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게이조 (민국 38)

Sindan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0월 30일 (일) 13: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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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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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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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60·61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하야시 게이조
林敬三 | Keizō Hayashi
출생 1907년 1월 8일
일본 제국 이시카와현
(現 일본국 이시카와현)
사망 1991년 11월 12일 (향년 84세)
도쿄도 미나토구 키타사토연구소병원
재임 기간 초대 육상막료장
1950년 10월 9일 ~ 1952년 6월 30일
초대 통합막료장
1952년 7월 1일 ~ 1960년 12월 16일
제59대 내각총리대신
1960년 12월 17일 ~ 1962년 7월 1일
제60대 내각총리대신
1962년 7월 2일 ~ 1965년 7월 5일
제61대 내각총리대신
1965년 7월 6일 ~ 1966년 8월 30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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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버지 하야시 야사키치
어머니 하야시 데루
아내 하야시 시즈에[1]
누나 안도 사쿠라코[2]
첫째 여동생 시게코
둘째 여동생 미사코
학력 도쿄부립 제4중학교 (졸업)
제일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신체 약165cm[3]
소속 정당 자유당
소속 파벌 내무군벌[4]
약력 고등문관시험 합격
내무성 인사과장
궁내청 차장
제35대 돗토리현 지사 (관선)
초대 육상막료장
초대 통합막료장
제59대 내각총리대신
제60대 내각총리대신
제61대 내각총리대신
일본주택공단 총재
일본적십자사 사장
자유당 부총재
수훈 훈1등 서보장
훈1등 욱일대수장
정3위
군사 경력
복무 경찰예비대
1950년 10월 9일 ~ 1952년 6월 30일
일본국 국방군
1952년 7월 1일 ~ 1960년 12월 16일
최종 계급 경찰감 (경찰예비대)
육장 (국방군)
최종 보직 통합막료회의 의장
주요 보직 경찰예비대 중앙본부장
경찰예비대 총감
보안청 제1막료장
육상막료장
통합막료장
참전 남부 빨치산 토벌전
공식 초상화

개요

일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초대 육상막료장 및 통합막료장, 제59-61대 내각총리대신과 주택공단 총재, 적십자사 사장, 자유당 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 이후 유이한 군인출신 총리이자 비의원 총리이다.

1928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교토, 가나가와 등에서 근무하다가 내각에서 일하며 중앙 관료계로 진출하였고 일본의 패전이후 톳도리현 지사로 근무하였다. 전후 남부 일본 내에서 일본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좌익계 빨치산의 활동이 거세지자 일본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결성하려던 GHQ와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눈에 들어 경찰예비대 총대총감 자리에 올랐고 이후 국방군에서 초대 육상막료장 및 초대 통합막료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의 안보투쟁 이후 실각한 기시 노부스케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스즈키 모사부로 총리가 국회의사당 테러사건으로 인해 대다수의 내각 각료들 및 100여명의 중의원 의원들과 함께 폭사하며 발생한 정국혼란기에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대행을 지지해 문민세력의 호감을 샀으며 군내 급진파(쇼와군벌)에 의해 시도된 쿠데타 시도를 저지시키며 범 국민적인 지지를 얻게되었다.

오히라 총리대행에 의해 선포된 국가건안시기 당시 거국내각의 총리로써 의원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별볍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었으며 5년 9개월 가량 재임하였다. 재임시기에 비핵 3원칙 발표, 경제개발 정책, 반공기조 및 문민통제 강화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이후 같은 내무군벌 출신의 야마다 마사오를 차기 총리로 지지하며 사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내무군벌의 수장으로서 국방군에 일정부분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일본주택공단 총재, 일본적십자사 사장, 자유당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 1991년 서거하였다.

생애

유년기와 관료시절

1907년 1월 8일 일본 제국 이시카와현에서 구 제국 육군 중장 하야시 야사키치와 하야시 테루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인이었으나 그는 도쿄제국대학(현 도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1928년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듬해인 1929년 그는 학사 학위를 받고 도쿄제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하야시는 내무성에 들어가 1929년 도야마 현청의 하급 공무원으로 발령되었으며 1932년에는 교토부 사회복지과장, 1935년에는 가나가와현 사회복지과장 등을 역임했다. 1941년 3월에는 내각기획원에 부임하여 1942년 1과 1과장이 되었다. 이후 1943년에는 내각법제국 참모장을 1944년에는 내무성 감찰관, 지방국 총무과장, 행정과장을 1945년에는 내무부대신 비서관과 내무성 인사과장 등의 여러 직책들을 역임하다 일본의 패전을 맞이하였다.

종전 이후에는 38세의 나이로 최연소 톳도리현 지사(관선)으로 선출되어 10월 27일 부임하였으며 1947년 2월에는 지방청장으로 부임하였다. 1947년 12월 31일 GHQ에 의해 내무성이 해체되자 그는 임시기관인 내사국(内事局)의 장관이 되었고 내사국의 업무가 국가공안위원회와 기타 내무성계 관청들로 이동할 때 까지 업무를 수행하였다. 극동군사재판이 진행되던 와중에 그는 궁내성(1949년 이후부터는 궁내청)의 차관으로 부임하여 쇼와 덴노의 신임을 얻었다. 당시의 그는 쇼와 덴노를 마주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경찰예비대와 국방군 시절

경찰예비대 창설식 당시 하야시 제1막료장[5]

1949년을 전후로 하여 남북일본의 분단이 확실시 되자 소련과 일본공산당 측의 지원을 받은 빨치산들의 활동이 더 강화되었고 안보위협이 심화되었다. 이에 GHQ는 일본인으로 경찰예비대를 조직해 이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당시 군정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와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새로 조직되는 준 군사조직의 수뇌부를 경찰출신 관료들로 채우는 것에 찬성했다. 당시 GHQ 정보국장이던 찰스 윌러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6] 요시다 총리에 의해 경찰예비대의 수장으로 지목되었다. 지목된 이후에도 경찰예비대 징병담당 윌러비 소장의 반대가 있었으나 코트니 휘트니 소장과 위트필드 셰퍼드 소장등 GHQ 소속 장성의 찬성, 쇼와 덴노와 요시다 총리의 지지, 무엇보다도 맥아더 사령관의 의중으로(...) 그는 경찰예비대의 수장인 중앙본부장(이후 총감)이 되었다.

