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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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5-11대 국무경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 Kishi Nobusuk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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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11월 13일 | ||||||||||||||||||||||
야마구치현 요시키군 야마구치정 (現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 |||||||||||||||||||||||
사망 | 1987년 8월 7일 (향년 90세) | ||||||||||||||||||||||
나라현 가시하라시 나라현립의과대학 부속병원 | |||||||||||||||||||||||
재임기간 | 제5대 국무경 | ||||||||||||||||||||||
1959년 3월 7일 ~ 1959년 5월 13일 | |||||||||||||||||||||||
제6대 국무경 | |||||||||||||||||||||||
1959년 5월 14일 ~ 1963년 5월 13일 | |||||||||||||||||||||||
제7대 국무경 | |||||||||||||||||||||||
1963년 5월 14일 ~ 1967년 5월 13일 | |||||||||||||||||||||||
제8대 국무경 | |||||||||||||||||||||||
1967년 5월 14일 ~ 1973년 5월 13일 | |||||||||||||||||||||||
제9대 국무경 | |||||||||||||||||||||||
1973년 5월 14일 ~ 1979년 5월 13일 | |||||||||||||||||||||||
제10대 국무경 | |||||||||||||||||||||||
1979년 5월 14일 ~ 1985년 5월 13일 | |||||||||||||||||||||||
제11대 국무경 | |||||||||||||||||||||||
1985년 5월 14일 ~ 1987년 8월 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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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공식 초상화[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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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본의 최고지도자이자 독재자.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전부터 관료로서 복무하며 기반을 다졌다. 전후에는 극동군사재판에서 A형 전쟁 범죄 용의자(평화에 관한 죄)로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는 권력을 잡은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발탁되어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하토야마 사후 일본의 최고지도자로 옹립되었다.
집권 이후에는 한국과 미국의 지원덕에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했고 이를 통하여 본인에 반대하는 숙적들을 강력하게 숙청하는 동시에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의 시위를 잔혹하게 짓밟았다. 이를 통하여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타로-아베 신조로 내려오는 3대 세습의 기초를 닦았으며, 이런 끔찍한 독재자의 면모를 나타내주는 그의 별명이 바로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교와 경제에 소홀히 하여 일본을 나락에 빠트렸으며, 이에 급하게 소련에 붙으려 시도하는 등 줄다리기 외교로 자금을 확충하려 하였으나 친서방 외교와 민주화를 지지하던 사위 아베 신타로에게 실권을 뺏기면서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 ↑ 혼전성은 기시. 사토 가의 데릴사위였다. 그럼에도 왜 사토가 아닌 기시 노부스케가 되었는지는 밑에 후술한다.
- ↑ 타케코, 코마, 오토요, 치요코, 미사오, 토시코, 야스코.
- ↑ 아베 신조의 어머니.
- ↑ 그 당시 동양인 신장으로는 상당한 장신이며, 이건 집안 내력인지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도 키가 172cm로 큰 편이었고, 손자인 기시 노부오(178cm), 외손자인 아베 신조(175cm)의 키도 현재 일본인 평균 신장(172cm)보다 큰 장신이며 증손자 기시 노부치요는 185cm에 달한다.
- ↑ 다만 기시 노부스케 사진에 밀려 선전용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기시 본인 역시 해당 초상화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