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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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6대 대통령 로버트 로버트슨 "롭" 푸틴 주니어 Robert Robertson "Rob" Putin j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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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 ||||||||||||||||||||
출생 | 1952년 10월 7일 (72세) | ||||||||||||||||||||
위스콘신주 밀워키 | |||||||||||||||||||||
사저 | 미네소타주 인디애나폴리스 | ||||||||||||||||||||
재임기간 | CIA 국장 | ||||||||||||||||||||
2009년 2월 20일 ~ 2013년 2월 1일 | |||||||||||||||||||||
제68대 국무장관 | |||||||||||||||||||||
2013년 2월 1일 ~ 2017년 1월 19일 | |||||||||||||||||||||
제46대 대통령 | |||||||||||||||||||||
2021년 1월 20일 ~ 현직 | |||||||||||||||||||||
서명 | |||||||||||||||||||||
링크 | | [1] | [2]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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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46대 미국 대통령. 러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근소한 표 차이로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국무장관직과 CIA 국장직을 역임했으며 미네소타주지사 및 상원의원을 지냈다.
생애
가족사
롭 푸틴의 할아버지인 스피리돈 이바노비치 푸틴은 스탈린의 다차에서 일하는 전속 요리사였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은 NKVD 소속의 군인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활약한 과거가 있었다. 그러나 1944년 독일 해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힌 후 풀려나자, 상관의 오해로 굴라그 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였고 결국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은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이후 1950년, 그는 미국의 국적을 따고 이름을 로버트 스피리도노슨 푸틴으로 바꾼다.
로버트 스피리도노슨 푸틴은 1952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로버트 로버트슨 푸틴을 낳으니, 그가 바로 롭 푸틴이다. 롭 푸틴의 가족들은 1954년, 미네소타주의 주도인 미니애폴리스로 이주하였다.
CIA 요원 시절
롭 푸틴은 유년기 시절, 학교에서 깡패로 유명했으며 동급생과 자주 다퉜다. 그러나 부모님의 엄격한 가정 교육과, 무술에 대한 관심으로 점차 불량 학생에서 벗어났으며 고등학생 때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해 필라델피아 대학교의 법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는 스파이를 동경하였고 필라델피아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CIA의 요원이 되기를 바랬다. 그렇게 1975년, 롭 푸틴은 23세의 나이로 CIA의 수습 요원으로 채용된다.
전직 CIA 요원으로 첩보 활동에 대한 세간의 환상이 있고 실제로 국외에 파견되기도 했지만 푸틴이 맡은 일은 낮은 단계의 보안과 연락업무 등에 그쳤다고 한다. 즉 중간관리 사무직 요원이었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색 신분의 특수요원이 아니었다. 물론 평범한 정보직 요원이었어도 나름 KGB 출신인만큼 푸틴은 블랙요원으로 화려하게 활동한 이력만 없을 뿐이지 기초 첩보요원 훈련 등은 다 받은만큼, 사격이나 격투, 장비 조종 등을 능숙히 할 수 있고 이를 쇼맨십으로 활용한다.
최연소 미네소타 주지사
그러나 CIA에서 계속 말단 행정직에 그치자, 1988년 서독에서 업무를 본 것을 끝으로 롭 푸틴은 CIA에서 물러나게 되며 지역 정치계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퇴사와 동시에 롭 푸틴은 당시 미네소타주에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던 정치인 폴 웰스턴의 보좌관이 되었다. 1990년, 상원 의원 선거에서 폴 웰스턴이 미네소타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자 그의 지위 역시 크게 상승했다. 비록 그는 CIA의 요직은 아니었으나 CIA 근무 경력을 내세우며 "공정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내세워, 1994년 폴 웰스턴 상원의원의 지원 하에 주법무장관직에 출마했다. 그러나 그는 공화당 후보에게 약 11%p차로 밀리며 크게 낙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치부심한 푸틴은 냉철한 이미지와 지역 정치인과의 밀착을 통해 인지도를 높여나갔으며, 1998년에는 높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민주농민노동당의 유력한 미네소타주지사 후보군이었던 존 마티를 제치고 민주당의 미네소타 주지사 후보가 되었다. 그는 공화당의 후보였던 놈 콜먼 후보를 65% 대 35%로 압도적으로 꺾으면서 최연소 미네소타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2002년 주지사 선거에서는 약간 득표율이 낮아졌으나, 여전히 60%대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넉넉한 표차로 미네소타의 주지사로 재선된다.
그는 미네소타 주지사를 지내면서 미네소타의 경제 성장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미네소타의 지역 경제는 8년 연속 성장했으며, 구매력으로 측정한 GDP는 22%, 실질 소득은 1.5배, 실질 임금은 2배 이상 증가했다. 실업과 빈곤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고, 미네소타 지역 주민의 자기 평가 삶의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다.
또한 2002년 미니애폴리스 극장 인질극이 일어난 동안에 미네소타의 지역 신문들은 주 방위군의 구출작전에서 인질 12명이 사망하여 푸틴 주지사의 인기가 심하게 손상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포위 공격이 끝난 후 곧 미네소타 주민들의 83%는 푸틴이 테러리스트에게 타협 없이 완강했음에 흡족해 하였기에 푸틴 지지율이 올라갔다.
이러한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준 푸틴은 2006년 성공적으로 임기를 끝마쳤으며, 퇴임 당시 푸틴 주지사의 지지율은 90%대에 육박했다.
