에서 생산한 건빵이었던 만큼 당연하게도 딱딱하기 그지없었고 맛도 없었다. 병사들은 이 딱딱하고 맛없으며 어찌어찌 먹는 데에 성공해도 퍽퍽해서 물을 들이켜야 하는 이 음식을 매우 싫어했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별사탕을 도입해 건빵과 함께 제공하면서 그나마 먹을 만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여담으로 서기학이 즉석에서 만들어낸 ‘건빵’이라는 단어로 인해 서양의 빵(bread)이 한국어로 빵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
시베리아 전쟁 중 1호 전식을 먹는 육군 정교 (1920.7.17) |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한국군은 건빵 이외의 전투식량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끝없는 참호전으로 인해 참호 안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이 필요했던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한국군은 1차 세계대전 중에는 기껏해야 독일령 칭다오 공략전 등에만 참여했다. 이로 인해 한국군은 가급적이면 야전취사 마차를 통해 장병들에게 따뜻한 밥과 국을 제공하되 그럴 여건이 안 될 때에만 전투식량을 섭취하면 됐고, 이런 목적으로는 건빵과 별사탕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1차 세계대전이 심화되면서 유럽에서의 참상이 전해지자 한국군도 본격적인 전투식량의 생산 필요성을 인식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그렇게 개발된 것이 야전전투식량 1호, YJS-1이다.[22] 통칭 1호 전식이라고 불린다. 1호 전식은 건빵과 염장고기(콘비프), 구운 콩, 말린 생선, 고춧가루와 약간의 설탕과 소금으로 구성되었고, 한 끼에 약 1천 칼로리로 하루 세 끼 기준 약 3천 칼로리의 열량을 냈다.
한국군이 개발한 전식의 진가는 1918년 개시된 시베리아 전쟁에서 입증되었다. 동시베리아의 혹독한 날씨와 빨치산의 습격으로 한국군 장병들은 제대로 된 취사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 때 야전전투식량은 병사들의 소중한 한 끼 식사가 되어주었다. 당시 참전용사들의 회고에 따르면 1호 전식은 맛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먹을만 했고, 전식 덕분에 다분한 노력의 필요와 빨치산의 기습 가능성을 유발하는 취사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 소대원들은 보초조를 제외하고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일제히 연갈색 전투식량 봉지를 꺼내어 들었다. 소대장이 취사 대신 전투식량을 섭취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밥을 하려 불을 피웠다가는 인근의 좌익 빨치산들의 이목을 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소대장은 말했다. 처음 먹어보는 전식의 맛은, 설명할 길이 없지만 그저 그랬다. 못 먹을 맛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맛이 좋지도 아니하였다. 건빵은 씹기 전에는 딱딱하고 씹은 후에는 퍽퍽해서 먹기 힘들었지만 별사탕, 염장고기과 함께 먹으니 그나마 괜찮았다. 구운 콩과 동태에는 고춧가루를 뿌려 먹었다. 그렇게 전식으로 꼬박 다섯 끼를 떼웠다. 쌀밥과 국이 그리웠다. 박진순 중추원 의원, 당시 육군 상병 |
박진순의 증언에서도 확인되듯이 1호 전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시베리아 전쟁에 파견된 병사들이 야전취사 마차가 들어서지 못하는 지역에서도 1호 전식의 건빵과 염장고기 대신에 따뜻한 쌀밥과 김치를 먹고 싶어했던 것. 이에 한국군은 쌀밥이 포함된 2호 전식(YJS-2)을 개발해냈다.
2호 전식의 내용물로는 백미와 함께 고기, 콩, 나물 캔과 말린 다시마와 말린 생선 그리고 간장, 된장, 고추장, 녹찻잎이 있었다. 이와 함께 일선 부대에는 찬합에 밥을 하거나 차를 끓여 마실 수 있게[23] 소형 스토브와 연기가 나지 않는 고체 연료가 지급되었다. 다만 병사들이 그리도 먹고 싶은 했던 김치는 산성 때문에 기술의 한계로 포함되지 못했다. 2호 전식이 1921년 초부터 보급되면서, 국군은 1호 전식과 2호 전식을 혼용했다. 2호 전식은 스토브를 사용해 간단함 취사를 할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1호 전식은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섭취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제3차 극동전쟁)
춘천 전투 직후 3호 전식을 먹는 육군 의무관[24] (194x.x.xx) |
1호 전식을 대체한 3호 전식(YJS-3)은 1933년에 대공황 속에서 개발되었다. 3호 전식은 1호 전식에 비해 조금 더 사람 먹는 것 같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염장고기가 사라졌고 그 대신 고기죽 캔, 비빔밥 캔, 고추장과 정수제가 추가되었다. 일선 장병과 간부들 사이에서 이빨분쇄기라고 불릴 정도로 딱딱했던 건빵이 개량을 통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등 몇 가지의 사소한 개선도 있었다. 이밖의 내용물은 대체로 1호 전식과 비슷했으나 여러 면에서 조금씩이나마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훨씬 더 다양한 메뉴가 추가되어 3개 종류의 식단이 개발되었어야 했지만 대공황으로 인한 가혹한 군축때문에 대폭 깎인 예산으로 근근히 군대를 유지해야 했던 국방성은 비용 절감을 위해 여러 메뉴를 삭제했고 식단도 단일 종류로 줄였다. 결국 제3차 극동전쟁 초기 국군 장병과 무관들은 예상되었던 것보다 훨씬 부실한 전투식량을 섭취해야만 했다.
