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국 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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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선국 초대 태왕 고조 | 高祖 | |
|---|---|
| 이름 | 하전(夏銓) → 교(㚁) |
| 출생 | 1842년 3월 26일 |
| 한성부 인달방 도정궁 (現 경성 한성부 종로구 도정궁) | |
| 붕어 | 1901년 3월 29일 (향년 59세) |
| 경성 한성부 경운궁 | |
| 재위기간 | 조선 제25대 국왕 |
| 1849년 7월 28일 ~ 1895년 1월 12일 (45년) | |
| 대조선국 초대 태왕 | |
| 1895년 1월 12일 ~ 1901년 3월 29일 (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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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조 이교(高祖 李㚁)는 대조선국의 초대 태왕이다. 1849년 헌조 사후 왕족 가운데 유일한 헌조의 아래 향렬로써 보위에 올랐다.
고조의 등극은 조선 후기 300년을 통치해온 인조의 혈통의 단절과 덕흥대원군의 직계로의 왕통교체를 상징하며 실질적인 조선 제3왕조의 창건 및 조선 왕조의 중시조로 평가된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라 59세의 나이에 붕어하기까지 부국강병과 동시에 제도와 문화의 동도서기화를 이루는등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며 조선의 고토인 간도를 수복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고조가 즉위할 당시 미지의 나라였던 조선은 고조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대조선국으로 변모했고, 고조의 치세는 천통성세라고 불리며 성군(聖君)으로 평가받는다.
생애
유년기
1842년(헌조 8년) 2월 15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인손(仁孫), 초휘는 하전(夏銓)으로 생후 1년 만에 아버지 완창군이 세상을 떠나 겨우 만 1세로 도정궁 사손(嗣孫)[1]이 되었다.
어릴때부터 외모가 아름다우며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고, 유교 경전을 보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왕족으로써 이하전의 재능은 아까운 재능이었다. 그러나 1849년 평범한 왕족이었던 이하전의 인생은 역변하게 되었다.
당시 국왕이었던 헌조가 후사없이 일찍 죽고 삼종의 혈맥이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 이하전은 풍양조씨와 효유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 조씨)의 후원(뒷받침)으로 헌종과 효정왕후의 양자(장남)으로 정식 입적되어 '완녕군(完寧君)'으로 봉해지고 이하전에서 이교(李㚁)로 개명하였고, 곧바로 조선 제25대 임금으로 정식 즉위하였다.
| 대왕 대비가 이하전을 종사의 부탁으로 삼는다고 하교하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종사(宗社)의 부탁이 시급한데 금상(今上)을 이을 사람은 이하전(李夏銓)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시인(時仁)의 첫째 아들이다." 하였다. |
즉위 배경
고조는 선왕 헌조와 즉위 전까지는 법적(양자제도)으로 27촌, 혈통상으로는 25촌 차이가 나는 머나먼 친척이었다.고조와 헌조는 혈통상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고 법적으로는 중종의 아들 대에 갈라졌다. 단, 조선 후기 들어 왕실 자손이 거의 씨가 마르기 직전까지 가 1819년(순조 19년) 순조가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 대부터 대원군가 종손에 한해서 군 작위 수여 및 왕족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13대 사손인 이하전은 종친부에서 관리하는 엄연한 왕족이었으므로 언급할 수 있는 대상이긴 했지만 헌조 즉위 당시만 해도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왕족이었다.
그러나 1844년(헌조 10년) 민진용 역모 사건에 엮여서 1844년(헌종 10년)에 전계군의 세 자식들이 사사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영조 - 사도세자의 직계 후손이 단절된 것이다. 이렇듯 삼종의 혈맥이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2] 혈통보다는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른 택군이 대두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하전이 다른 종친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항렬. 원래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르면, 선왕의 다음 항렬 대에서 새 왕이 나와야 하는데 그럴 왕족이 없기는 했다. 헌조는 덕흥대원군의 13세손(12대손)이고 그 아랫대가 14세손(13대손)인데, 왕과 가까운 친척들 중 14세손은 단 1명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해당했던 왕족이 도정궁 종손 이하전이었던 것.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비록 왕통을 계승한 건 덕흥대원군의 셋째인 선조 계열이었지만, 덕흥대원군의 장남 계열로만 계속 이어지는 종가가 바로 도정궁이기 때문에 왕실 직계보다 세대 교체가 빨랐기 때문이다.
이렇듯 왕실의 직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이하전이 차기 왕으로 옹립되는 것은 보다 당연했고, 풍양 조씨와 뜻을 같이 했던 권돈인이 직접 이하전을 후계자로 세우기를 호명하며 공식화 되었다. 풍양 조씨 뿐만 아니라 안동 김씨 또한 어린 이하전이 보다 다루기 수월할 것이라 여기어 옹립에 찬성하였다.
