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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사적 제2호 | |
태묘 太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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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불러오는 중... | |
창건 | 조선 태조 4년(1395) |
주소 | 대한제국 종묘 한성부 종로구 종로 157 |
면적 | 200,545㎡ |
기능 | 대한제국 황실의 사당 |
관리주체 | 궁내부 태묘관리소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종묘 Jongmyo Shrine Sanctuaire de Jongmy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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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치 |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구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지정번호 | 738 |
등재연도 | 1995년 |
등재기준 | (iv)[1] |
대한왕조의 종묘 정전(宗廟 正殿)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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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종묘(宗廟)는 한성부 종로구 훈정동 1-2번지에 자리한 대한제국 역대 황제와 황비 및 추존된 황제와 황비,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 이다. 면적은 186,786 ㎡. 황실에서는 태묘(太廟)라고 한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의 종묘
대한왕조의 종묘 출처:문화재청# |
EBS에서 제작한〈문화유산 코리아 - 황제도 갈 수 없는 길? 종묘〉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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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교 국가에서 도읍에 갖춰져야 할 국가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궁궐, 종묘, 사직이 있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사직은 땅과 곡식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종묘와 사직은 제례 공간으로서 엄격하게 정해진 조영 원리(이론)에 입각하여 조성해야 하는데, 이 원리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한의 종묘는 중국에서의 제도 변화에 영향을 받거나, 고려 등 전조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이어 발전시키면서 현재는 중국, 베트남 등과 여러 면에서 다른 제도를 띠게 되었다.
우선, 도시 계획 상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궁궐에서 남면하는 임금을 기준으로 왼쪽(동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서쪽)에는 사직을 두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리법 등의 원리와 결합하여 중국 베이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격한 대칭성을 이루지 않고 각각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에 기대어 공간을 조성하면서 종묘가 경복궁과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종묘의 조영 원리에는 먼저 천자는 7묘,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라는 대원칙이 있다. 각각은 종묘에서 자신으로부터 몇 대까지(같은 항렬은 보통 1대로 친다.) 제사를 지내느냐를 나타낸다. 이에 맞추어 건물의 수나 신실(神室)의 수를 조정하여야 한다. 태조를 제외하고 대수(代數)가 다한 왕은 친진(親盡)이라 하여 신위를 종묘에서 빼내어 매안(埋安), 즉 땅에 묻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세실(世室) 또는 불천위(不遷位), 즉 업적이 큰 왕은 신위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종묘에 제사지내는 제도나 별묘(別廟)를 조성하여 그곳에 신위를 옮겨 다시 모시는 제도 등 대안적인 제도들이 등장하였다. 조선의 종묘는 둘을 적절히 조합하는 형태를 띠어 결과적으로 매안되는 신위는 (처음부터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폐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는 7실이었으나 세실이 누적되면서 세 차례 종묘가 증축된 결과로 현재는 19실이라는 유례없는 긴 사당이 완성되었다. 현재 종묘는 대한제국 이후로 7묘 형태이다. 고려 종묘는 제도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주로 9실을 기준으로 여러차례 신위 목록이 바뀌었다.
다음으로 소목제와 서상제가 있다. 전통적인 소목제(昭穆制)는 시조묘(始祖廟)를 중심으로 1대, 3대 등 홀수째 세대는 목(穆), 2대, 4대 등 짝수째 세대는 소(昭)라 하여 좌우에 번갈아가며 별도의 사당을 배치하는 제도이다. 이는 시조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으나 세실을 위한 공간이 애매해지고 부지를 많이 차지하여 훗날 사당 건물을 하나만 두고 그 안에 신실을 여럿 두는 동당이실(同堂異室) 제도가 들어섰는데, 여기에서는 서쪽에서부터 (태조부터) 순서대로 신위를 모셔서 서상제(西上制)가 된다. 대한 종묘는 고려 종묘 때처럼 서상제이다.
