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쿠리오/4

김구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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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암 총리 피살사건
金昌巖總理被殺事件
Assassination of Prime Minister Kim Chang-am
▲ 당시 조선일보 기사[1]
발생일시 1944년 11월 20일 오전 7시 40분 경
유형 살인, 적색테러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피의자 김천호 (金天浩, 26세) 등 4인[2]
동기 대한공산당 잔여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기도
피해자 김창암 (제15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개요

1944년 11월 20일, 태평양전쟁 도중 대한민국의 제18대 국무총리김창암대한청년전위대 단원 김천호 일당에게 백주대낮에 살해된 사건.

전개

1944년 11월 20일,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날 역시 김창암 총리는 관저에서 나와 기자들과 짧은 질의응답을 하고 총리부 청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 앞에서 대기하던 관용차를 탔다.

차가 이동하던 중 다른 차 한 대가 김참암이 타고 있던 차를 들이박았다. 다행히도 김칭암 총리와 운전기사가 가벼운 부상을 입은 걸로 끝났고 사고 직후 두 명의 청년이 사고 현장에 모여든 인파 속에서 나와 차로 접근하더니 김창암 총리와 일행이 차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맙네, 자네들.
김창암이 자신을 도와준 청년들에게 한 말.[3] 이 말이 사실상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 순간, 그 두 명의 청년은 품 속에서 기관단총을 꺼내 김창암과 김창암의 보좌관인 선우진[4], 운전기사에게 총을 난사했다. 특히 암살범들은 김창암에게만 최소 30여 발을 쏘았다.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총격에 놀라 흩어지자 암살범들은 도망쳤다.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으나 김창암 총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김창암을 살해한 범인 2명은 도주하였으나 사건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장경찰들의 총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범인과 배후

경찰은 사살된 남자들의 지문을 통해 그들이 과거 대한공산당 산하조직인 대한청년전위대에서 활동하다가 수감되었었던 이들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곧 대한공산당을 사건의 배후라고 판단, 수사를 시작하였다.

영향

각주

치올코우스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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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올코우스키 전투
Битва за Ціолковський[5]
Битва при Циолковский[6]
▲ 파괴된 소련군 BA-3[7] 장갑차와 한국군 기관총부대
날짜 1936년 4월 11일 ~ 1936년 4월 29일
장소

지도를 불러오는 중...

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치올코우스키
결과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의 승리
영향 한소분쟁 일단락
소련의 전면전 준비
교전국
공격군
방어군
소비에트 연방의 기 소련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녹우크라이나의 기 녹우크라이나
지휘관
[ 펼치기 · 접기 ]
소비에트 연방의 기 바실리 블루헤르[8]
소비에트 연방의 기 니콜라이 페클렌코[9]
소비에트 연방의 기 그리고리 시테른[10]
소비에트 연방의 기 야코프 스무시케비치[11]
대한민국의 기 홍사익[12]
대한민국의 기 김좌진[13]
대한민국의 기 안창남[14]
녹우크라이나의 기 흐리호리 세메노우[15]
녹우크라이나의 기 헨리흐 류시코우[16]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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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7만 8천 명
전차 520대
장갑차 500대
야포 600문
항공기 700기
병력 6만 5천 명
전차 450대
장갑차 378대
야포 530문
항공기 830기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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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손실
사망 6천 5백 명
포로 2천 4백 명
부상 8천 명

◇장비손실
전차 283대
장갑차 216대
야포 134문
항공기 285기
◇병력손실
사망 2천 8백 명
포로 2백 명
부상 5천 9백 명

◇장비손실
전차 126대
장갑차 78대
야포 89문
항공기 233기
각주 [ 펼치기 · 접기 ]
  1. 기사 제목은 '김총리 급서에 각계애도'
  2. 실제로 암살을 실행한 인원 수. 준비와 계획 과정에 연루된 사람의 수는 더 많다.
  3. 보좌관 선우진과 운전기사의 증언.
  4. 성이 선우고 이름이 진이다.
  5. 우크라이나어
  6. 러시아어
  7. BA-6일 가능성도 있다. 사진만으로는 식별 불가. 둘의 차이는 차체 후방 문의 유무밖에 없어 구별이 무의미하기도 하다.
  8.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9. 소련 극동군 부사령관
  10. 소련 극동군 참모장
  11. 소련 극동군 공군사령관
  12. 주오한국군 총사령관
  13. 주오한국군 지상부사령관
  14. 주오한국군 항공부사령관
  15.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사령관
  16. 우크라이나 극동군 총참모장

개요

1936년 녹우크라이나 서북부 치올코우스키에서 벌어진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 대 소련군의 전투. 한-녹오 동맹의 승리로 끝나면서 연해주 지방의 분쟁이 잠시동안 멈췄다.

배경

연해주는 역사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제정 러시아의 후신인 소비에트 연방이 당연히 연해주의 주인이어야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
만주녹오는 대한의 입술이다. 순망치한, 입술이 없으면 시린 법이다.
이승만

러시아는 해양 진출을 위해 대대로 부동항을 손애 넣고 싶어 해왔다. 극동에서 러시아가 보유하고있던 항구 중 그나마 가장 부동항의 가까운 항구도시는 연해주 프리모리예 지방의 볼로디보스토크[1]였는데, 러시아 내전 이후 한국일본이 연해주 지방에 완충지대를 두기 위해 극동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건국한 녹우크라이나를 지원하자 녹우크라이나 영토가 된 볼로디보스토크를 상실했다. 이에 소련은 부동항을 확보하고 극동에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녹우크라이나를 병합하려 하였다.

한국의 입장에서 녹우크라이나는 일종의 방파제였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한 한국 정부는 국민회, 자유당, 사회당, 민주당 내각을 가리지 않고 녹우크라이나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안창호 내각은 소련으로부터의 증대되는 위험에 맞서 녹우크라이나와 동맹을 맺고 4만 여 명의 병력을 녹우크라이나 영내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전개

1939년 5월 11일, 소규모의 소련군 기병대가 녹우크라이나군 국경 초소를 기습하였으나 초소를 지키던 녹우크라이나 경비대와 그들을 지원온 녹우크라이나 기병정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신문에도 짤막하게만 보도될 정도로 하찮은 수준의 교전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국경에서의 긴장감이 높아졌고, 양측은 점점 더 많은 병력을 국경에 배치했다.

당시 스탈린의 신뢰를 잃어가던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는 이왕 양측간의 충돌이 발생한 김에 소련의 숙원이었던 녹우크라이나 병합을 실현해 스탈린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블루헤르는 휘하의 병력을 준비시켜 녹우크라이나를 팀공하였고 이에 녹우크라이나군과 주오한국군이 응전하면서 양측의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됐다.

결과와 영향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결국 한오 동맹군을 격파하지 못했고 녹우크러이너 병합 계획도 무위로 돌아갔다.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블류레흐는 스탈린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고 곧 숙청당한다. 하지만 스탈린이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야욕을 버린 것은 아니라서 4년 후 일본과 함께 전쟁을 일으킨다.

한국은 치올코우스키에서의 기갑부대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에는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던 다용도 중형전차를 본격적으로 양산하기 시작했다.[2] 또 소련 기갑부대에게 큰 피해를 입힌 급강하폭격기를 적극 활용한 새 전술교리를 도입하였다.

영향

  1. 당시 명칭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2. 원래 중형전차가 사용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치올코우스키 전투 이전까지는 경전차로도 충분하다는 의견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