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솔피/4

솔피 (토론 | 기여)님의 2026년 9월 19일 (토) 16:38 판
[ 세계관 설명 ]
먼동이 터오고 헤어질 시간이면
다시괴로워서
남몰래 흘린눈물이
뺨을적시네
샬라
"나오미의 꿈"은 "대한제국이 공화국이 되었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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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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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선
개화기
대한제국
공화국기
한성정부
현대
대한국
[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2] 한사군은 조선사 포함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음
[3]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
주요 민족: 한민족 (예맥 · 삼한)
대한국
관련 문서
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대한국
大韓國 | Empire of Dai Han
국기(1897~1899년)
국기 국장
홍익인간
弘益人間
상징
국가 애국가
준국가 국기가
국화 무궁화
위치

1897년 10월 12일 ~ 1919년 4월 10일
칭제건원 이전 멸망 이후
대조선국 한성정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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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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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한반도 및 부속 도서[1]
수도 황성 한성부(皇城 漢城府)
면적 220,903㎢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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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추산)
17,420,000명 (1929년)
인구 밀도
78명/km² (1929년)
언어
한국어
종교
유교(성리학), 불교(대승 불교), 천도교,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무속
민족
한민족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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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준입헌군주 → 전제군주제
입법부 의정원
국가원수 황제(대황제[2])
역대 황제
초대 고조 (1897년 ~ 1919)
정부수반 국무총리
역대 국무총리 이상재 (19nn~19nn)
이동녕 (19nn~19nn)
안창호 (19nn~19nn)
이승만 / 국무총리 서리 (19nn~1929)
경제
통화 냥 (1894~1902)
→ 대한은행 원 (1902~1919)

개요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조선이 제국을 선포하여 세워진 한민족의 국가이자 전제군주제 국가로, 한국사에서 성립된 마지막 군주국이다.

대조선국의 대군주인 고종이 건양 2년(1897년) 칭제건원하여 황제를 선포하고 국호를 대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개칭하였다. 아울러 광무개혁을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수교국들의 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서양에서 조선국을 부르던 Korea에서 따 와 국제적으로 Empire of Korea로 불렸다.[3] 과거 고려 왕조가 역성혁명으로 무너져 조선 왕조가 개국했던 것과 달리 대한제국의 국체는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졌다.[4]

그러나 일본 제국으로부터 지속적인 간섭을 받았고,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이후 외교권과 경찰권을 차례로 강탈당했다. 이를 시작으로 군대해산을 거쳐 대한제국의 주권은 침해되기 시작됐다. 일본은 1904년 7월 20일에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을 만들어 치안권(治安權)을 빼앗은 데 이어 1904년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았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22일에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1910년 8월 29일에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멸망하였다.

국호

上曰: 我邦乃三韓之地, 而國初受命, 統合爲一。 今定有天下之號曰‘大韓’, 未爲不可。 且每嘗見各國文字, 不曰‘朝鮮’, 而曰韓者, 抑有符驗於前, 而有竢於今日, 無待聲明於天下, 而天下皆知大韓之號矣。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한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하여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나라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고조실록 고종 34년(광무 원년, 1897년) 양력 10월 11일 3번째 기사: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이하의 관리들을 인견하다
상이 이르기를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고조실록》, 1897년 10월 11일

정식 국호는 '대한국(大韓國)'으로, 대한은 삼한을 일컫는 다른 말이다. 기원전 9세기 주나라 선왕 시기에 추(追)와 맥(貊)을 복속해 북국을 다스렸다는 한(韓)후가 있고, 기원전 4세기 고조선의 군주가 한(韓) 씨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뺏긴 후 한지(韓地)의 군주가 될 때 한왕(韓王)을 자처하는 등 고조선의 군주를 뜻하는 말로 쓰인 한(韓)이 유래가 되었다. 이후 한(韓)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으로 불렸다. 마진변한이 사라진 지 이미 수백 년이 지난 삼국시대 후반부 당시에는 의미가 변형, 확장되어 고구려, 백제, 신라 셋을 삼한이라고 불렀고,[5][6] 이것을 통일신라와 고려가 통일할 때 스스로 삼한일통이라 했기 때문에 '한'은 한민족의 영역 전체를 의미하는 별칭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삼한이 원래 삼국시대 초반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여러 나라들을 의미했다는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밝혀졌지만, 관용적 용법은 계속 이어져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때까지 삼한이란 단어는 삼국=한국이란 의미였다. 의미 변화에 대해서는 삼한 문서 참조. 고종은 이 한(韓)을 정식 국호로 정한 것이다.

