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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유년기
1891년 6월 13일 새벽 3시 경 내의원에서 은언군의 후손인 진양군[1]과 백정의 딸이자 소실인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완화군[2] 이선의 양자로 출계하였으며, 1897년(건원 3년) 열조부인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며 양부 이선이 '완화군(完和君)' 군호를 받았고 1899년 완화군이 병으로 훙서하자 본래라면 은언군가의 6세손으로써 황족이 될 수 없던 선종은 운현궁의 사손으로써 현풍군의 작호를 받았으며, 1910년 황족 작위가 개편되자 현풍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종은 총명하고 생부 진양군의 사후 경은군과 함께 삼종지맥의 유일한 후손이었지만, 백정의 손자라는 혈통 탓에 은근히 황족들과 대신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이러한 선종의 외로운 유년기는 선종이 장차 양면적인 사상을 갖게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결국 수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선종은 고심끝에 자진하여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한다. 이 당시 조선의 무관 무시 풍조가 뿌리깊게 남아있던 대한에서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선종은 무관학교 초기에는 공부를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규정을 위반하고,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다가 황실 어른들에게 질책을 받은 이후 싸움을 접고 공부에 전념했다. 이 시기 선종은 권위적인 무관학교에 질려 진보주의를 탐독하다 점호때 적발되어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기도 하며 태자였던 목종에게 여러번 갈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종은 여러 금서를 탐독하고 자유주의자들과 서신으로 교류할 정도로 반항적이었다. 그럼에도 어찌저찌 우여곡절 끝에 우등생으로 졸업하였고, 1912년 육군 보병 참위로 임관하여 제1연대의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1913년 부위로 진급하였고, 이후 1914년 전쟁참모 양성과정인 전쟁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5년 정위로 진급하였고 1917년 황족으로써 명목상 수석 졸업하였다.
전쟁대학교 졸업 이후 원수부 총참모부로 전속되어 전쟁참모의 업무를 시작했다. 본래라면 다른 전쟁참모들처럼 야전 지휘관은 최소한으로만 근무하며 최상위 단위의 참모로 복무했어야 하지만 선종은 직접 황족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중대장 보직을 쟁취했고, 자진하여 서백리 출병에 참전하여 만주 횡단철도와 연해주 동해안, 심지어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 내륙 깊숙히까지 점령하며 전쟁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대규모 초토화 작전으로 자유시에서 적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유시 학살이라는 흑역사를 남겼다. 서백리 원정 직전까지만 해도 선종은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모습을 여럿 보여왔으나, 서백리 출병 당시 적군에 혐오감을 느끼며 사회주의를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서백리 출병 당시 선종과 함께 참전했던 육군무관학교의 선후배들은 적군의 전투력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적군과의 전쟁과 서백리의 광활한 환경에서 영향을 받아 핵심 전력을 기동화, 장갑화하여 장차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후진적인 당시의 제국군에서 이러한 제한은 받아들여질 턱이 없었다. 결국 이때 참전했던 선종과 김석원 지청천, 김홍일등의 소장파 무관들은 군의 현대화와 기동전, 총력전 체제, 중공업입국을 주장하는 독서회를 창설하였, 장차 독서회는 극명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선종은 1920년 본국으로 귀환하여 기동전을 연구하기 위해 창설된 제1전차대장을 맡아 대한제국 전차병과의 아버지로써 명성을 떨치디기 시작했다. 1921년에는 베를린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독일군의 전술을 공부하였는데,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던 독일의 혼란기를 직접 체감한 선종은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과, 정치적 냉소주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얻는다.
