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고증 無
대한민국 국무총리 | |||||||||
|---|---|---|---|---|---|---|---|---|---|
| 대수 | 이름 | 임기 | 정당 | 총선 | |||||
| 1 | 김옥균 (1851~1907) |
1884년 12월 17일 ~ 1896년 9월 13일 (11년 274일) |
개화당 | 1893 | |||||
| 2 | 이완용 (1858~1931) |
1896년 9월 14일 ~ 1899년 2월 22일 (2년 162일) |
개화당 | 1896 | |||||
| 3 | 황현 (1855~1920) |
1899년 2월 23일 ~ 1901년 4월 9일 (2년 45일) |
보국당 | 1899 | |||||
| 4 | 김홍집 (1842~1910) |
1901년 4월 10일 ~ 1906년 2월 9일 (4년 306일) |
온건당 | 1902 | |||||
| 5 | 박영효 (1861~1939) |
1906년 2월 10일 ~ 1912년 5월 27일 (6년 109일) |
개화당 | 1906 | |||||
| 1910 | |||||||||
| 6 | 유길준 (1856~1923) |
1912년 5월 28일 ~ 1914년 6월 6일 (2년 10일) |
개화당 | 1913 | |||||
| 7 | 서재필 (1864~1951) |
1914년 6월 7일 ~ 1918년 11월 18일 (4년 164일) |
개화당 | -[1] | |||||
| 8 | 이승만 (1875~1965) |
1918년 11월 18일 ~ 1925년 12월 28일 (7년 41일) |
대한국민회 | 1918 | |||||
| 1919 | |||||||||
| 1923 | |||||||||
| 9 | 파일:손정도 4-3.png 손정도 (1881~1931) |
1925년 12월 29일 ~ 1926년 3월 8일 (72일) |
대한국민회 | - | |||||
| 10 | 이상설 (1871~1933) |
1926년 3월 9일 ~ 1930년 3월 8일 (4년) |
자유당 | 1926 | |||||
| 11 | 양기탁 (1871~1938) |
1930년 3월 9일 ~ 1934년 1월 16일 (3년 311일) |
한인사회당 | 1930 | |||||
| 12 | 이동휘 (1873~1935) |
1934년 1월 16일 ~ 1935년 1월 31일 (1년 16일) |
한인사회당 | 1934 | |||||
| -[2] | 신채호 (1880~1936) |
1935년 2월 1일 ~ 1935년 4월 10일 (71일) |
한인사회당 | - | |||||
| 13 | 유동열 (1885~1950) |
1935년 4월 11일 ~ 1935년 5월 26일 (46일) |
한인사회당 | - | |||||
| 14 | 안창호 (1878~1947) |
1935년 5월 27일 ~ 1940년 7월 14일 (5년 49일) |
대한민주당 | 1935 | |||||
| 1938 | |||||||||
| 15 | 김창암 (1876~1953) |
1940년 7월 15일 ~ 1944년 11월 20일 (4년 128일) |
대한국민회 | -[3] | |||||
| 16 | 조만식 (1883~1954) |
1944년 11월 21일 ~ 1945년 7월 8일[4] (230일) |
대한민주당 | - | |||||
| 17 | 여운형 (1886~1979) |
1945년 7월 9일 ~ 1951년 8월 10일 (6년 32일) |
사회민주당 | 1945 | |||||
| 1947 | |||||||||
| - | 조용은 (1887~1958) |
1951년 8월 11일 ~ 1951년 10월 9일 (60일) |
사회민주당 | - | |||||
| 18 | 조봉암 (1898~1975) |
1951년 8월 11일 ~ 1957년 2월 10일 (5년 124일) |
사회민주당 | 1951 | |||||
| 1954 | |||||||||
| 19 | 윤보선 (1897~1975) |
1957년 2월 10일 ~ 1959년 6월 10일 (2년 123일) |
신한국당 | 1957 | |||||
| 20 | 장면 (1899~1981) |
1959년 6월 11일 ~ 1969년 9월 10일 (10년 92일) |
신한국당 | 1959 | |||||
| 1962 | |||||||||
| 1966 | |||||||||
| 21 | 김성주 (1912~1994) |
1969년 9월 11일 ~ 1969년 12월 28일 (109일) |
신한국당 | - | |||||
| 22 | 장준하 (1918~1987) |
1969년 12월 29일 ~ 1972년 6월 16일 (2년 200일) |
자유당 | 1969 | |||||
| 23 | 김철 (1898~1975) |
1972년 6월 17일 ~ 1977년 9월 4일 (5년 80일) |
사회민주당 | 1972 | |||||
| 1974 | |||||||||
| 24 | 김영삼 (1897~1975) |
1977년 9월 5일 ~ 1980년 9월 20일 (3년 16일) |
신한국당 | 1977 | |||||
| .. 대한국 총리대신 | |||||||||
hanin
| 한인사회당 | |
|---|---|
| 한문명 | 韓人社會黨 |
| 영문명 | Korean Socialist Party (KSP) |
| 창당일 | 1917년 5월 11일 |
| 전신 | 노동자협회 |
| 분리된 정당 | / 1935년 분당 |
| 해산일 | 1938년 9월 5일 |
| 후신 | 틀:대한공산당 (개화) (주류) 틀:국민사회당 (개화) |
| 역대 총리 | 양기탁 / 제13대 • 1930~1934 이동휘 / 제14대 • 1934~1935 유동열 / 제15대 • 1935 |
| 의장 | 이동휘 / 초대 박헌영 / 말대 |
| 이념 | • 1917-1935 사회주의 베른슈타인주의, 구조개혁주의 (사회당 우파) 혁명적 사회주의, 좌익민족주의 (사회당 좌파) 혁명적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박헌영계) 좌익민족주의 (유동열계) |
| 스펙트럼 | • 1917~1935 좌익 빅텐트 (중도~극좌) 좌익 ~ 극좌 |