친정(親政)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가 없이 무럭무럭 커가는 시기 고조는 8살의 어린 나이었기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852년 고조가 10살이 되던 해 순조, 헌종과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 문성왕후를 왕비로 삼았다. 안동 김씨 세력이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조차도 또 다시 안동 김씨를 왕비로 들이는 일을 반대했지만, 다른 안동 김씨의 압력에 유야무야되었고, 국구(國舅, 왕의 장인어른)가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
1855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고조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친정을 시작한 고조는 정치적 친위 세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비주류를 등용하여 조정에 근왕파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때 왕족 가운데는 흥선군, 경평군, 익평군을, 그 외에는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던 고조는 1857년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유배를 보내며,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는등 반(反) 안동 김씨 행보를 걸었다. 또한 오군영의 훈련대장과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하고 헌조가 만들었다 해체된 총위영을 복원하며 군권을 장악하고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진정한 왕이 되다
그러던 1860년에 일이 터졌다. 고조가 친히 발탁하여 안동 김씨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경평군의 친동생 이세익(李世翊)의 한림 임명을 세도가 안동 김씨들이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경평군이 크게 노여워해 고조에게 상소를 올리며 세도가와 경평군의 대립이 폭팔했다. 안동 김씨들은 경평군에게 벌을 주라 청했고, 화가 난 경평군은 김좌근, 김문근(金汶根) 등 안동 김씨의 세도를 대놓고 비난했는데, 이 때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인가! 이씨의 나라인가!" 라는 말을 하였다.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던 세도가들은 이를 오히려 역공의 기회로 삼았다. 아예 신하들에게 경평군을 사형시키라고 까지 권하라고 부추겼다.
이때 고조가 개입하였다. 고조는 “경평군의 말이 옳다. 이 나라가 김씨의 나라가 아니라면 경평군을 사사할 필요가 없다“며 경평군을 공격한 대사헌 서대순을 파직하며 경평군을 보호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것 같았으나, 안동 김씨들은 정치적 탄핵이 실패하자 경평군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것이 흥선군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이를 고조에게 고했다. 격노한 고조는 즉시 총위영과 오군영을 동원하여 비변사와 고관대작의 가택을 습격하여 세도가를 체포하였고, 대규모 출척을 가했다. 이것이 바로 임술대출척이다.
이때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복원하며 세도정치 60여년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내고 말았다.[3]
이때부터 고조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각종 폐단에도 손을 대었다. 고조는 근왕파들을 통해 지방을 장악한 이후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 또한 군정을 개혁하여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 세수가 확연히 증가했다.
또한 서원 철폐도 이어졌다. 고조실록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 날 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진정 백성에 해가 된다면 문선왕이라도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 이와 더불어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사창제(社倉制)를 실시,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법제도 바로잡았다. 또한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이에 조선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고,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고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되어 고조의 권위는 점차 증가해갔다.
개항과 동도서기
고조 시기 들어 서구의 통상 강요는 더더욱 심해져가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거치며 조선의 쇄국은 정점에 달했으나 1876년 운요호 사건을 거치며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점차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유원, 박규수, 오경석 등 개화파의 주장과 이홍장의 권고를 받은 고조는 개항 의사에 찬성하였고 개국(開國)을 결정하게 됐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여러 국가들과 수교를 시작하였고, 고조는 각각 수신사와 영선사, 보빙사를 파견하여 근대와 문명을 관찰하였다. 그 결과 도쿄에 머물면서 메이지 덴노를 비롯해 산조 사네토미,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주요 인사를 만나고 일본의 각종 시설을 시찰하였다. 귀국하자 이를 바탕으로 개화파를 형성, 근왕파는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갈라지게 된다.
고조는 스스로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공맹과 정주의 나라에서 사악한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서양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동도서기'였다. 청의 양무운동을 모티브로 서양의 기술과 무기만을 수입하려 시작한 이 계획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작동하여 조선 육해군의 성공적인 근대화로 이어졌으나, 동도서기론은 점차 고조와 조정의 예상과는 다른 역효과를 불러냈다.