창건과 정립
1. 태조 고황제
새 왕조의 태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새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태조의 즉위 교서 제 1항이 바로 종묘와 사직의 제도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이었으며[2], 이는 옛 제도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새 왕조의 종묘사직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태조는 처음부터 천도를 염두에 두고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천도 계획이 미뤄지자,[3][4] 태조는 개경 내에서(당시 종묘는 성 밖에 있었다.) 새로운 입지를 찾아 지으려 하였다. 이마저도 마땅한 터를 찾지 못하자.[5] 결국 기존의 태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우도록 했다.[6] 그러나,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천도가 확정되면서 개경의 종묘는 공사가 중단되었고, 궁궐(경복궁), 사직과 함께 태조 4년 9월 새로운 종묘가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담 안쪽에 대실 7칸[7], 대실 좌우의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이 있었고 담 바깥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 5칸, 남행랑 9칸, 재궁 5칸 규모였다.[8][9]
제도적으로는 5묘(시조묘 + 당대 군주의 4대조)였으며, 고려 종묘의 전통을 이어받아 동당이실(同堂異室)[10], 서상(西上)[11] 제도를 취했다. 이 때 종묘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12]을 모셨다.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은 당시 여론 등을 반영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종묘를 한양에 두고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경에 다시 종묘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대신 매번 대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13][14] 이러한 상황은 태종이 다시 한양에 환도하면서 해소되었다.
2.태종
태종은 조선 종묘의 건축적 특성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하였다. 태종은 종묘 앞에 인공으로 가산을 만들어 땅의 기운을 보한 뒤 一자 형식의 종묘 정전에 양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진 월랑을 잇대어 건축해 가운데가 길쭉한 ㄷ자 형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월랑을 대는 것은 옛 제도(중화식)에 어긋나며 중국 사신들이 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웃을지 모른다고 대언 김여지가 간언하자[15] 태종은 "사신이 무엇 때문에 종묘에 오겠느냐? 혹시 본다 하더라도, 조선의 법이 이러한가 보다 하겠지, 어찌 비난하고 웃겠느냐?"하고는 그대로 월랑(越廊)을 짓게 했다. 또한, 공신당이 비루하다 하여 크게 수리하였다.[16]
3.세종
세종은 조선 종묘의 시조묘를 확정하는 등 제도 상 주요 원칙을 마련하였다. 즉위 초만 해도 종묘에는 정전(正殿)만 있었으나 세종 2년(1419년)에 정종(당시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 신위를 모셔야 할 상황에서 기존의 정전 5실이 만원[17]이 되자, 예조에서 조사한 결과
- 목조를 시조묘로 삼고, 익조의 신위를 협실(夾室)에 옮길 것 (송나라 신종[神宗]의 예)
- 별묘를 지어 태조 4대조의 신위를 하나씩 이안(移安: 신위를 옮김)할 것 (당나라 덕종[德宗], 송나라 영종[寧宗]의 예)
- 별묘를 짓지 않고 매안(埋安: 땅에 신위를 묻음)할 것 (예기[禮記] 왕제[王制]의 원칙)
등의 방안을 제시하였으며[18], 대신들의 최종 검토 결과 다음과 같이 (송나라 영종의 예를 따른) 의견이 모이자 세종은 이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 조선의 시조묘는 태조이다.
- 태조의 4대조는 별묘(영녕전永寧殿)에 모신다.
이로써 조선 종묘 제도의 중요한 원칙이 확립되었다.[19]
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20]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다.[21]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명나라, 청나라는 별묘 제도를 채택하지 않아, 종묘-별묘 체제는 현 대한제국 종묘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증축과 중건
4. 연산군
시간이 지나면서 종묘의 신실은 점차 채워져 연산군 1년에는
과 같이 모든 대실(大室)이 가득찼고, 태조 1세, 태종 1세, 세종 1세, 문종·세조 1세, 덕종[22]·예종 1세로 5세(5묘 원칙)가 가득차 다음 대인 성종을 모시는 데 문제가 발생하였다.[23] 예조에서는 원래 태종을 옮길 차례(친진親盡)이나 대업을 세운 태종을 옮길 수 없으므로 문종을 협실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최초의 불천지주(不遷之主: 옮기거나 묻지 않고 종묘에 계속 모시는 신위)가 탄생하였다.[24] 시간이 흐르면서, 불천지주는 대업을 이룬 군주에게 해당된다는 원칙에서 점차 벗어나 직계를 따라 모두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질된다.