여러 별칭이 있는데, 대표적인 별칭으로는 '대한제국'이 있다. '대한국 국제'에서의 용례를 보면 알 수 있듯 대한제국은 정식 국호라기보다는 제국으로서의 국체를 강조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약칭으로는 '대한'과 '한국'이 사용되었는데, 현대의 대한국 약칭이 같다. 나라 이름은 '대한'이고, '제국'은 각각 황제국이라는 국체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강점 이후 한성정부 대한제국을 부정적 의미로 구한(舊韓)이나 구한국(舊韓國)으로 지칭하였으며, 한성정부 공문 및 편찬 사서나 교과서에 구한말(舊韓末)이라고 지칭하였다. 이때의 용어가 관습화되어 대한제국을 구한국으로, 대한국을 신한국(新韓國)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현대의 교과서에서도 구한국과 신한국으로 지칭하고 있다.

영어명인 Empire of Dai Han은 대한제국 정부가 초기 내세웠던 명칭이었고 외국 공사관에 요청했지만 이미 Korea가 한국을 뜻하는 말이 된 지 수백 년이 지난 터라 바뀌지 않았다. 결국 Korea(프랑스어 Corée/러시아어 Корея)를 수용하여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명칭은 당시 발행한 여권이나 우표에도 반영되어 있다.

한성정부는 3.1 혁명 이후 대한 및 한국이라는 용어를 금지하는 한편, 한반도와 부속 도서에 대해 전 국호인 조선으로 통칭하고 고조를 폐주 이형으로 격하하는 한편, 황실을 이왕실로 폄훼하였다. 그 예로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대한민보’는 ‘민보’로 ‘대한신문’은 ‘한양신문‘ 등으로 바꿔야 했고 바꾸지 않는 단체들은 전부 판매금지를 당했다.

한성정부기 대한과 한국이라는 국호는 철저하게 금지되었으나, 여러 복벽 세력에 의해 빈번하게 사용되었고, 6.10 궐기 후 다시금 대한이라는 명칭이 국호로 사용되게 된다.

국기

국가

국기가

국장

국새

국제

국가 제례와 오악

역사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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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부여
고조선[1]
단군조선 · 위만조선
진국 탐라 우산
원삼국​시대
한사군[2]
마한
변한
진한
낙랑
동예
옥저
고구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3]
신라
고구려 신라
남북국​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태봉
후백제
신라
고려
고려시대
고려
조선시대
조선
개화기
대한제국
공화국기
한성정부
현대
대한국
[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2] 한사군은 조선사 포함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음
[3]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
주요 민족: 한민족 (예맥 · 삼한)

틀:만주의 역사 (나오미)

3.1 혁명

한러일전쟁 이후 실권을 장악한 독립협회 계열은 무능한 고조를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특히 독립협회는 고조에 의해 이미 탄압을 받은 적이 있기에 더더욱 고조의 실권을 약화시키고 일본을 본받아 입헌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에 1906년 중추원을 중심으로 하는 입헌정치를 실행되며 대한제국에 최초의 근대적 입헌정체가 수립되었고 고조 말기를 광무헌정이라 칭한다.

광무헌정은 독립협회에서 이름을 바꾼 독립당이 주도하는 10년간의 기간이었고, 이 시기 한국에서 본격적인 식산흥업과 국민개병제를 통한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권을 빼앗긴 고조와 보수파는 점점 의회와 정당 정치에 강한 불만을 갖게 된다. 특히 권력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고종은 독립당이 결국에는 프랑스 대혁명처럼 자신을 끌어내고 공화국을 선포할 것이라는 의심을 10년간 감추지 못했다.