무기와 기술의 국산화를 위해서는 공학을 배워야했고, 공학은 과학과 사상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으며 서양식 무기를 익히기 위해서는 서양의 언어와 군사교범을 들여와야 했다. 결국 이는 1881년부터 전면적인 근대적 학제의 확립과 산업 확충으로 귀결되었다. 게다가 1881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모방하여 흥선군을 수장으로 하고 정부관료들로 편성한 조사시찰단은 서구를 탐방하며 구미 견문을 쌓으며 열성적인 근대화론자로 진화하였다. 흥선군은 조사시찰단 사이에서의 공통된 의견을 모아 고조에게 상주하는데, 이것이 바로 홍범 14조이다. 고조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전면적인 근대화를 국시로 정함에 따라 홍범 14조는 조선의 개화 방침이 되었다.
홍범 14조의 반포를 기점으로 사회, 군사, 중앙행정기관의 개편과 함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이러한 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행정관제를 개편, 1부(府) 6조(曹)제에서 2부(府) 9아문(衙門)제로 정착시키는 행정개혁과, 독일 군사고문단 초빙, 프로이센식 내각 체제 도입, '사농공상'을 폐지,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새롭게 사족이라는 특권 계급으로 함과 동시에, 승선부의 지배 하에 두어 전제 왕권을 강화한다. 동시에 학제(学制) 개혁, 지조(地租) 개정,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정비 등이 있다.
결국 이 시기부터 동도서기론은 사실상 조선의 서구화를 뜻하는 의미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개화정책의 추진은 조선을 험난한 국제정세속에서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었다. 이러한 고조의 근대화 정책을 현대 조선에서는 어일신(御一新)이라고 칭한다.
건양북벌
칭제건원
건양북벌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성조되었다. 이에 고조는 왕실의 존칭을 격상시켜 국왕 전하를 태왕 폐하로 바꿨고, 왕비 전하에서 왕후 폐하로, 세자 저하에서 태자 전하로, 세자빈 저하에서 태자비 전하로, 왕대비 전하를 왕태후 폐하로 각각 바꾸고 왕실(王室)을 제실(帝室)로 바꾸고, 원구단을 축조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으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황제의 자격으로 고유제를 거행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천자국 대조선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조선이 대조선국이라는 제국으로 변하듯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또한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의화단 반란으로 조선이 간도, 러시아가 북만주를 점령하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는 다가오는 두번째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말년
고조의 치세는 태평성대였지만, 그 치세를 유지하기 위해 고조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격무를 일삼았다. 여타 선왕들 또한 격무로 시름하기는 다반사였지만 수십년간 세도가를 비롯한 여러 열강과 경쟁해온 조선의 수장인 고조의 부담은 여느 군왕들과도 비견할 수 없었으며 이는 고조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어극 52주년을 바라보던 1901년 3월 29일, 한 시대의 거인이 서방정토로 떠나게 되었다. 향년 59세였고 8살의 나이에 등극한 이래 한치도 쉬지 않고 서세동점의 난세속 조선이라는 작은 배를 선장의 위치에서 살아남게 한 임금은 조용하게 영면에 들었다.
사후 기강을 만들고 표준을 세운 업적을 인정받아 고조(高祖)의 묘호를 받았으며 성릉(聖陵)의 능호를 받아 서삼릉에 안치되었다.
여담
- 미남이었다. 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서 ㅣ피부가 밝으며 매우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는 기록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 부인 문성왕후와의 금실이 매우 좋았다. 본래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은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한것이지만,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정작 왕후 본인은 한 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고 성격이 과감한 고조와 조용한 왕후는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되었다고 한다.
가계
- 증조부 : 진안군 언식(晋安君 彦植, 1752 ~ 1819)
- 증조모 : 덕수군부인 장씨(德水郡夫人 張氏, 1750 ~ 1770)
- 조부 : 완성군 희(完城君 爔, 1771 ~ 1830)
- 조모 :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 1772 ~ 1808)
- 부친 : 완창대원왕 시인(完昌大院王 時仁, 1805 ~ 1843)
- 모친 : 경주대원비 김씨(慶州大院妃 金氏, 1816 ~ 1863)
- 왕후 : 문성왕후 김씨(文成王后 金氏, 1837 ~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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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대조선국 제실의 계보도 (빨간풍선) 틀:대조선국 제실 (빨간풍선)
- ↑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라는 뜻이다.
- ↑ 익평군이 있었지만, 익평군은 숙부 은전군의 사후 양자가 되어 제사를 이어야 했고, 몸이 좋지 않아 일찍이 후보군에서 탈락했다. 물론 장남이 입적하여 즉위하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었지만 매우 드문일이라 기각되었다. 야사에서는 익평군이 풍계군과 그의 첩 전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난 동성동본이라 즉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 ↑ 다만 신 안동 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이는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안동 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성장을 막고자 했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과 재산은 크게 잃었지만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김병기는 잠시 경기도 광주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하여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 / 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 고조의 치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