20세기 후반
현재
종류
평가
충주원
파일:대한민국 중추원 휘장.svg 대한민국 중추원 大韓民國 中樞院 General Board of State Legi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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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여권 | |
3NN석 영임 | 유승민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우익 | |
파일:자유당 로고 반전 (개화).svg 62석 영임 | 이광재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우파 |
3석 영임 | 원희룡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중추원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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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루 프라이즈
당
녹우크라이나의 보수주의 정당 | ||||
창당 | → | 진보당 | → |
진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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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명 | Партія прогресу[27] |
영어명 | Progress Party (of Green Ukraine) |
창당일 | 1917년 |
해산일 | 1931년 (신설합당) |
후신 | |
이념 | 보수주의 (녹오) 국민주의 (녹오) 경제적 자유주의 반공주의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우익 |
당색 | 청회색 (#475885)
|
당원 수 | 1만 9천 명 (해산 직전) |
선거연합 |
개요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 시기에 존재했던 혁명적 민족주의 성향의 우익 정당. 강력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함께 사회보수주의, 반공산주의, 기독교(특히 정교회) 가치 보호 등을 추구했다. 주요 인물로는 녹우크라이나 제헌위원회 의장과 제9대 총리를 역임한 베네딕트 야코벤코가 있다.
상세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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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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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미콜라 레온티요비치 유나키우 Микола Леонтійович Юнаків | ||||||||||||||||||
출생 | 1871년 12월 6일 | |||||||||||||||||
러시아 제국 하리코프 현 즈미요프 군 | ||||||||||||||||||
국적 | 러시아 제국 →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 우크라이나 극동공화국 | |||||||||||||||||
사망 | 1931년 8월 1일 (향년 59세) | |||||||||||||||||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 볼로디스히드 | ||||||||||||||||||
묘소 | 녹우크라이나 성 안드레아 국립묘원 | |||||||||||||||||
임기 | 제3대 녹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 |||||||||||||||||
1925년 5월 ~ 1928년 8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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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그리고 녹우크라이나의 군인. 제3대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생애
평가
여담
- 프로필 사진은 우크라이나 인민군 시절 찍은 것으로, 옷깃의 계급장은 소장 계급장이다.
각주
누군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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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모졸레우스키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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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이반 빅토로비치 모졸레우스키 Іван Вікторович Мозолевський | ||||||||||||||||||||||
출생 | 1862년 4월 1일 | |||||||||||||||||||||
러시아 제국 체르니히우 현 흘루히우 군 툴리호로보 마을 | ||||||||||||||||||||||
국적 | 러시아 제국 → 녹우크라이나 | |||||||||||||||||||||
사망 | 1935년 1월 10일 (향년 72세) | |||||||||||||||||||||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 볼로디스히드 | ||||||||||||||||||||||
묘소 | 녹우크라이나 성 안드레아 국립묘원 | |||||||||||||||||||||
임기 | 제2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 |||||||||||||||||||||
