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분쟁 (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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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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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분쟁
Western Australia Conflict
The C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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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933년 3월 8일 ~ 1994년 3월 26일 (61년)
장소 호주 전역[1]
원인 -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분리독립 투표 부결
- 왕정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
-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
- 연방 당국의 유혈 진압
결과 - 호주 왕국 건국
-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분리독립 실패
- 퍼스 협약 체결
교전 주체
정부군 독립파
(분리주의)
왕당파
(연방주의)
호주
┗ 호주군
┗ 연방경찰청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경찰

웨스트레일리아 독립군
웨스트레일리아 공화국군
웨스트레일리아 공산당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연방연맹
에스페란스 방위대
개신교 왕당파
지원 국가 및 세력
영국
미국
뉴질랜드
인도네시아(1968~)
영연방
유럽연합
아세안
소련
북중국
인도네시아(~1968)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국 공산당
남아프리카 공화국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 - 번버리 시위(1930년 8월 13일)
  • - 퍼스 재무부 청사 폭동(1931년 3월 6일)
  • - 호텔 노동자 파업(1932년 11월 24일)
  • -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분리독립 투표(1933년 4월 8일)
  • - 호주 왕국 건국(1937년 1월 1일)
  • - 호주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둔(1938년 7월 3일)
  • - 임시 휴전(1940년 9월 16일)
  • - 퍼스 경찰서 습격사건(1957년 10월 25일)
  • - 길드포드 성당 총기난사 사건(1959년 1월 20일)
  • - 검은 수요일(1960년 3월 9일)
  • - 시드니 힐튼 호텔 폭탄 테러(1978년 2월 13일)
  • - 필바라 광부 파업(1980년 6월 11일)
  • - 러셀가 폭탄 테러(1986년 3월 27일)
  • - 퍼스 협약 체결(1994년 3월 26일)

개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분쟁은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독립이 저지되자 1933년부터 1994년까지 61년간 이어졌던 정부군과 독립파, 그리고 왕당파 간의 유혈 분쟁이다. 호주 왕국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점이기도 하다.

독립파와 왕당파 간의 분쟁도 잦았으나, 정부와 독립파 간의 갈등이 더욱 비중있는 사건이다.

설명

사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는 본래 연방 가입에 부정적이었던 식민지 중 한 곳으로, 대표적인 연유로는 골드 러시의 여파로 시드니와 맬버른 등의 동부 해안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면서 소득이 불균형해지고 연방 차원에서도 별다른 지원 정책을 약조하지 않아 불만이 고조되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주 정부만의 개인적인 원한에 불과하였고, 나름 경제 회생에 대한 희망이 충만했던 주민들의 압력으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연방 가입이 어찌저찌 성사되었으나, 이후에도 캔버라가 수도로 지정되면서 동부에 인프라 편중현상이 지속되었고 이는 현지 주민들로 하여금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가 다른 주들에 비해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되는 일명 신데렐라 주(Cinderella State)로 각인되기에 충분하였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주 정부와 주민들은 연방 당국에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불만은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주간지인 더 선데이 타임즈(The Sunday Times)의 소유주이자 분리주의자인 제임스 맥칼럼 스미스(James MacCallum Smith)에 의해 대서특필로 보도되어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심리를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민족주의 강세에 힘입은 스미스의 주도 아래 분리주의 동맹이 설립되고,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분리주의 무장 세력인 웨스트레일리아 독립군(Westralian Independence Army)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1930년대 대공황이 닥치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주요 수출품인 밀의 가격이 폭락하여 낙농업이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 실업률은 30%에 달하여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당하는 경제적 혼란이 도래하자 실업자들이 재무청사를 점거해 농성을 벌이고, 호텔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개시하는 방식으로 고충을 토로하나 연방 정부는 이들의 사정을 외면한 채 긴축정책을 실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언론플레이를 시도하던 스미스는 이를 기회삼아 노동자들을 대변하며 분리주의의 필요성을 대대적으로 역설해 대중들을 선동한다.

분리주의 여론이 득세하자 이에 불안감을 느끼던 자본가와 우익 인사들을 중심으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연방연맹이 조직되어 연방 탈퇴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전개한다. 연방 정부에서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조셉 라이언즈 전 총리와 조지 피어스 상원의원, 빌리 휴즈 전 총리를 파견하여 주민들을 회유하기 시작하나, 주민들은 사태를 연일 방관하던 연방 당국을 신뢰할리 만무했고, 이들을 향해 계란세례를 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친연방주의자들은 회유 차원에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고충을 조사하기 위한 헌정위원회를 개최하길 희망하였으나 이미 깊이 뿌리내린 반연방 정서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3년 4월 8일에는 제임스 미첼 주총리의 주도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분리독립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기에 이른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국민당은 탈퇴를 지지했고,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은 잔류를 호소하는 식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총 68%의 유권자들이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고, 극성 연방주의자들이 대다수인 일부 광산 지역에서만 반대표가 우세를 점하였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국민당은 투표에서 승리하였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이내 실각하였고, 노동당이 정권을 탈환하게 된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은 친연방주의 정당으로서 분리독립에 거세게 반대하였으나 국민투표 결과에 불복할 수는 없었기에 형식상의 절차로라도 국민투표안을 영국 하원에 송부하기 위해 대표단을 런던으로 파견하게 된다.[2] 그러나 이 대표단은 영국 정부와 밀실회담을 개최했고, 영국 하원에 분리독립 부결을 청원한다.

하지만 영국은 웨스트민스터 헌장에 의거해 호주 내부 사정에 일방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었던 관계로 국민투표안 심의 자체를 거부했다. 결국 심의권은 다시 호주 연방으로 돌아왔지만, 연방 의회는 해당 투표가 국민투표가 아닌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한 주민투표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내려 최종 부결시켰다. 이렇게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독립이 사실상 좌절됨에 따라 상황은 반전된다. 결국 분리주의 세력은 호주 연방은 탈퇴하지만 영연방국으로서 자치를 보장받고자 하는 친영파(웨스트레일리아 독립군)와 호주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별도의 국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공화국파(웨스트레일리아 공화국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혁명파(웨스트레일리아 공산당) 등으로 세력이 다분화된다. 이들은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독립이라는 하나의 기치 아래 무력 투쟁을 전개하고, 이에 분개한 친연방주의자들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연방연맹으로 결집하여 분리주의에 대응하는 무장 단체를 창설한다. 이로써 정부와 분리주의자, 연방주의자 간 갈등이 본격화된다.

  1. ↑ 최초 발원지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이지만,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 등 타 지역에서도 간헐적으로 테러 또는 내란음모가 행해졌다.
  2. ↑ 당시 호주의 헌법 체계는 영국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