| 국민의원 | n석 / n석 (n%)[5] |
| 당색 | 적색 (#B80000)
|
| 국제조직 | (1919~1938) |
개요
1917년부터 1938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정당.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역사
창당
20세기 초, 사회주의 성향의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민원에서 노동자협회라는 이름의 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노동자의 처우 개선, 근로기준법 제정, 노조 활동 방해 금지 등을 요구하였다. 노동자협회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운동을 벌였으나 별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에 노동자협회 지도부와 회원들은 조직화된 정당의 필요성을 느꼈고 1917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초대 의장으로는 노동자협회 회원 중 대중인지도가 가장 높은 이동휘가 추대되었다.
성장과 집권
급속도로 진행되는 산업화에 도시 노동자들의 수 역시 급속도로 늘었고, 사회당은 이들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했다. 1927년, 공장 관리진 측의 부당한 대우에 원산 노동자연합회가 파업을 총파업을 일으킨 원산 총파업 당시 당 지도부가 총출동하여 파업을 지원하며 그 세력이 급속도로 불었다.
1929년 이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한국의 경제가 깊은 침체에 빠지자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1930년 총선에서 과반의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제3당으로 굴어떨어지고 한인사회당이 대한국민회를 제치고 국민원 과반을 차지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민주적으로 집권한 첫 사례였다.[6]
총리로 선출된 이는 사회당 온건파의 거두 양기탁이었다. 양기탁 내각은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하고 노조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하지만 양기탁 내각은 농촌 문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7] 경제 정책 역시 이전 수권 정당들에 비해 상당히 투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동열, 김안산[8], 박헌영 등 사회당 급진파는 더 급진적인 시회주의 정책을 요구했고 대한국민회와 대한민주당, 그리고 자유당은 한인사화당이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집권 축하 편지를 받은 것을 문제삼아 사회당을 소련의 프락치 정당이라고 비난했다.
안팎의 압박에 결국 양기탁은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을 중재하던 이동휘가 당 의장에 추대되어 총리직에 취임했다.
분열과 쇠퇴
| 이동휘와 한인사회당 9기 지도부[9] |
이동휘는 당내외의 걱정을 뒤엎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고 1934년에 치루어진 13회 총선에서 한인사회당은 원내 1당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우 민족단결연맹의 약진으로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이 연립하여도 한인사회당의 의석수보다 적었기에 한인사회당은 내각구성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당만의 단독 소수내각을 꾸리기에는 국정운영의 차질이 불가피해 보였기에 이동휘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자유당과의 연정을 시도하였고 교섭 끝에 연정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35년 이동휘가 급사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급진파와 온건파 양측의 인정을 받던 이동휘가 시라지면서 한인사회당은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총리 대행을 맡았던 신채호와 당 부의장 김립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었지만,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급진파와 온건파 양쪽 모두로부터 불호를 받았기에, 김립은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인해 당 내에서 큰 힘응 쓸 수 없었고 결국 온건파와 급진파를 중재하는 데에 실패했다.
유일한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급진파와 온건파는 외나무다리 위에서 맞붙게 되었다. 양측은 차기 의장을 뽑을 전당대회에 사활을 걸었는데, 1935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치루어진 임시 전당대회에서 급진파의 지지를 받은 유동열이 온건파의 지지를 받은 조용은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의장에 선출되면서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이에 자유당이 반발해 연정 탈퇴를 선언하였다.