1926년 4월 1일 ~ 1930년 3월 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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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녹우크라이나의 의학자, 민족주의 운동가이자 정치인. 제2대 녹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녹우크라이나의 국부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생애
1919년의 모졸레우스키 |
여담
소속 정당
소속 정당 | 기간 | 비고 |
---|---|---|
1917 - 1931 | 창당 | |
1931 - 1935 | 합당 |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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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탕
국대
인구 최라
- 볼로 312 31
- 프리 326 32
- 모바 257 25
- 티흐 272 27
- 우수 211 21
- 하바 255 25
- 하카 225 22
- 스보 283 28
- 아무 189 19
- 이미 27 3
- 사할 85 9
- 비라 146 14
- 제이 123 12
- 우다 172 17
- 부레 106 11
- 추미 15 2
- 3,004 301
녹오 대학
- 볼로 성 일라리온, 볼로
- 프리 프리, 육군, 국방, 슬로
- 모바 모바, 항공, 공군, 모바 의과, 모바 농과, 유리, 프코
- 티흐 티흐, 해군, 해양, 즈나 공과, 아드, 야폰
- 우수 우수, 이만 의과
- 하바 하바, 과기
- 하카 하카, 트하 공과
- 스보 스보, 자유, 스보 공과
- 아무 아무, 코노
- 사할 사할
- 이미 이미 민족
- 비라 비라, 문화예술
- 제이 제이
싱뭉
- 민국신문 : 보수, 이승만 계열
- 경향신문: 보수, 천주교 계열
- 대한매일신보: 중도보수, 안창호 계열
- 경성신문: 중도 자유주의, 개화당 계열
- 만세보: 중도, 천도교 계열
- 대한중앙일보: 증도진보, 사민당 계열
- 노동신문: 진보, 전노총 계열
피카레스크 단편선
그는 한국의 거대 기업들이 증오스러웠다. 자국의 재벌들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한국에서 온 기업들은 그 정도가 심했다. 적어도, 자국의 재벌들이 버는 돈은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의 돈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기업들은 오로지 우리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한국 본토로 방출할 뿐이었고, 현지의 경제개발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뼈빠지게 일해봤자, 가족들의 생계는 나아질 구석이 보이지 않았고 한국인들의 배만 채워줄 뿐이었다. 이반 탈리스넨코의 일기 (가제) by 에러 |
캄캄한 어둠 속, 차가운 돌과 흙 사이. 장스쥔은 깊이 들이마신 공기가 검은 먼지로 가득 차 있음을 느꼈다. 막장 작업을 끝마친 뒤에도, 탄광의 무겁고 답답한 느낌은 그를 계속해서 짓눌렀다.
거울 앞에서 분진이 까맣게 앉은 얼굴을 문지르며, 그는 어린 시절 그의 소학교 선생이 알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짐 크로. 그것은 거울 속 남자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일이 끝나면, 곧바로 노동자들은 일곱 평 남짓하는 방에 몸을 뉘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은 잠시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씻어내지 못한 분진이 그를 불태울 듯한 불안감이 들었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더이상 마적떼도, 군량을 요구하던 군인의 무리도 없었으나, 그와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것들을 잃어버렸다. 어느새부터, 그들은 중국인이지만 중국인이 아니게 되었다. 그가 누운 일곱 평 방에는 이부자리를 깔고 같이 누울 아내도, 이야기를 들려줄 아이들도 없었다. 그의 아내는 럭키의 공장이 폐기물을 간수하지 못해서 보상금 몇 푼만을 남기고 떠나갔다.(모순적이게도, 그는 결국 그 돈의 일부로 럭키 치약을 샀다.) 그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는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스쥔은 생각하는 방법을 잊었다. 신문도 더이상 펼치지 않았다. 고향의 풀꽃 향기는 갱도의 흙내음에 덮여 더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by 키네 |
김 정위, 그는 장래를 촉망받는 젊은 공군 무관이다. 또한 한국의 우방인 자유 월남을 보호하고 공산 비적떼를 소탕하는 정의의 전쟁에 참전한 자랑스러운 국군의 용사이기도 하다.
오늘은 베트남에서의 그의 첫 실제 작전이 있는 날이다. 그의 팬텀기로 향하는 길, 월남의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파일럿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늠름하게 걸어가는 그의 시선을 잡은 것이 있었다. 활주로 한켠에 광고판처럼 생긴 커다란 판때기에 하얀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쓰인 표어였다.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주월한국군도정인 채명신 정령의 글귀였다. 잠시 후 김 정위는 그의 애마, 아니 팬텀기에 올라탔다. 그는 조석의 정면부를 가득 채운 복잡한 계기판을 조작하며 이륙 준비를 마쳤다. 계기판 한켠에 걸린 사진. 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갓난이기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 있는 김 정위의 아내와 아이였다. 마지막으로 김 정위는 사진 옆에 붙어있는 작전명령서를 다시 한 번 흝었다. <공습 목표, 위도 ○○○, 경도 ○○○의 큰 촌락. 김 정위의 육중한 전쟁기계는 중력을 무시하듯 하늘 높이 두둥실 떠올랐다. by 쿠리오 |
화려하게 가로등의 불빛이 반짝이고, 구두들의 또각거리는 소리,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상가들은 물품을 들이는 민국에서 제일가는 문명개화의 도시, 한성부.
