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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제국 주급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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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자치주 퀘벡 자치주 État autonome du Québec Autonomous State of Québe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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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me souviens 나는 기억하노라 | |||||||
주도 | 퀘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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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도시 | 몽레알 | ||||||
면적 | 1,542,056km2 | ||||||
인구 | 835만 6,851명 (2017년) | ||||||
인구밀도 | 5.98명/km2 | ||||||
GDP | 총 | $6,361억 7,363만 9,226 | |||||
1인당 | $76,126 (2016년) | ||||||
시간대 | GMT-05:00 | ||||||
주지사 | 필리프 쿠야르 (재선) | ||||||
주의회 | 19석 | ||||||
17석 | |||||||
3석 | |||||||
1석 | |||||||
1석 | |||||||
국회의원 | 5석 | ||||||
3석 | |||||||
1석 | |||||||
상징 | 주조 | 흰올빼미 | |||||
주목 | 자작나무 | ||||||
주화 | 붓꽃 | ||||||
지역번호 | 438 | ||||||
ISO 3166-2 | AE-QC |
개요
미국의 자치주.
미국의 모든 특별행정지역중 가장 그 규모가 크다. 미국에서 특별행정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1,200만명 가량인데 그중 거의 3/4 가량인 830만여명이 퀘벡에 모여살고있다. 또한 북부 지역중에서 그나마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중 하나로, 지리상 북부로 분류되는 4개의 주[1]의 인구중 92%가 퀘벡주의 거주자이니 그만큼 퀘벡주가 큰 주임을 알 수 있다.
영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다른 미국의 지역과는 달리, 퀘벡은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속한다. 누벨프랑스 식민지 이후 현재까지 프랑스의 정체성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주민 대다수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제1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문화적인 정체성이 독자적인 편이다.
역사
분리독립 운동
자유 퀘벡 만세!
1967년, 퀘벡을 방문한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은 퀘벡을 방문하던 도중, 그 옛날 파리 해방때가 생각난다며 자유 퀘벡 만세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게 된다.
Vive Montréal ! Vive le Québec ! 몽레알 만세! 퀘벡 만세! Vive le Québec... libre ! 자유... 퀘벡 만세! Vive le Canada[2]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 |
이 연설로 한동안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단교 직전까지 몰렸지만, 오랫동안 영국계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아온 프랑스계 퀘벡 주민들은 환호하였으며 이 연설은 1960년대 퀘벡 분리독립운동을 촉발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10월 위기
1970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극좌 독립단체 "퀘벡 해방 전선"(FLQ)이 영국의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와 퀘벡주의 부지사인 피에르 라포르테를 납치하는 일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FLQ는 1963년부터 활동한 조직이었으며 드골의 자유 퀘벡 연설 이후 퀘벡인들의 집단 봉기를 촉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사건이 10월 5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른바 10월 위기라고도 하는 사건이다.
10월 5일 크로스가 납치된 후, 10월 11일 라포르테까지 납치되자 제국 정부는 12일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FLQ의 조건은 인질과 정치범을 교환하는 것이었으나 제국 정부가 거절했다. 상황이 어지러워지자 한 기자가 당시 퀘벡주의 주지사를 맡고 있던 피에르 트뤼도에게 상황이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피에르 트뤼도 주지사는 Just watch me라는 대답을 남겼고, 이는 모든 미국인들이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어록중 하나가 된다.
트뤼도 주지사에게는 퀘벡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을 출동시킬 권한이 없었기에 실질적 군 통수권자였던 리처드 닉슨 총리에게 퀘벡 지역을 상대로 계엄령을 선포해달라는 비밀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닉슨 내각은 이를 민주주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트뤼도 총리는 당시 황제였던 에드워드 2세에게 직접 편지를 써, 군 통수권자인 황제가 퀘벡 지역을 향한 비상 계엄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황제가 인가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영토 내에서 내각의 동의 없이 황제와 주지사의 독단으로 한 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진 사례가 생겨났다.