5. 명종
중종이 승하했을 당시, 종묘는 다음과 같이 채워져 있었다.
태조, 태종, 세종은 불천지주였으며 세조, 덕종/예종, 성종은 각각 1세대를 차지하였으므로 중종을 모실 공간이 없었다. 조선은 5묘제였으므로 불천지주는 옮기지 못하고, 그 이하도 아직 옮길 차례(친진)가 되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종묘 증축이 이루어졌다.[25] 이로써 종묘는 11칸이 되었으며, 조선 종묘가 지금처럼 크게 길어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제도의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에 가까웠으며 명백히 종묘 제도의 "이론"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후에도 종묘 제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논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러한 논란은 종묘가 한 번 불타는 선조 대에 가장 크게 일어났다.
6. 선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황급히 북쪽으로 몽진하면서도 종묘의 모든 신주를 챙겨갔고, 이어 한양으로 들어온 왜군들 중 [우키다 히데이에 (한나라)|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는 한성 내 종묘에 집결, 주둔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곡소리나 괴성이 들리고 병졸이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갑자기 비명횡사하는 등 괴변이 속출하여 진영이 술렁였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우키다는 종묘에 불을 질러 전소(全燒)시키고 남별궁[26]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종묘를 제외한 궁궐들(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방화 시기와 주체는 명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운 것에 반해, 종묘는 그 방화 시기와 주체가 명확하다.
한양을 수복한 후 종묘를 재건하는 논의의 일부로서, 선조의 발제 하에 홍문관, 예조 등을 중심으로 조선 종묘의 기존 제도를 역대 왕조의 종묘 제도와 비교해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27]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 종묘는 수많은 변칙을 수용하면서 운용되었기에 이를 계기로 고제(특히, 주나라)를 회복할지, 혹은 지금까지 조선의 전통을 유지할지를 두고 조정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28]
-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부분은 동당이실(同堂異室)로, 이는 주나라 본래의 제도인 각 항렬[29]을 다른 건물에 모시는 방식(일세일묘一世一廟)[30]에서 벗어나 한명제(漢明帝)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희가 크게 비판한 바 있다. 주나라 제도로 되돌려야 한다는 견해(예조, 홍문관), 기존 제도가 오래되었고 종묘 외에 영녕전까지 모두 고쳐야 하며 지형을 살폈을 때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짓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이항복, 심희수 등 대신)가 충돌하였다.
- 제사를 지내는 전(殿)이 없는 것 역시 논란이었다. 명·청 태묘의 경우 제사를 지내는 건물(전殿)과 신주를 모시는 건물(침寢)이 따로 있어서 제사 때마다 신주를 옮겨다 치렀다(전전후침前殿後寢). 조선의 경우엔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실내에서 바로 제사를 치렀다.
- 조선의 종묘는 신주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서상(西上)제와 결합하여 같은 당(堂) 안에서 태조가 가장 뒤에 위치한 형세가 되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논란이 매우 거셌으나 선조는 결국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31] 다만 신주를 남향으로 고치는 것, 제사 공간을 넓히는 것 등의 작은 변화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시 11칸짜리 종묘를 짓기로 결정되었으며. 소실된 종묘에 대한 중건 사업은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겨우 끝났다.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면서 정전의 감실(龕室)이 또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년)에 4칸을, 헌종 2년(1836년)에 다시 4칸을 더 증축해 지금과 같은 19칸의 매우 기다란 건물이 되었다. 이것이 정전의 마지막 증축이다.
영녕전은 선조 41년(1608년) 종묘 중건 사업 당시 종전보다 4칸을 더 증축한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이후 현종 8년(1667년) 2칸을, 헌종 2년(1836년) 다시 4칸을, 명정 원년(1970년) 4칸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1909년 종묘 정전 |
7. 고종 태황제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조선 종묘는 5묘제에서 7묘제로 바뀌었으며, 시조묘인 태조는 태조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따라서 성화제가 즉위한 현재에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대한의 종묘는 형식적으로는 태조 + 헌종~유종의 7묘제를 따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천위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독특한 형식이 완성되었다. 나머지 신위 또한 영녕전에 따로 모시므로, 매안(埋安)되는 신위 없이 전부 종묘에 그대로 모시는 형태가 되었다.