총리 선출 직후 민단련에 의해 발의된 내각불신임안이 민단련, 국민회, 민주당, 자유당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에 사회당 온건파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총리 유동열에게 타 정당들을 안심시키고 설득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탈당하겠다고 급진파를 압박했으나 사회당 급진파는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조용은, 안공근 등 온건파 인사들을 해당행위를 이유로 제명했고 이에 반발한 온건파는 집단 탈당 후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성향
역대 지도부
역대 한인사회당 당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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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결과
| 연도 | 지도자 | 의석수 (의석율) | 의석증감 | 지위 |
|---|---|---|---|---|
| 2000 | 몰?루 | 179 / 450 (40%) 33 / 100 (33%)
|
대의원 |
제1 야당 |
| 2003 | 145 / 450 (32%) 30 / 100 (30%)
|
대의원 |
제1 야당 | |
| 2005 | 슈켓 이민 | 192 / 450 (43%) 52 / 100 (52%)
|
대의원 |
제1 야당 |
| 2009 | 158 / 450 (35%) 39 / 100 (39%)
|
대의원 |
여당 |
각주
gaewha
| 개화당 | |
|---|---|
| 한문명 | 開化黨 |
| 영문명 | Reform Party (RP) |
| 창당일 | 1884년 12월 4일 |
| 전신 | 급진개화파 |
| 분리된 정당 | / 1918년 분당 |
| 해산일 | 1920년 7월 10일 |
| 후신 | |
| 역대 총리 | 김옥균 / 제1대 • 1884~1896 이완용 / 제2대 • 1896~1899 박영효 / 제5대 • 1906~1912 유길준 / 제6대 • 1912~1914 서재필 / 제7대 • 1914~1918 |
| 총재 | 김옥균 / 초대 서재필 / 말대 |
| 이념 | 자유민주주의 자유주의 급진개화 고전적 자유주의 입헌주의 |
| 스펙트럼 | 중도 ~ 중도좌파 |
| 국민의원 | n석 / n석 (n%)[10] |
| 당색 | 하늘색 (#B80000)
|
개요
1884년부터 1920년까지 존재했던 조선, 대한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정당.
역사
역사
성향
역대 지도부
역대 선거 결과
| 연도 | 지도자 | 의석수 (의석율) | 의석증감 | 지위 |
|---|---|---|---|---|
| 2000 | 몰?루 | 179 / 450 (40%) 33 / 100 (33%)
|
대의원 |
제1 야당 |
| 2003 | 145 / 450 (32%) 30 / 100 (30%)
|
대의원 |
제1 야당 |
각주
juksan
대한민국 국무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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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18대 국무총리 조봉암 曺奉岩 | Cho Bong-am | |
| 출생 | 1898년 9월 25일 |
| 경기도 강화군 | |
| 사망 | 1975년 3월 18일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
| 임기 | 제18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 1951년 8월 11일 ~ 1957년 2월 1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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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
생애
국무총리
1951년, 여운형이 본인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사민당에서는 차기 대표, 즉 국무총리가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임시 전당대회가 치루어졌다.
전당대회에 참가한 조봉암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는 현직 수석부총리인 조용은이었다. 53세의 조봉암은 자유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였고 64세의 조용은은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두 사람 다 조씨였기에 언론에서는 그 전당대회를 '양조대전'이라고 불렀다. 당시 전당대회는 여운형의 개인비서가 소련의 스파이로 체포된 것의 여파로 치러진 전당대회였기 때문에 당원들은 조용은보다 반공주의 성향이 짙은 조봉암을 더 선호했고 결선투표에서 57%를 득표한 조봉암이 사민당 대표에 선출되어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어록
| 우리들 자신이 더욱 민주주의 이념에 철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스며들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1953년, 전승절 8주년 기념 연설 |
김구 피살
| 김창암 피살 사건 金昌巖被殺事件 Assassination of Kim Chang-am | |
|---|---|
| ▲ 당시 조선일보 기사[11] | |
| 발생일시 | 1944년 11월 20일 시 분 경 |
| 유형 | 살인, 적색테러 |
| 발생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
| 피의자 | 김천호 (金天浩, 26세) |
| 동기 | ? |
| 피해자 | 김창암 제n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 ↑ 전시 (제1차 세계대전)
- ↑ 전임 국무총리 이동휘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한 국무총리 대행
- ↑ 전시 (제2차 세계대전 - 태평양전쟁)
- ↑ 국무총리대행: 1944년 11월 20일 ~ 1945 1월 21일
- ↑ 해산 당시 기준
- ↑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집권정당은 1924년 집권한 몽골 인민혁명당. 다만 민주적인 방법으로 집권하지 않았다.
- ↑ 한인사회당의 주 지지기반이 도시 노동자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인사회당 인사들은 농촌문제에는 무지했다.
- ↑ 러시아 이름은 김알렉산드라.
- ↑ 검은바지 콧수염이 이동휘. 앞줄 맨 오른쪽의 흰양복 흰바지가 부의장 김립
- ↑ 해산 당시 기준
- ↑ 기사 제목은 '김총리 급서에 각계애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