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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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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공화국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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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태연합 정상회의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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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공화국 제8-10대 총리 차히아깅 엘벡도르지 Цахиагийн Элбэгдорж | |
출생 | 1963년 3월 30일 |
몽골인민공화국 허브드 아이막(주) 제레그 솜(군) | |
국적 | 몽골 공화국 |
거주지 | 몽골 울란바타르 |
직업 | 정치인 |
현직 | 몽골 공화국 총리 몽골 민주당 대표 |
임기 | 몽골 공화국대의회 부의장 |
1996년 5월 ~ 2000년 5월 | |
몽골 문화교육부 장관 | |
2006년 7월 ~ 2007년 4월 | |
몽골 공화국 부총리 | |
2007년 4월 ~ 2009년 8월 | |
몽골 공화국 총리 | |
2013년 1월 ~ 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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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몽골 (아름다운 나라)의 총리. 민주당 내각을 이끌고있다.
생애
성장기
1963년, 몽골 인민공화국 서부 허브드 주에서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81년부터는 에르데네트에 있는 구리 광산에서 기계공으로 일했고 1982년, 몽골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엘벡도르지는 군사신문에 시를 써서 보냈고 재능을 인정받아 소련에서 유학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대대적인 개혁을 거듭하고 있었고, 엘벡도르지는 몽골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민주파 청년 정치인
귀국 후, 엘벡도르지는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인민혁명당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민주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동중국에서 중국국민당의 독재 체제가 민주혁명으로 붕괴하자 민주화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마침내 1991년, 정부가 개헌과 민주화를 약속하자 엘벡도르지는 동료들과 민주동맹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1992년 총선에서 야권은 분열로 인해 인민당에게 과반을 내주었고 엘벡도르지가 속한 민주동맹은 전체 150석 중 단 17석만을 획득하였다. [2] 하여간 엘벡도르지는 당선되기는 하였고 민주동맹 부대표의 자격으로 당대표와 함께 다른 민주파 정당들과 교섭, 1994년에 통합 야당인 몽골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96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자 엘벡도르지는 2000년까지 공화국대의회 부의장을 맡았다. 200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하자 비대위원장을 맡았으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민주당 내각에서 문화교육부 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했다. 2009년 총선에서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민주당이 패하자 또다시 비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12년 당대표에 선출된 엘벡도르지는 2013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몽골 공화국의 제16대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
총리에 취임한 엘벡도르지는 PATO 가입을 추진했으나 야당인 몽골 인민당이 격렬히 반대했다.[3] PATO 가입을 위해서는 군사주권 일부를 포기해야 했기에 국회를 통과하려면 전체 의원 150인 중 60%인 90인 이상이 찬성해야 했으나 당시 민주당의 의석은 84석에 불과했다. 엘벡도르지는 PATO 가입을 보류하고 대신 한국의 오세훈 총통과 만나 군사원조를 약속받았다. 그런데 2014년 돈바스 전쟁이 터지면서 인민당 내에서도 PATO 가입에 찬성하는 계파가 생겨났고 엘벡도르지는 그 기회에 가입을 추진했다. 공화국대의회에서 찬성 91표, 반대 52표로 근소한 차이로 가결된 PATO 가입안은 국민투표에서 54%의 찬성으로 통과되었고 일련의 절차를 걸쳐 몽골은 2016년 최종적으로 PATO에 가입하였다.
2017년 총선에서도 그가 이끄는 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엘벡도르지는 무난하게 연임에 성공했다. 엘벡도르지 내각은 해외 투자 유치에 집중하여 경제 성장을 꾀했고, 이 시기 몽골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7% 내외로 높은 편이었다. 2019년경,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엘벡도르지 내각은 국경 통제와 대규모 선제 검사를 통해 초기 대응에 성공했다. 내각 재무부 장관이 부패 혐의로 구속되자 야권은 파상공세에 돌입했고 위기에 몰린 엘벡도르지는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엘벡도르지에 대한 재신임 투표였다. 이 선거에서 여론조사를 뒤집고 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엘벡도르지는 구사일생으로 총리에 유임되었다. 국민들이 엘벡도르지 내각의 경제 성장과 코로나 방역 성공을 고평가한 덕분이었다.
2021년 9월에는 홍콩에서 열린 아태연합 정상회의에서 한국의 유승민 총통, 동중국의 왕양 총통, 남베트남의 리따이헝 총통, 홍콩의 우치와이 총리 등을 만나 펜데믹 이후의 시대에 대해서 논의하고 더욱 강력한 경제 협력에 합의했다.
봉쇄 장기화로 경제침체가 계속되자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그러자 엘벡도르지는 2022년 5월 부터 마스크 착용을 제외한 봉쇄조치를 대부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전역에 동원령을 선포하자 엘벡도르지는 러시아군의 인구 비례 전사자가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에서보다 소수민족 거주지역에서 더 많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 정부가 몽골계 등의 소수민족을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2022년 12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원 횡령 사건인 석탄 게이트가 터지고 석탄 게이트에 그의 전현직 내각 관료 다수가 연루된 것으로 파악되자 지지율이 급락했다. 2023년 1월 3주 기준 내각 지지율은 34%로, 3주 전 대비 21%나 하락했다. 엘벡도르지는 사건에 연루된 장관들을 해임하고 공정한 수사를 약속했지만 지지율이 반등하지 않았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면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성향
전형적인 중도우파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온건 보수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며 아태 통합에도 적극적이다.
여담
-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거침없는 언사로 유명하다. 뉴델리 대학교 특강에서 학생들에게 "폭정은 영원할 수 없다"라고 하는가 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러시아가 몽골계 소수민족을 총알받이로 쓴다"라고 말하는 등 상당히 직설적인 발언을 자주 한다. PATO 가입을 반대하는 야당 의원에게 "러시아가 두려워 그러는 것이냐"라고 일갈한 적도 있다. 시원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반대로 불필요한 발언 리스크를 높인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대학교에서 언론학을 전공한지라 선전선동과 언론 플레이에 능숙하다. 특히 SNS 활용을 잘 한다고 알려져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을 보좌진이 아닌 본인이 직접 관리한다고도 알려져있다.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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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동맹 | 1991 - 1994 | 창당, 정계입문 |
1994 - | 합당 |
선거 이력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락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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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총선 | 제3선거구[4] | 민주동맹 | n표 (29.7%) | 당선 (2위) | 초선 |
1996 총선 | n표 (57.2%) | 당선 (1위) | 재선 | ||
2000 총선 | n표 (44.4%) | 당선 (2위) | 3선 | ||
2004 총선 | n표 (49.3%) | 당선 (1위) | 4선 | ||
2006 총선 | n표 (63.0%) | 당선 (1위) | 5선 | ||
2009 총선 | n표 (45.7%) | 당선 (2위) | 6선 | ||
2013 총선 | n표 (59.8%) | 당선 (1위) | 7선 | ||
2017 총선 | 비례대표 (1번) | n표 (49.6%) | 당선 | 8선 | |
2020 총선 | n표 (41.2%) | 당선 | 9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