1922년 선종은 독일에서 참령으로 진급하였고 1924년 귀국하여 부령에 진급, 제1전차대가 확대된 제1전차대대의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시기 극명회는 영관급과 위관급에서 세를 넓혀갔다. 선종은 김홍일의 국방론을 바탕으로 총력전쟁국가 건설이라는 목표하에 극명회를 키워가기 시작했으며 실질적인 영수로 군림한다. 이후 1925년 총참모부로 전속되어 총참모부 군무부장에 보직되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 호전과 민병석 의정이 일본의 야마나시 군축을 본따 사남군축을 진행하자, 열 받은 선종은 소장파를 대표하여 군축의 부당함과 문민 관료들의 육해군 대신 임명에 반대하는 상소를 목종에게 상주하며 지휘계통과 문민통제를 모조리 무시하는 사고를 친다. 결국 요직인 군무부장에서 보직해임되자 격분하여 이딴놈들을 위해 복무할 수 없다며 사직을 청하고 꼬장을 부리다가 황족 중 최선임자이자 전직 좌파인 현풍공이 반 정부 야당인 헌정당과 접촉할 것을 우려한 목종의 설득으로 사직을 철회하고 다시 제1전차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이 시기 선종은 문민관료와 황실의 한심한 추태에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했으며, 제도적으로 총력전 국가를 건설하려는 온건 노선을 철회하고 대전쟁 시기 독일육군이 주도하는 총력전 체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사남군축의 내용대로 제1전차대대가 독립기갑연대로 승격하자 연대장 대리를 지내다가 1927년 정령으로 보직되며 정식 연대장이 되었고, 다시 총참모부 군무부장에 복직하였다. 이후 1929년 참장에 진급하였고, 시위혼성사단장이 되었다.
기사혁명과 황태자 책봉
1930년 원래부터 콩팥과 심장이 좋지 않았던 목종은 대공황과 헌정당의 총선 승리로 인한 충격, 연달은 정치적 혼란으로 건강을 크게 망쳤고 쓰러진다. 이에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으나, 태자 또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태자는 나름대로 부황의 지지를 얻어 의정원을 해산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하며 일시적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군비 삭감을 비롯한 대규모 긴축정책을 시행하나 군부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이 당시 군부의 불만은 극에 달했는데, 3.1 폭동 당시 군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목종은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전시에만 설치되던 원수부를 상설화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서백리 원정을 통해 군부의 팽창욕을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수부의 설치로 육해군의 총참모부와 총제영은 무력화되었고, 서백리 원정에서의 부진으로 군부 내의 불만은 가속화 되었으며 군 내부의 진급 적체를 해결하지 못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렇게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던 와중, 군비 삭감 및 대규모 군축이 확정되자 군부의 불만은 폭팔하게 된다. 1930년 11월 10일 자정 독립기갑연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황성일대 육군의 일부가 선종의 지휘 하에 조정 및 국가중요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기사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는 박정희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장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황성 인근으로는 황성 동부의 경성위수사령부, 황성 서부의 제30사단, 황성 남부의 제7사단 그리고 서경, 개성,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지방을 장악했다.
황궁과 황성방송국, 원수부, 육군부, 경무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의정 윤덕영이 머물렀던 의정관은 사태 초기 시위혼성사단에게 점거되었으며 황태자였던 이건은 사살되었다. 이후 선종은 오전 9시 경, 체포당한 윤덕영과 육군대신 박중양을 데리고 해군총제사 신순성 대징과 함께 경복궁에 있던 목종을 운현궁으로 이동시키며 강제로 혁명 지지와 계엄령 선포를 추인받는다.
이후 선종은 목종의 명의로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조정 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하며, 오후 8시를 기해 의정원, 중추원, 지방의원 등 의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로써 선종은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며 마침내 목종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조정, 의정원, 재판소의 역할을 포함한 국가의 전권을 손에 쥐게 된다. 다음날인 11월 10일 육군 부장에 진급하는 한편 경성위수사령관을 겸하여 황성의 모든 군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실권을 빼앗긴 목종은 나름대로의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죄다 극명회로 채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서 현풍공은 목종의 친위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극명회의 주도로 선종은 목종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하루라도 대통을 비울 수 없다며 혁명에 공이 큰 현풍공을 입적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1930년 11월 29일 현풍공은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이렇듯 모든 저항이 무위에 돌아가자 군부는 본격적인 선위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에 목종은 마지못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이후 퇴위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1930년 12월 12일, 목종은 군부의 압박과 대신들의 끈질긴 퇴위 강요에 끝내 못이겨 강제로 퇴위하고, 삼종지맥의 후손이자 백정의 외손자인 선종은 황위에 등극한다.
재위 초기
목종을 끌어낸 선종은 연호를 백선(白宣)으로 정하고 황제가 되었다. 즉위 직후 전통을 이용하여 미래를 개척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하며 입법권을 조정에 다시 귀속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1932년 대한국 국제를 폐자하고 흠정헌법인 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며 전제군주정을 재도입하고 언론검열을 강화하는 독재정치를 강화하는 한편 공족 제도를 폐지하고, 백정의 처우를 개선하는 진보적 정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