이에 고조와 황족, 보수파들은 비밀리에 정변을 준비하였고, 1918년 1월 무오정사를 통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고조의 정변으로 의왕을 비롯해 대피하지 못한 독립당 계열 인사들은 처형당했고 다시금 전제군주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훗날 미곡 폭동으로 알려지게 될 쌀의 가격 급등으로 인한 대폭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대두되었다. 1차대전을 거치며 협상국에 대한 수출이 폭등하자, 한중일 동양 삼국의 산업화가 빠르게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며 쌀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 이 시기, 고조는 일본의 쌀 폭등을 기회로 대일 쌀 수출을 증가시켰다. 결국 전국적으로 미곡 가격이 폭등하였고 특히 쌀의 수요가 급증한 한성의 싸전이 일제히 담합하여 미곡의 판매를 금해 미곡을 구입하지 못해 성난 군중들은 흥분하여 싸전 상인을 공격하며 미곡 폭동이 발생한다.

분노한 군중의 폭동은 점차 한성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조정은 심각성을 인지하여 경무청의 주도하에 무자비한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들불처럼 확산되었고, 결국 경무청 뿐만 아니라 군이 동원되었으나, 군경의 잔혹한 진압끝에 어린 소녀인 유관순과 김일성이 사망하며 전국적으로 저항이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매점매석에서 시작된 미곡폭동은 점차 입헌정치를 복구하라는 정치적 요구로 진화하였다. 이때 조정의 체포령에도 불구하고 은신하고 있던 이승만이 저항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은 잔존 독립당 세력을 규합하여 투쟁을 선포하였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개별적 저항인 미곡폭동은 3.1 혁명으로 진화하였다.

본래라면 충분히 초기에 진압이 가능했을 이 미곡폭동은 고조가 러시아와 협상국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3만여명의 시위대를 포함한 최정예병력을 아라사원정군으로 파병하며 진압에 실패했다는 것이 현대의 정설이다. 3.1 혁명으로 인해 조정의 지방 통제력이 붕괴하였고, 3월 중순에는 한성까지 저항이 거세어지게 되었고, 고종과 유력 황족들은 경운궁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사태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게 된다. 3.11일 제2차 경운궁 화재사건으로 고조와 태자와 영왕등의 유력 황족들이 화재로 사망하며 반정부 시위로 시작된 3.1 혁명은 뜻밖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훗날 공화국 정부는 이 화재를 전기시설의 합선에 의한 화재라고 발표하였으나, 온갖 음모론이 확산되었다. 결국 황실의 계승 서열이 붕괴되기에 이르렀고, 머리를 잃은 조정은 일거에 마비되었으며, 근황파의 저항의지는 완전히 일소되게 된다. 결국 민병석 의정은 진압을 포기하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이후 이승만은 의정이 되었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공화국 선포

임시정부는 헌법제정과 성인 남성에 대한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온건파의 주도로 시위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당 내 급진파에 의해 점차 공화국 수립에 대한 담론이 대두되었다. 본래 이승만 또한 헌정 실시를 목표로 하였으나, 황실이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황실을 경멸하던 독립당의 세력을 규합하고 1919년 4월 23일 24인의 13도 대표자들이 경운궁 석조전에서 기습적으로 공화정 선포를 선언하였다.

13도 대표들은 선포문에서 “3 •1 민주혁명을 바탕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 대회는 민의에 기(基)하여 공화국을 조직, 약법(約法)을 제정하여 이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UPI통신의 전신)은 한성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이 시기 공화정을 선언하자 군부는 격앙되었다. 참모총장 한규설은 군을 동원하고자 하였으나, 한국의 혼란을 기회로 삼은 하라 내각은 이지용과의 교섭을 통해 공화국을 최초로 인정하였다. 또한 해군과 육전대를 인천 앞바다에 파견하여 제국군을 압박하였고, 결국 군부는 굴욕적으로 임시정부와 합의하게 된다. 참모차장 조동윤과 의정 이승만의 합의인 정동 각서가 공개된다.