그 도시에서도 가장 빈곤한 자들이 모여있는 외방에서, 그는 인력거를 모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가,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저 봉천의 고향을 떠나와 이 한국 땅에 온지도 5해가 흘러간 어느 날이였다. 그날은 청주의 메스꺼운 악취가 양장에 잔뜩 배여있던 어느 꺼우리(한국인)신사를 태우고 가던 날이었다. 허나,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 꺼우리 신사는 좌석이 흔들리는 감이 보이자, 이내 역정을 내며 그에게 조선어로 무어라 욕설을 퍼부었다. 애써 인력거를 끝까지 밀어 목적지까지 가려 했지만, 거체가 꺼떡대는 소리가 이내 흙바닭을 긁으며 거세지더니, 끝에는 인력거가 뒤집어졌다. 마치 비틀어진 닭의 목처럼 맥없이 옆으로 넘어진 좌석에서 일어선 꺼우리 신사의 얼굴이 분노와 취기로 새빨개졌다. 이내 신사는 그 기름이 흐르는 손이 들고 있던 지팡이이를 꽉 움켜쥐었고,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 지팡이는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이가 부서지면서, 그는 살이 깎이는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무자비하게도, 그를 때리고, 또 때리고, 그의 옷이 핏방울로 수를 놓고 천연두에 걸린 곰보처럼 흉하게 변할때까지, 그의 몸을 내리친 지팡이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꺼우리 신사는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을 보이며, 투덜거리는 듯 이내 밤길로 사라졌다. 소리를 듣자하니, 경관 몇몇이 그에게 다가온 모양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은 구두를 신은 경관들의 발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경관들의 발은 분주히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얻어맞아 흉하게 뭉개진 얼굴에서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애써 고통으로 쉬어버린 목에서 고통에 잠긴 신음소리를 흘려 보낸 그였지만, 몸을 기댄 흙바닥은 겨울철의 얼음처럼, 그의 품에 서늘한 냉기만을 안겨주었다. 예전에, 그는 혼란에 잠긴 중국 땅을 떠나와 아예 봉천에 눌러앉기로 작정했었다. 새벽녘에 집을 떠나는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꼭 반드시 건실히 정착하여 돈을 보내드리겠다, 라는 편지를 부모님께 남기고 도망치듯 산해관과 헤이룽장의 험한 벌판을 건너, 여정 5달만에 봉천에 도착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작심한 바와는 달리 마주한 현실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주 제 1의 도시인 봉천은 분명 그를 기다렸지만, 그 실체는 왕도정치가 이루어지는 지상의 낙토나 동북 제일의 현대식 도시가 아니였다. 단지 욕망의 불꽃을 끝없이 피우며 그를 위해 종속된 생명의 불꽃을 굴뚝으로 올려보내 검은 연기를 피우는, 마치 귀신들린 용광로와도 같이, 무수한 생명을 재물삼아 더 많은 쇠를 만들어내는 강철의 도시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였다. 그는 그곳에서 달아났다. 달아나서, 이 자칭 낙토를 세우고 기획하였다는 조선 땅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최소한 이 용광로보다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렇게 나진에 도착했고, 얼마 간 탄광에서 막노동을 한 끝에, 운 좋게도 한성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by 유동닉 |
- ↑ 발음 : 후와리얀 호키
- ↑ 만주국 총리대신
- ↑ 서구 언론에서는 우익이라고 분석하지만 만주 국내에서는 중도우파로 인식된다.
- ↑ 회파 형성
- ↑ 중추원 의원연구단체 등록
- ↑ 김철은 총리 재임 당시에는 현장파 소속은 아니었다.
- ↑ 현장파가 정식 중추원 의원연구단체로 등록되기 전
- ↑ 회파 형성
- ↑ 중추원 의원연구단체 등록
- ↑ 국무총리를 역임한 거산 김영삼이 이끌던 계파
- ↑ 김철은 총리 재임 당시에는 양산파 소속이었다.
- ↑ 12.0 12.1 회파 내 구성원들의 의견에 편차가 있어 사회적 이념이 명확하지 않다.
- ↑ 현장파가 정식 중추원 의원연구단체로 등록되기 전
- ↑ 아이신기오로 성씨 사용 시작
- ↑ 발음 : 만주 투림파 방크
- ↑ 국무원 소속이 아니며 따라서 내각이나 수상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
- ↑ [1]
- ↑ 물론 환경문제 역시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 ↑ 정치적으로는 극우에 가까운 성향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보호무역과 복지확충 등의 좌파적 정책을 지지한다.
- ↑ 개화 이전의 전투식량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추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 ↑ 서재필 총리의 동생이다.
- ↑ 야전의 첫글자 Y, 전투의 첫글자 J, 식량의 첫글자 S를 따와 만든 단어로, 대부분의 국군 장비의 제식번호가 이런 식으로 붙여진다.
- ↑ 전선에서 끓여 마시는 차는 일종의 기호식품으로서 병사들의 사기 증진의 효과와 동시에 더러운 물을 끓여 마셔 질병을 예방하는 기능도 있었다.
- ↑ 부위 계급장을 달고 있다.
- ↑ 최화학, 장세용과 공동 수상
- ↑ 박남규 등 3명과 공동 수상
- ↑ 발음 : 파르티야 프로흐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