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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천제 國府遷濟 | Retreat of the Republic of Korea to Je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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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군수품을 운반하는 국군의 모습 |
개요
배는 6시 15분에 도착했다. 차가운 나무판자 위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군중들은 배가 선착장에 닿는 것을 보자마자 이성을 잃은 듯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나갔다. 선착장 위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울리고 줄이 쳐졌다. 하지만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로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에 부딪치는 하얀 물보라가 까맣게 변했다. 김동리, 「부산항」 中 |
6.25 전쟁에서 패한 대한민국 정부가 피난민 수십 만 명을 이끌고 1950년 8월 26일부터 약 2주간 제주도의 북제주군[1]로 수도를 옮긴 사건.
단군 이래 최대 천도라고 불릴 정도의 대규모 수도 이전 사건으로, 2주의 시간 동안 약 50만명의 부산 시민과 피난민들이 제주도로 내려왔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으며, 국부천제 이후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 마냥 대만,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이 차례대로 공산화되기 시작했다.
배경
1950년 8월 12일, 마산 전투에서의 패배를 시작으로 다부동 전투와 같은 큼지막한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대대적으로 패하자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명줄이었던 낙동강 전선은 결국 돌파당하게 되었다. 최전선에 위치해 있던 달성을 시작으로 대구, 함안, 군위, 영천이 인민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통영, 포항, 마산도 인민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임시 수도인 부산시 마저 점령당하게 생긴 이승만 정부. 그러나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만들어 둔 계획이 존재했으니, 그 계획이 바로 신한국 계획(New Korea Plan)이다. 신한국 계획의 골자는 '대한민국 정부를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 이 계획을 들은 이승만은 권총까지 꺼내들며 불같이 화를 내었으나 9월 8일, 인민군이 경주 시가지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결국 신한국 계획을 진지하게 미군과 논의하게 된다.
여러 지역이 정부 이전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최종 후보지는 서사모아 제도, 제주도, 일본의 야마구치 현과, 류큐 열도, 대만 총 5곳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서사모아 제도는 한반도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2]로 최종 후보지에서 제외되었으며 야마구치 현은 일본 내에서의 반한감정으로 인해 극우 테러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제외, 대만은 결국 중국에게 점령당하게 되어서 제외, 최종적으로 제주도와 류큐 열도 두 개의 후보지가 남게 되었으나 논의 도중 영산 일대가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한시가 급한 상황이 되어버렸기에 결국 부산과 거리가 더 가까운 제주가 최종 후보지로 결정되었다.
과정
이승만 정부는 당시 부산항에 정착 중이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와 같은 수 척의 수송선과 나룻배 수십 척을 동원해 최대한의 많은 시민들을 제주도로 이송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부산에 있던 수 백만의 민간인을 전부 제주도로 이송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결국 민간인 10만여명만을 선발해 북제주군으로 차차 이송시켰다. 그리고 8월 15일 광복절, 첫 번째 수송선인 버지니아 빅토리호(SS Virginia Victory)를 시작으로 총 12척의 수송선과 나룻배 50여척을 이끌고 차근차근, 약 일주일 간 부산항, 포항항, 마산항에서 출발, 제주항으로 도착했다.
결과
국부천제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2,000만 국민의 국가에서 순식간에 65만 남짓하는 인구[3]를 가진 조그마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6.25 전쟁은 사실상 김일성과 조선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