정동각서에 따라 친위쿠데타 가담한 고위급 장교를 숙청하고 참모총장 한규설 대장이 강제예편되었으며, 군부는 공화국에 대해 굴욕적으로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리하여 장장 527년간 이어진 대한제국은 멸망하였으며 아시아 두번째 공화국인 한성정부가 선포되었다.

제2전선 음모론

공화국의 건국 직후 러시아에서 귀환한 아라사원정군은 공화국이라는 체제를 수용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규설 대장의 정변에 즉각 찬동하고 존왕양이를 외치며 귀환을 시도하였을 만큼 근황주의적 성향이 강하였으나, 일본의 무력시위로 조동윤 부장을 비롯한 군부의 수뇌부가 굴복하는 대 굴욕을 겪은 뒤 귀국하게 된다.

당시 아라사원정군은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으며, '우리가 러시아에서 피 흘리는 동안 본국에서 왕조가 무너졌다.'라며 역사적 죄책감을 가졌다. 또한 이들은 이러한 군부의 굴욕을 지켜보며 충격에 빠졌다. 이들의 이런 심리적 공황상태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극대화 되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제1전선(동부전선)에서 분전의 대가는 제2전선(국내정치적 혼란)에서의 내부의 적에 의해 훼손되었다며 군부 내에서 시작된 제2전선 음모론은, 점차 민간 사회로 퍼져 근황 세력에 의해 발전되어 "정치적 패전"이라는 수사로 탈바꿈되었다. 이들은 한성정부를 사실상 외세의 농간으로 성립된 허수아비 정부로 간주하였고 이들에 의해 제2전선 음모론은 정치적 패전 음모론으로 진화하였다.

결국 이 음모론들은 군부와 극우 세력의 핵심적인 주장으로 진화하였고, 6.10 궐기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군부에 의해 대한국의 공식적 역사관으로 진화했다.

정치적 혼란

공화국 멸망

정치

정당

대조선 헌법

정부 형태

행정구역

군사

정치

외교

조일관계

조중관계

조소관계

조미관계

대중매체

관련 문서

둘러보기

  1. ↑ 간도 및 연해주 일대의 경우 고조 대한제국-청 국경 분쟁과 대한제국-러 국경 분쟁이 존재하고 있다.
  2. ↑ 대한국 국제나 수호 통상 조약 등에서 사용되는 표현.
  3. ↑ 조선이 Korea로 불린다는 사실은 전기 조선 시기부터 조정에서도 인지하고 있었는데 서양에서 조선을 자신들이 무너뜨린 고려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에 황당해 했다. 이는 사실 서양과 동양의 국호 관념이 다르기 때문으로, 동양의 국호는 곧 왕조와 같지만 서양에선 국호는 지역, 민족 느낌이 강하고 왕조와는 별개이다. 따라서 서양에선 왕조가 바뀐다고 지역이나 민족이 바뀐 건 아니니 과거에 그 지역의 이름이라고 각인된 '고려'로 조선을 계속 부른 것이다. 대한제국은 자국의 국호를 Empire of Dai Han으로 불러 줄 것을 각국에 요구했지만 당시 국제 사회에서는 과거부터 통용되던 국호인 Korea를 따와 Empire of Korea 또는 Korean Empire로 표기했다.
  4. ↑ 이로 인해 대한제국을 조선의 연속선상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며, 한성정부에서는 아에 고조를 조선의 26대 군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5. ↑ 마진변한에 포함되지 않는 고구려인의 묘지명에서 스스로나 고구려인을 삼한이라고 부르는 금석문 자료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변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진 묘지명, 고현 묘지명 등이 있다.
  6. ↑ 또한, 당대 중국(당)도 고구려 출신인 연남생에게 변국공(卞國公) 작위를 주었는데 이를 통해 확장/변주된 삼한론에서 마한→백제, 진한→신라, 그리고 가야의 멸망으로 인한 변한의 공백을 고구려에 대입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