한편, 재위 도중 폐위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공식적으로는 임금이 아닌 일개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므로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숙종대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숭 복위되면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조선왕조 재위 임금 신위 총 23위와 대한왕조 재위 임금 4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정식으로 재위한 임금은 아니지만 덕종, 원종, 장조, 문조 등 추존 임금들도 종묘에 모셔져 있다.
건축
정문
종묘 어정
향대청 일원
어숙실
정전 주변
악공청
영녕전 주변
신주 배치도
부묘일은 양력으로 환산.
정전
묘실 | 인물 | 출생 | 사망 | 부묘 | ||||||||||||||||||||||||||||||||||||||||
1실 | 제왕 | 태조(太祖)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 1335.10.27. | 1408.06.18. | 1410.08.26. | |||||||||||||||||||||||||||||||||||||||
왕후 | 승인순성신의고황후(承仁順聖神懿高皇后) | 1337.09. | 1391.10.21. | 1410.08.26. | ||||||||||||||||||||||||||||||||||||||||
순원현경신덕고황후(順元顯敬神德高皇后) | 1356.07.12. | 1396.09.15. | 1669.10.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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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실 | 제왕 | 태종(太宗)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 1367.06.13. | 1422.05.30. | 1424.08.06. | |||||||||||||||||||||||||||||||||||||||
왕후 |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 1365.07.29. | 1420.08.18. | 1424.08.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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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실 | 제왕 | 세종(世宗)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1452.04.29. | |||||||||||||||||||||||||||||||||||||||||
왕후 |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 1452.04.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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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실 | 제왕 | 세조(世祖)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 1471.01.06 | |||||||||||||||||||||||||||||||||||||||||
왕후 | 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 | 1485.06.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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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실 | 제왕 | 성종(成宗)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 1497.03.14. | |||||||||||||||||||||||||||||||||||||||||
왕후 | 휘의신숙공혜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 1497.03.14. | ||||||||||||||||||||||||||||||||||||||||||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 1532.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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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실 | 제왕 | 중종(中宗)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 1547.02.02. | |||||||||||||||||||||||||||||||||||||||||
왕후 | 공소순열단경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 1739.06.11. | ||||||||||||||||||||||||||||||||||||||||||
선소의숙장경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 1547.02.02. | |||||||||||||||||||||||||||||||||||||||||||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 1567.07.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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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실 | 제왕 | 선조(宣祖)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 1610.06.02. | |||||||||||||||||||||||||||||||||||||||||
왕후 | 장성휘열정헌경목의인왕후(章聖徽烈貞憲敬穆懿仁王后) | 1610.06.02. | ||||||||||||||||||||||||||||||||||||||||||
소성정의명렬정숙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正肅光淑莊定仁穆王后) | 1634.1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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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실 | 제왕 | 인조(仁祖)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 1651.08.21. | |||||||||||||||||||||||||||||||||||||||||
왕후 | 정유명덕정순인열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 | 1651.08.21. | ||||||||||||||||||||||||||||||||||||||||||
자의공신휘헌강인숙목정숙온혜장렬왕후(慈懿恭愼徽獻康仁淑穆貞肅溫惠莊烈王后) | 1690.1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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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실 | 제왕 | 효종(孝宗) 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欽川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 1661.08.02. | |||||||||||||||||||||||||||||||||||||||||
왕후 | 효숙정범경렬명헌인선왕후(孝肅貞範敬烈明獻仁宣王后) | 1676.05.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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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실 | 제왕 | 현종(顯宗) 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 1676.11.20. | |||||||||||||||||||||||||||||||||||||||||
왕후 | 현열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 1686.03.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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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실 | 제왕 | 숙종(肅宗)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協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 1722.09.21. | |||||||||||||||||||||||||||||||||||||||||