물론 황제와 주지사가 독단으로 내린 것은 아니고, 당시 퀘벡 내에서는 계엄령을 바라는 여론이 높았으나 닉슨과 트뤼도의 소속 정당이 달랐기에[3] 정치적인 목적으로 견제하려고 국가 안보 상황을 이용한다는 비판이 거셌기 때문에 여론을 믿고 황제와 트뤼도 주지사가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주지사를 탄핵해야한다니, 황제의 권력을 제한해야한다느니 등 각종 논의가 튀어나왔으며 일련의 사태는 현재까지도 입헌군주제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과 주의 권한 등을 두고 첨예하게 벌어지는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하여간 이 전례 없는 사태로 인해 퀘벡 내에서는 계엄령이 내려졌고, FLQ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명령도 내려졌다. 11월 27일, 라포르테가 숲속에서 숨진채로 발견되었으나 테러범들 역시 상당한 인명 피해를 냈다. 이후 퀘벡 도처에서 FLQ와 미제국군간의 산발적 교전이 이뤄진 끝에 12월 5일, FLQ는 크로스를 석방하고 니카라과로 망명하였다.
독립 주민투표
한바탕의 소동 이후에도 독립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자, 마이클 두카키스 총리는 1988년 퀘벡의 독립 투표를 제안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퀘벡 독립을 반대한다는 답변이 높게 나왔기에 반대측이 압승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지만, 정작 투표함을 열어보니 50.6% 대 49.4%라는 살떨리는 표차로 겨우 독립이 부결되었다. 개표 초반에는 몽레알 외곽과 퀘벡 등 전통적으로 독립 여론이 높은 지역의 투표함이 열려 약 45% 대 55%로 독립 찬성이 앞서나가다가, 개표율 98%에서 고소득층이 다수 거주해 독립에 부정적인 몽레알 중심부의 개표함이 열리며 1%p 남짓한 표차로 간신히 독립이 저지된 것.
이 사건으로 두카키스 내각은 사실상 실각하였으며 1년 뒤의 총선에서 조지 H. W. 부시에게 총리직을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 H. W. 부시 다음에 총리가 된 빌 클린턴은 퀘벡에 대한 유화론자였다. 높은 퀘벡의 분리독립 지지 여론을 감안하여, 퀘벡에게 특혜를 부여하기로 결정했고, 2번째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주민투표의 내용은 독립을 하지 않는 대신 자치주라는 고도의 자치 권한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주와는 달리 주지사를 직접 선거로 실시하며, 중앙정부 지원금도 배로 늘어나는 안건이었다.
1995년 9월, 2차 주민 투표에서 자치주 찬성안이 83.1%로 가결되어 퀘벡주는 해체되고, 현재와 같은 퀘벡 자치주가 탄생했다.
분리독립 정당의 발흥과 현재
역설적으로 빌 클린턴 내각의 퀘벡 자치령 설립은 퀘벡인들이 단일된 정치 행동에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2차 주민 투표가 실시되기 약 6개월 전, 일부 중도좌파 성향 시민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퀘벡당이 설립되었다. 퀘벡당은 지지율이 5%에서 시작하였지만, 2차 주민 투표에서 주도권을 잡아 나가면서 지지율을 크게 올렸다. 그렇게 자치주의 첫번째 주의회 선거에서 퀘벡당은 총 35석중 27석을 휩쓸며 압도적 1당이 되었고 주지사 선거에서도 59.3%로 첫 직선 퀘벡 주지사를 선출했다.
그러나 퀘벡당의 선전이 독립 운동의 부흥을 의미하는건 아니었다. 오히려 퀘벡당은 중앙 정치계에 편입되면서 독립보다는 자치를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퀘벡의 민족적 자주성은 높아졌지만 반대로 독립 여론은 불식되었다. 이에 실망한 일부 당원들이 2007년 퀘벡 독립당이라는 당을 창당해 떨어져나갔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현재는 군소정당 이하로 미끄러졌다.
퀘벡당은 사회당과 연합해 현재까지 퀘벡 내에서 반독립, 친정부파를 대변하는 자유당과 양당 구도를 이루고 있다. 거의 30년간 이어진 두 당의 양당제는 퀘벡의 독립 열기를 온건한 방향으로 환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퀘벡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낼 수 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