미 연방 상원의원
200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으로 W.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롭 푸틴은 미네소타주 연방 상원 의원 출마를 선언했다. 미네소타주는 대표적인 민주당의 우세 지역이었으므로 여론조사에서도 롭 푸틴은 지지율에서 공화당 후보를 앞서나갔다. 그렇게 11월 실제 선거에서는 롭 푸틴이 무려 67%를 득표, 29%를 얻는데 그친 공화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연방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게 된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경선을 앞두고는 버락 오바마 일리노이주 상원 의원을 지지했다. 그가 오바마 의원을 지지했을때만해도 오바마 의원은 힐러리 클린턴 상원 의원에게 지지율이 40%p 가량 밀려있는 상태였으나, 이후 오바마가 힐러리를 제치고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면서 푸틴 의원의 장래도 매우 밝아졌다. 특히 푸틴 의원은 미네소타 프라이머리에서 오바마 캠프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오바마가 미네소타에서만 74%를 득표할 수 있게 만들었다.
2008년, 이오시프 바이드노프 러시아 대통령의 지시로 인해 남오셰티아 전쟁이 발발하자, 푸틴 의원은 러시아에 대한 전방위적인 제재를 주장하였다. 이때부터 푸틴은 본격적인 민주당 내 외교 전문가로 활약하면서 차기 국무장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CIA 국장
2008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존 매케인을 큰 표차로 꺾고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주UN대사 및 국무장관의 후보감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작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CIA 국장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정보력에 바탕을 둔 안보 정책이 CIA 국장에 더 맞는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장관
2012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가 밋 롬니를 꺾고 재선에 성공하면서 그의 거취 역시 주목받았다. CIA 국장 연임설과 국무장관 임명설이 나왔는데, 결국 그는 4년전 잠시 접어야했던 국무장관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롭 푸틴 장관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겠다는 성명을 2015년 10월 발표했다. 그의 초기 지지율은 6%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존 케리 부통령에 이은 4위로 집계되었다. 가상 대결로는 마르코 루비오를 2% 앞섰으나 젭 부시에게는 3%, 랜드 폴에게는 2%, 테드 크루즈에게 5% 차이로 밀리며 민주당 지지층에게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지지층이 점차 샌더스로 이동하자 아이오와 코커스를 직전에 앞둔 2016년 1월 30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지지함을 선언하며 후보직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롭 푸틴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도록 도왔으나 결국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의 후보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롭 푸틴 장관의 지원으로 북부 지역에서 샌더스가 크게 이겼다. 힐러리 클린턴이 최종 후보가 된 이후, 롭 푸틴은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위해 유세하였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예상을 뒤집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빛이 바랬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경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오카시오 코르테스 하원의원 등 당내 좌파들에게서 지원을 받은 롭 푸틴은 전국 지지율 25%을 얻으면서 출발하였다. 민주당 내에서는 존 케리 전 부통령에 이은 2위이다. 아이오와 코커스에서는 25.4%를 득표, 피트 부티지지 후보에게 단 0.1% 밀리는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경선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는 47.1%를 쓸어담으면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노스 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에서 존 케리에게 52.5%대 26.3%로 크게 밀렸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 의원이 후보직을 사퇴한 이후 푸틴 전 장관을 전격 지지하기로 결정하면서 푸틴은 슈퍼 화요일에서 존 케리 후보를 상대로 초압승을 거둬 사실상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게 된다. 이후 4월, 존 케리 전 부통령은 푸틴의 승리를 인정하면서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본선
Build Back Batter 더 낫게 재건하자 2020년 대선 슬로건 |
제46대 미국 대통령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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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 1988 - 1990 | 정계 입문 |
민주농민노동당 민주당 |
1990 - 현재 | 입당[5] |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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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미네소타 주법무장관 선거 | 미네소타주 | 민주농민노동당 | 589,344 (34.1%) | 낙선 (2위) | |
1998 | 미네소타 주지사 선거 | 1,361,241 (65.1%) | 당선 (1위) | 초선 | ||
2002 | 미네소타 주지사 선거 | 1,364,007 (60.6%) | 재선 | |||
2006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481,351 (67.3%) | 초선[6] | |||
2020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민주당 | 81,268,757 (51.31%, 306명) | 초선 |
어록
(보좌관: 온타리오주가 미네소타주의 가스를 자꾸 끌어다가 쓰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끊으세요. 미네소타 주지사 재직 당시 |
러시아를 용서하는 것은 신이 할 일이고, 거기에 군대를 보내는것은 내가 할 일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당시 |
내가 올때까지는 왜 바퀴벌레처럼 어슬렁거리며 아무 결단도 내리지 않은 것입니까? 당신 서명이 안보입니다. 여기 와서 서명하시오. 롭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으로 인한 총기 규제 안건 통과 당시 일부 민주당 상원 의원들이 꾸물거리자 |
미국의 영토가 넓다고 하더라도 쓸모 없는 땅은 단 한치도 없다. |
미국의 동맹은 셋 뿐, 육군 해군 공군이다. |
미국은 내 인생의 전부. |
영토 분쟁에 담판은 없다. 전쟁만이 있을 뿐. 도네츠크 지역에서 우러간 영토 분쟁이 발생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충고하며 |
미국의 흑백 분리 정책이 미국 역사상 가장 악랄한 에피소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왜냐면 다른 나라에서는 더 심한 역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 선생님들을 만났을 때 |
딕시크랫[7]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심장이 없다. 그러나 딕시크랫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뇌가 없다. 텍사스 출신의 베토 오루크 경선 후보를 견제하며 |
여담
- 이오시프 바이드노프 러시아 대통령과는 정확히 10살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