왕후 | 광렬선목혜성순의효장명현인경왕후(光烈宣穆惠聖純懿孝莊明顯仁敬王后) | 1722.09.21. | ||||||||||||||||||||||||||||||||||||||||||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 1722.09.21. | |||||||||||||||||||||||||||||||||||||||||||
혜순자경헌열광선현익강성정덕수창영복융화휘정정운정의장목인원왕후(惠順慈敬獻烈光宣顯翼康聖貞德壽昌永福隆化徽靖正運定懿章穆仁元王后) | 1759.05.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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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실 | 제왕 | 영조(英祖)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 1778.05.27. | |||||||||||||||||||||||||||||||||||||||||
왕후 |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원렬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元烈端穆章和貞聖王后) | 1778.05.27. | ||||||||||||||||||||||||||||||||||||||||||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睿順聖哲莊禧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 | 1807.05.09. | |||||||||||||||||||||||||||||||||||||||||||
배향공신 | 영조의 배향공신 [ 보이기 / 숨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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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실 | 제왕 | 정조(正祖)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선무열성인장효선황제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 1802.09.05. | |||||||||||||||||||||||||||||||||||||||||
왕후 | 장휘예경자수효의선황후(莊徽睿敬慈粹孝懿宣皇后) | 1823.06.10. | ||||||||||||||||||||||||||||||||||||||||||
배향공신 | 정조의 배향공신 [ 보이기 / 숨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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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실 | 제왕 | 헌종(憲宗)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 1851.09.01. | |||||||||||||||||||||||||||||||||||||||||
왕후 | 단성수원경혜정순효현성황후(端聖粹元敬惠靖順孝顯成皇后) | 1851.09.01 | ||||||||||||||||||||||||||||||||||||||||||
명헌숙경예인정목홍성장순정징장소단희수현의헌강수유령자온공안효정성황후(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徵莊昭端禧粹顯懿獻康粹裕寧慈溫恭安孝定成皇后) | 1906.02.18. | |||||||||||||||||||||||||||||||||||||||||||
배향공신 | 헌종의 배향공신 [ 보이기 / 숨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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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실 | 제왕 | 철종(哲宗)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 1921.03.31. | |||||||||||||||||||||||||||||||||||||||||
왕후 | 명순휘성정원수령경헌장목철인장황후(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章皇后) | 1880.08.11. | ||||||||||||||||||||||||||||||||||||||||||
배향공신 | 철종의 배향공신 [ 보이기 / 숨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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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실 | 제왕 | 고종(高宗)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 1921.03.31. | |||||||||||||||||||||||||||||||||||||||||
왕후 |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 | 1921.03.31. | ||||||||||||||||||||||||||||||||||||||||||
배향공신 | 고종의 배향공신 [ 보이기 / 숨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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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실 | 제왕 | 순종(純宗) 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 1874.03.25. | 1926.04.25. | 1928.07.06. | |||||||||||||||||||||||||||||||||||||||
왕후 | 경현성휘순명효황후(敬顯誠徽純明孝皇后) | 1872.11.20. | 1904.11.05. | 1928.07.06. | ||||||||||||||||||||||||||||||||||||||||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懿慈仁純貞孝皇后) | 1894.09.19. | 1966.02.03. | 1968.10.24. | |||||||||||||||||||||||||||||||||||||||||
배향공신 | 순종의 배향공신 [ 보이기 / 숨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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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실 | 제왕 | 원조(元宗) 문인무장지효명휘의황제(文仁武莊至孝明暉懿皇帝) | 1897.10.20. | 1970.05.01. | 1972.07.02. | |||||||||||||||||||||||||||||||||||||||
왕후 | 현덕정목온정자행의황후(顯德貞穆溫靖慈行懿皇后) | 1901.11.04. | 1989.04.30. | 1991.07.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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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실 | 제왕 | 유종(裕宗) 자인온유덕성순수수황제(慈仁溫裕德性純粹秀皇帝) | 1931.12.29. | 2005.07.16. | 2007.10.04 | |||||||||||||||||||||||||||||||||||||||
왕후 | 유위원경돈익수황후(裕魏元景敦翼秀皇后) | 1933.05.15. | 2012.06.19. | 2014.07.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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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태조실록의 즉위 교서 1. 천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社稷)을 세우는 것은 옛날의 제도이다. 그것이 전조(고려 왕조)에서는 소목(昭穆)의 순서와 당침(堂寢)의 제도가 법도에 합하지 아니하고, 또 성 밖에 있으며, 사직(社稷)은 비록 오른쪽에 있으나 그 제도는 옛날의 것에 어긋남이 있으니,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상세히 구명하고 의논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게 할 것이다.
