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군 이호

솔피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7월 31일 (수) 13:54 판
[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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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원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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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추밀원 의장
대한제국 장조의 증손
경원충왕 | 慶元忠王
이름 이세보(李世輔) → 이호(李晧)
출생 1832년 7월 11일
사망 1896년 1월 7일 (향년 6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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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1]
부모 양부 상계군, 양모 평산 신씨
생부 이단화, 생모 해평 윤씨
부인 경국왕비 김씨, 경국왕비 강씨
자녀 양자 창순왕
종교 유교 (성리학)
봉호 경왕 (慶王)

개요

대한제국추존황제장조 의황제 이훤의 황증손.

경조 시기와 성조 시기 활약한 대표적인 황족중 한 사람으로, 두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며 세도정치 척결과 대한의 부국강병에 혁혁한 공적을 세운 충신이자 수많은 책과 시조를 쓴 문인이다. 대표적으로 일기인 《신도일록》과 시조집인 《풍아》 등이 있다.

생애

출생과 입적

1832년(순조 32년) 6월 14일에 군수 이단화(郡守 李端和)와 해평 윤씨 윤응선(尹應善)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첫 이름은 '이세보(李世輔)'였다.[2] 상계군의 양자가 된 후 '이호(李晧)'로 바꿨다.

경평군은 원래 조선 원종의 2남이자 인조의 동생인 능원대군 이보의 8대손으로, 조선 왕실 직계와는 원종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200여 년이 지난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의 본 가계는 다음과 같다.

능원대군 이보 - 영춘군 이정 - 창은군 이권 - 안풍군 이영 - 이후근 - 이복현 - 이제로 - 이단화 - 이호(이세보)

그러나 18살(만 17살)이던 1849년(경조 원년) 8월 14일 상계군의 사후 은언궁[3]의 봉사손으로 입적하여 왕족이 되었다. 이 때 작호 경평도정(慶平都正)을 받고 이름도 이호(李晧)로 고쳤다. 그 해 9월 경평군(慶平君)으로 승격했다.

상계군은 은전군의 양자이기 때문에 호적 상으로 경조의 8촌 형제가 되었는데[4], 경조는 상계군의 양자었기 때문에 경조은 '실제 아버지의 양자'[5] 이호를 사실상 형제처럼 대했다.

왕실의 첨병

경조가 경평군을 사실상 형제처럼 대한 만큼, 경평군은 경원군 이하전, 흥선군 이하응과 함께 경조 시기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왕족으로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다. 경평군은 세도가들과 사이가 안좋았고, 자연히 세도가들은 경평군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852년(경조 3년)에 일이 터졌다. 경평군의 생가 친동생 이세익(李世翊)[6]이 충량과에 발탁되어 특명으로 한림[7]에 임명받았으나, 세도가 안동 김씨들이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경조이 크게 노여워했는데, 이를 두고 세도가 쪽 신하들은 경평군이 친동생을 위해 경조에게 몰래 청탁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제히 도성 밖으로 나가 경평군에게 벌을 주라 청했다.

그러자 화가 난 경평군은 판중추부사 김좌근 등 안동 김씨의 세도를 대놓고 비난했는데, 이 때 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였다.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던 세도가들은 이를 오히려 역공의 기회로 삼았다. 대사헌 서대순(徐戴淳)을 시켜 경평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으며 아예 신하들에게 경평군을 사형시키라고 까지 권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경조는 쉽게 굴하지 않았다. 헌종 대부터 시작된 왕권 강화 정책을 더욱 과감하게 밀어붙이던 경조는 이세익을 한림에 봉하는 한편, 김좌근에게 "경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며 김좌근을 갈궜고, 김좌근은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다쳐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는 크게 위축되었고, 경평군은 솔선수범하여 왕권 강화에 힘썼고, 경조는 그런 경평군을 왕실의 첨병이라고 불렀다.

이후 오위도총부(中義大夫兼五衛都摠府) 부총관이 되었고, 경조의 수라상을 감독,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세도정치를 척결하는 살벌한 상황에서 경조이 그나마 안심하고 맡길 만한 사람이 가까운 종친이었기에 그를 임명한 것이다.

1853년(경조 4년)에는 동지사은정사(冬至謝恩正使)[8]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경조는 그를 통해 청나라와 국제 정세에 대해 알아보도록 지시하였고, 아편전쟁 등 서구권 열강이 동아시아 침탈을 시작하던 시기임을 목격한 경평군은 이를 소상히 기록하여 경조에게 고한다. 이때 경평군이 고한 자료는 조선이 개항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개화의 기수

황실의 원로

사망

가족관계 및 후사

어록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세도정치 척결을 주청하며, 반발하는 김좌근을 일갈하며
"백성들도 다 아는 걸 자가께서만 모르신다는게 말이 되오? 나라가 망하는 걸 보고만 계실 것이오이까!"
파락호로 자자했던 흥선왕 이하응을 일갈하며

대중 매체에서

각종 친필

경왕은 엄청한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수많은 책과 시조를 썼다. 대표적으로 일기인 《신도일록》과 시조집인 《풍아》 등이 있다.

경왕 전하 문학 기념비

경왕의 시조의 소재는 부정부패 비판과 애정, 도덕, 기행, 옛 일에 대한 고찰(考察), 그리고 여행지를 두루 지나며 느낀 감흥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주제와 내용의 다양함은 다른 시조와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왕 시조만의 독특한 모습이다. 이렇게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조들을 많이 썼기에 현재 신지도를 관할하는 완도군에선 완도읍 장좌리 수석공원에 경왕 전하 문학 기념비를 세워 그의 문학성을 기리고 있다.

경왕이 평생에 걸쳐 쓴 시조가 총 458수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시조를 쓴 기록을 가지고 있다.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경왕은 경조를 대신하여 지방을 순시할 때 경조가 승하하자, 한성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한 맺힌 눈물을 흘리던 모래사장이 있었다. 이세보가 나중에 서울로 돌아간 뒤 그 곳 모래를 밟을 때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해서, 이름이 명사십리(鳴[9]沙十里)[10], ‘울모래(鳴沙場)’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훈(賞勳)

  •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
  • 대훈위 이화대수장(大勳位李花大綬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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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능원대군파. 덕흥대원군 기준 11대손 '응(應)' 항렬. 파는 다르지만 효명세자, 경조, 흥선대원군과 같은 항렬이다.
  2. 상단 표에 적혔듯이 그는 원래 능원대군의 후손으로, 능원대군파에서 1868년 경조가 '항렬자 통일령'을 내리기 전의 이세보 세대 항렬자는 '세(世)O' 였다.
  3. 본래는 은언궁이었으나 성조대 황제의 본가라는 의미에서 대궁으로 이름을 고쳤다.
  4. 경조의 법적 가계: 영조 - 효장세자(진종) - 정조 - 순조 - 경조.
    경평군의 법적 가계: 영조 - 사도세자 - 은전군 - 상계군 - 경평군.
  5. 경조은 은언군의 아들이자 풍계군의 친아들이다.
  6. 1868년 이택응(李宅應)으로 개명.
  7. 翰林, 조선시대 예문관 검열의 별칭.
  8. 조선시대 중국에 정기적으로 보내던 사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지 즈음에 보낸다.
  9. 울 명.
  10. 울음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린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