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민회 (개화)

Curio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월 27일 (월) 02:18 판 (역사)

한국의 보수 정당
(창당) 대한국민회
(신설 합당)
(개별 합류)
(흡수 합당)
대한국민회
한문명 大韓國民會
영문명 Korean Nationalist Assembly (KNA)
창당일 1918년 1월 10일
전신
흡수한 정당 / 1919년 흡수합당
분리된 정당 / 19■■년 분당
해산일 195■년 ■월 ■일
후신 틀:신한국당 (개화)
역대 총리 이승만 / 제8대 •  1918~1925
손정도 / 제9대 • 1925
김창암 / 제15대 • 1940~1944
총재 이승만 / 초대
윤보선 / 말대
이념 국민보수주의
가부장적 보수주의
한국 내셔널리즘
스펙트럼 우익[1]
국민의원 68석 / 300석 (22.7%)[2]
당기
당색
남색 (#254170)

개요

대한국민회 창립대회[3]

1918년부터 195N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보수주의 정당.

역사

개화당의 이승만계와 민중파는 당 영임이자 총리였던 서재필과 갈등을 겪다가 탈당하여 대한국민회를 창당하얐다. 초대 영임으로는 직업정치인인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후 1919년 총선에서 개화당을 꺾으면서 보수당과 연립정부를 구성, 이승만을 총리로 하는 제 1차 이승만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후 1921년 선거에서는 아예 단독과반을 확보하여 국밍회 단독으로 제 2차 이승만 내각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의 독단적인 당 운영에 불만을 품고, 수십 명의 중의원들이 집단으로 탈당해 중도우파 성향의 대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어진 1924년 총선에서 좌익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약진으로 국민회와 자유당[4] 모두 과반 확보에 실패하면서 국민회, 자유당 그리고 민주당은 사회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민국연합'이라는 이름의 대연정을 꾸렸고, 국민회의 이승만을 총리로, 자유당의 안창호와 민주당의 송병조부총리로 하는 제 3차 이승만 민국연합내각이 출범한다. 이후 국민회와 내각의 각종 실책으로 국민회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1927년 이승만 총리는 중추원 해산을 단행했다. 이어 치러진 조기총선에서 민국연합은 과반 사수에는 성공하였으나 국민회의 의석 감소로 인해 자유당과 국민회의 의석 수가 역전당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이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당 영임직에사도 사퇴하면서 부영임인 손정도가 영임대행에 취임하였다. 이후 안창호를 총리로 하는 안창호 민국연합내각이 출범했다. 직후 치러진 국민회 임시전당대회에서 제 2대 영임으로 관료 출신의 이시영이 선출되었고, 국민회 몫의 부총리 역시 부영임 손정도에서 새 영임인 이시영으로 교체되었다.

대공황 직후 치러진 1931년 총선에서 국민회는 의삭석수가 폭락한 자유당을 제치고 다시 민국연합 내 1당이 되었다. 이는 시장자유주의를 주장하던 자유당이나 대한민주당과는 달리, 친복지 성향인 대한국민회가 경제공황의 상황에서 그나마 지지도의 타격이 적었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좌익야당이았던 한인사회당중추원 의석의 과반을 처지해 단독으로 양기탁 내각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시영은 책임을 지고 당 영임직에서 사퇴하였으며, 관료 출신의 박중양이 대한국민회의 제 3대 영임에 선출되었다. 한편 국민회보다 오른쪽에서는 다분히 파시즘적인 극우 성향의 민족단결연맹이 출현, 강력한 단군민족주의와 반공주의, 계급협조를 내세우며 국민회의 의석과 지지율 일부를 일부 잠식하였다. 한동안 국민회는 좌익의 집권과 극우의 출현을 패배의 충격 속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한국민회에게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집권 경험이 없었던 한인사회당은 국정 운영에 있어서 조금 미숙한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서회당 내부의 분열이 극심해진 것이었다. 결국 사회당 온건파가 1934년 분당해나와 사회민주당을 결성하면서 좌익 세력인 찢어졌다. 이러한 여당의 악재로 말미암아 1935년 총선에서 민국연합이 승리하였고, 국민회는 또다시 민국연합 내의 최대 정당이 되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라고 비판받는 박중양이 사석에서 의회정치를 크게 깎아내리는 발언을 한 것이 선거 직후 보도되면서 그에 대한 비토 여론이 커졌다. 어찌저찌 박중양은 총리에 취임하여 박중양 민국연합내각이 수립됐으나 민국연합 내부에서도 그의 퇴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자유당과 민주당의 압박에 결국 그는 취임 1년도 안 돼 총리직과 영임직에서 사퇴한다. 후임 총리로는 자유당 소속이지만 정파색이 옅은 김규식이 취임하여 제 1차 김규식 민국연합내각이 출범했다.

이후 전당대회에서 대한국민회의 제 4대 영임으로 선출된 이는 김창암이었다. 국민회 몫의 부총리를 겸하게 된 김창암은 대일, 대소 강경론을 펼치며 재무장을 주장한다. 아직 대공황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 상황에서 전폭적인 군비증강을 주장하던 김창암은 온갖 비판과 비난을 받았으나 그는 군비증강을 당론으로 밀어붙이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꾿꾿히 고수했다. 1939년 총선에서 국민회는 의석 비율을 유지했으나 약진한 자유당과 호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김규식이 또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김규식 민국연합내각이 출범했다. 당내 일각에서는 김창암에게 영임직에서 사퇴하라는 요구를 하였지만 이미 당 주류를 장악한 김창암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념 및 성향

리워크 예정

대한국민회는 민족주의, 보수주의 성향의 우익 정당이었다.

역대 지도부

틀:역대 대한국민회 총재 (개화)

역대 선거 결과

리워크 예정

연도 지도자 의석수 (의석율) 의석증감 지위 비고
1918 이승만
92 / 200 (46%)
여당
1919
139 / 250 (56%)
증가 47석
증가 9.4%
여당
1923
122 / 250 (49%)
감소 17석
감소 6.8%
여당
1926 손정도
80 / 250 (32%)
감소 42석
감소 16.8%
야당
1930 이시영
87 / 250 (35%)
증가 5석
증가 2.8%
야당
1934
63 / 250 (25%)
감소 24석
감소 9.6%
야당
1935 함태영
74 / 300 (25%)
증가 11석
감소 0.5%
연립여당 [5]
1938 김창암
80 / 300 (27%)
증가 6석
증가 2%
연립여당 [5]
1945 윤치영
65 / 300 (22%)
감소 15석
감소 5%
야당 [5]
1947 이범석
72 / 300 (24%)
증가 7석
증가 2.3%
야당 [5]
1951
61 / 300 (20%)
감소 11석
감소 3.7%
야당 [5]
1954 윤보선
90 / 400 (23%)
증가 29석
증가 2.3%
야당 [5]

각주

  1. 다만 경제적 문제에 한해서는 중도 성향이었다.
  2. 해산 당시 기준
  3. 오른쪽 열 한 번째가 이승만.
  4. 개화당이 당명을 바꾼 정당
  5. 5.0 5.1 5.2 5.3 5.4 5.5 대한민주당과 선거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