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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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명 | 保守黨 |
영문명 | Conservative Party |
창당일 | 1884년 7월 8일 |
전신 | 온건개화파 |
해산일 | 1919년 8월 19일 / 대한국민회에 흡수합당 |
역대 총리 | 김홍집 / 제3대 • 1901~1906 |
당수 | 김윤식 / 초대 홍종우 / 말대 |
이념 | 보수주의 동도서기론 공화주의[2] (1895~)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국민의원 | 4석 / 250석 (1.6%)[3] |
당색 | 녹색 (#4A8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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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과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으로 동도서기론과 온건 문명개화론을 기반으로 하였다. 제4대 국무총리 김홍집이 보수당 출신이다.
역사
갑신혁명 이후 김윤식, 김홍집, 신기선, 박정양 등 갑신혁명을 지지한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창당되었다. 1880년대 보수당은 집권당인 개화당을 견제하는 한편 일부 당원들이 개화당 내각에 참여하는 등[4] 개화당에 견제와 협력을 동시에 하였다. 1893년에 실시된 초대 중추원 의원 선거에서는 전체 100석 중 19석을 얻어 56석을 얻은 개화당에 이은 제2정당이자 유일한 야당이 되었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일부 타협적 척사파가 창당한 보국당과 손을 잡고 개화당에 맞선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이완용 내각이 영국에 제주도를 조차해주었다가 민심이 개화당에 등을 돌린 제3회 총선에서 보수당과 보국당은 중추원 의석의 과반을 넘겼고, 보국당원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보수당과 행동을 같이한 황현을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를 수립하였다. 1899년 청나라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해 한국 공사관이 공격받자 보수당은 개화당과 함께 개입을 망설이는 황현을 압박하였고 한국이 의화단 진압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901년 황현이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보수당의 김홍집이 제4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김홍집 내각은 의화단 사건의 진압을 마무리한 신축조약을 체결하였고 통합정보기관인 천사희화점을 비밀리에 창설하였다. 이후 보수당이 제4회 총선에서 보국당과 연립하여 과반을 확보하면서 김홍집은 연임에 성공하였다. 1904년 김홍집 내각은 일본과 함께 러시아에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가해 제2차 극동전쟁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전쟁에서 승리해 (…) 하지만 전쟁 중 막대한 전비 지출로 경제가 어려워졌고 결정적으로 김홍륙 독다사건이 발생하면서 민심 이반이 발생, 제5회 총선에서 개화당에 패하여 정권을 넘겨주었다.
10년 넘게 야당으로 있으며 내리막길을 걷던 보수당은 개화당이 서재필계의 자유당과 이승만계의 국민회로 분열되자 국민회와 손잡고 1918년 다시 한번 연립내각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19년 총선에서 국민회가 단독과반을 달성하자 보수당은 내각에서 쫓겨났다. 10년 넘게 의석이 지속적으로 감소한 보수당은 더이상의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1919년 총선에서 고작 네 명만이 당선되는 참패를 당하자 이듬해인 1920년 국민회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