- ↑ 태조 1년 8월 13일
- ↑ 태조 1년 9월 3일
- ↑ 태조 1년 9월 30일
- ↑ 태조 1년 10월 13일
- ↑ 이 "대실"(태실 - 영인본에는 "대"인바, 해당 편집자는 이를 "태"로 수정했다.)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신주를 모시는 곳은 "석실"로서 이는 실록에는 5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처음에는 5인용이었다.
- ↑ 태조 4년 9월
- ↑ 왕위를 미리 예상했는지 정도전이 24칸으로 정전 건물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성계가 더 늘려 달라고 졸라서 반 칸을 더 늘려 24칸 반으로 제일 처음부터 지었다는 설이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인 1990년대까지는 사실 마냥 매우 유명했다.
- ↑ 후한 명제(明帝) 이후 보급된 양식, 단일 건물에 신위를 모아 모시되, 각 신위는 분리된 방(신실)에 모시는 것
- ↑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음, 원래는 소목제(昭穆制) - 시조 신위를 중앙에, 2대/4대를 소위(昭位), 1대/3대를 목위(穆位)로 좌우로 나누어 배열
- ↑ 태종 11년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격상 태종 11년 4월 22일
- ↑ 정종 1년 6월 27
- ↑ 예시1예시1
- ↑ "동서 이방(東西耳房)에 허청(虛廳)을 짓는 것은 종묘 제도가 아닙니다. 후일(後日)에 상국(上國)의 사신(使臣)이 보게 되면 어떻다 하겠습니까?"
- ↑ 태종 10년 5월 13일
- ↑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이 당시에는 아직 태종이 생존한 상태였다.
- ↑ 세종 3년 4월 26일
- ↑ 세종 3년 7월 28일
- ↑ 세종 3년 10월 9일
- ↑ 세종 3년 12월 16일
- ↑ 추존된 왕
- ↑ 5세는 세대 별로 셈한다.
- ↑ 연산군 1년 10월 2일
- ↑ 명종 1년 4월 8일
- ↑ 지금의 한성 남산 혹은 동국대학교 한성캠퍼스 부근
- ↑ 선조 40년 2월 14일
- ↑ 선조 40년 2월 19일, 선조 40년 3월 17일 홍문관의 발의, 선조 40년 4월 7일 예조의 발의, 선조 40년 4월 14일 예조가 정리한 대신들의 의견, 선조 40년 4월 17일, 선조 40년 4월 22일, 선조 40년 4월 26일
- ↑ 5묘의 경우 시조·2소(2,4대)·2목(1,3대)
- ↑ 시조가 중앙에, 소(昭)는 좌편에, 목(穆)은 우편에 차례로 배열됨
- ↑ "종묘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동일하지 않으니 구애될 것이 없다. 태묘(太廟)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당초에도 의논이 동일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억지로 분부할 것까지는 없다. 무사한 가운데 한바탕 번잡한 변설을 일으킬 필요가 뭐 있겠는가?"(선조 40년 4월 26일)
- ↑ 태조의 조카이자 태종의 사촌.
- ↑ 효령대군의 14대손.
- ↑ 효령대군의 14대손.
- ↑ 1928년 5월 9일 궁내부 장관 한창수의 주장에 의해 배향공신 명단에 포함됨, 1940년 3월 12일 배향의식 거행, 1945년 패전 후 이승만 내각총리대신의 명령으로 종묘에서 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