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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천제 國府遷濟 | Retreat of the Republic of Korea to Je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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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군수품을 운반하는 국군의 모습 |
개요
배는 6시 15분에 도착했다. 차가운 나무판자 위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군중들은 배가 선착장에 닿는 것을 보자마자 이성을 잃은 듯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나갔다. 선착장 위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울리고 줄이 쳐졌다. 하지만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로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에 부딪치는 하얀 물보라가 까맣게 변했다. 김동리, 「부산항」 中 |
조국해방전쟁에서 패한 대한민국 정부가 피난민 수십 만 명을 이끌고 1950년 X월 X일부터 약 2주간 제주도의 북제주군[1]로 수도를 옮긴 사건.
단군 이래 최대 이주 작전라고 불릴 정도의 대규모 수도 이전 사건으로, 2주의 시간 동안 약 40만명[2]의 부산 시민과 피난민들이 제주도로 내려왔으며, 건물 한 채라도 북괴의 손아귀에 들어가선 안된다는 취지 하에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관공서, 창고, 민가까지 모조리 불태워버려 이 당시 집을 잃은 이들의 수가 5만에 육박한다고 전해진다.[3]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국부천제 이후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 마냥 대만,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이 차례대로 공산화되기 시작했다.
배경
▲ 국부천제를 다루고 있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8월 12일 마산 전투의 패배를 시작으로, 다부동 전투, 영천·신녕전투에서 한미연합군이 크게 패하면서 대한민국의 생명선과도 같은 낙동강 전선은 9월 14일을 기점으로 조선인민군에게 완전히 돌파당하게 된다. 이 기세를 몰아 조선인민군은 달성, 함안, 군위, 영천, 대구에까지 입성하여 대한민국은 건국 3년만에 국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힐튼 워커 미8군사령관은 최후의 히든 카드로 남겨둔 New Korea Plan, 일명 신한국 계획의 실행을 이승만 정부에 제안한다.
과정
이주
초토화
조선인민군의 부산 입성
결과
국부천제 이후 대한민국은 2,000만 인구의 국가에서 순식간에 65만 남짓하는 인구[4]를 가진 조그마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국해방전쟁은 사실상 김일성과 조선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영향
대중매체
기타
관련 문서
- 국부천대 - 장제스와 중화민국 정부가 중화민국의 수도를 대만의 타이베이로 옮긴 사건. 국체는 존속할 수 있었던 제주와는 달리, 중화민국은 1950년 중국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