그는 경찰예비대의 수장으로 재임하면서 예비대를 천황에게 충성하던 군대에서 일반적인 근대국가의 군대로 바꿔놓고자 하였다. 1951년 3월에 하야시는 "본관이 심고자 하는 경찰예비대의 근본 정신은 애국심과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이다."[7]라고 연설하였다.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조직이 신일본에서 적절한 역할을 한다면 그게 국민의 조직일 것이다. 이 조직이 세워야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8]라고도 말하였다. 그는 구 제국군의 정신교육을 비판하였고 신헌법과 평화의 정신하에 군의 충성의 대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다.

1952년에 일본국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요시다 총리는 경찰예비대(육상)과 해상경비대(해상)을 통합하고 통합기관인 보안청을 설치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하야시는 예비대의 마스무라 게이키치와 함께 통합을 주도하였고 양 군사집단이 보안대라는 단일집단으로 합쳐지자 보안청의 제1막료장이 되었다. 1954년 7월 1일, 몽골 전쟁이 발발한 그 해에 보안대는 국방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정식 군사집단으로 격상되었으며 세 구성군을 조율할 통합막료회의가 생기자 초대 통막의장이 되어 1960년까지 6년 동안 재직했다.

1954년 7월 하야시 게이조 통합막료장과 찰스 L. 볼테 미 육군 참모총장

그는 자유세계의 한 축을 차지하는 일본국 군부의 수장으로써 다른 제1세계 국가들과의 국방 협력 및 교류에 참여했다. 남일본 방위청(現 방위성)은 미사일 연구개발을 중시했기 때문에 하야시 통합막료장은1954년 8월 미국의 일본군지원자문단 소장인 제럴드 D. 히긴스 소장을 만나 국방군 요원의 미국 파견에 대해 논의하였다. 1954년 9월 그는 미 국방부의 초청으로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이던 찰스 어윈 윌슨을 만났고 이외에도 아더 W. 래드포드 제독, 합참의장, 다른 고위 정치인 및 군 관계자들과도 대면하여 주 아시아 미군의 배치 및 제트기와 구축함 제공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1950년대 말 중국, 한국, 베트남 등이 참여하는 아시아 반공전선의 일부가 된 남일본은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고 하야시 통합막료장은 여러 서방국가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1957년 5월 5일부터 16일까지 12일 간 영국을 방문하였고, 그 기간 동안 런던 등지에 위치한 영국군 부대와 시설들을 방문했다. 영국을 방문한 이후 하야시는 1957년 5월 21일 서독 본에 도착하였으며 다음 날 그는 서독 국방장관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독일 연방군 감찰관 아돌프 호이징어 중장을 만나 군사교류체제 구축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1959년 11월 14일과 15일, 햐야시는 해리 D. 팰트 제독이 주최한 다국적 군사 회의에 참석하기위해 필리핀을 방문했다. 체류기간 동안 그는 필리핀 참모 총장 마누엘 F. 카벨 중장 , 중국 참모총장[9] 펑멍지 장군을 비롯한 다른 군 참모들을 만났다.

1960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안보투쟁의 여파로 사임하고 사회당의 스즈키 모사부로가 민주당의 동의하에 총리직에 올랐다. 그러나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당시 정국 속에서 이듬해인 1961년 3월 11일 국회의사당 유조차 테러이후 내각이 몰살당하고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오히라 마사요시가 총리 대행직을 수행하자 자신 휘하의 내무군벌 일원들과 함께 오히라 총리 대행을 지지하였으며 3월 16일에는 전군에 "최근 국가위기상황에서 군의 필요성이 중요해지는 만큼 모든 장병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체제유지에 모든 노력을 쏟아라, 또한 모든 장성들은 경거망동을 삼가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라는 훈령을 내려 비상시국이니 만큼 돌발행동을 삼가하라는 명을 하달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국방군 장교


  1. 전 일본 추밀원 서기장 후타가미 효지의 다섯째 딸
  2. 전 교토 부지사(현 교토 도지사) 안도 교시로의 아내
  3. 이 사진을 보면 원근감을 감안했을 때 155cm인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보다 10cm 이상은 커보인다.
  4. 일본 국방군 내 경찰 및 내무관료 출신 인원들을 일컫는 말
  5. 중앙의 제복을 입은 인물이 하야시 제1막료장이며 우측은 요시다 시게루 총리
  6. 그는 경찰예비대의 수장으로 구 제국군 육군참모본부에서 작전 장교로 근무했던 핫토리 다쿠시로를 지지했다.
  7. 영문판에 따르면 "The fundamental spirit of the NPR I firmly hold is patriotism and love of our race".
  8. 영문판에 따르면 "Needless to say, if this organization is to play its rightful role in the new Japan, it must be ‘an organization of the people.’ This must be the fundamental principle upon which this defense force should be established"
  9. 중국에서는 참모총장이 합참의장 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