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효황제 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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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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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2대 황제
선종 효황제 | 宣宗 孝皇帝
이름 이선(李壇) → 이청(李壇)
출생 1879년 10월 23일
한성부 제중원
(現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즉위 1919년 4월 13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붕어 1927년 2월 27일 (향년 47세)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883년 10월 12일 ~ 1919년 9월 26일
대한제국 황태자 | 대한제국 대황제 대리청정
1919년 3월 5일 ~ 1919년 9월 26일
대한제국 제2대 황제
1919년 9월 26일 ~ 1927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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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성조 태황제, 모후 원순태황후
형제자매 외아들
황후 정후 순공효황후
계후 순현효황후
후궁 성빈 강씨, 효빈 유씨, 숙빈 김씨
자녀 장남 혜종 순황제
차남 상친왕
삼남 덕조 현황제
사남 제경군
장녀 선경공주
차녀 선의공주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강학원 초등과 (졸업)
강학원 중등과 (졸업)
육군무관학교 (졸업)
병역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준용(埈鎔)
대화(大和)
묘호 선종(宣宗)
존호 장혜상정화흠승렬
(莊惠商貞和欽勝烈)
시호 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1]
연호 광형(光亨, 1920~1927)

개요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 휘는 청(壇)이며, 연호는 광형(光亨), 묘호는 선종(宣宗), 시호는 효황제(孝皇帝)이다.

본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해 부황과 갈등을 빚었으나, 한노전쟁에서 군공을 세워 부황의 인정을 받았고, 성조가 고령으로 쓰러지자 섭정으로써 계엄령을 선포하고 3.1 폭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여 성조의 부재로 인한 제국과 조공국들의 혼란을 봉합해 제국의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쇠약해진 성조가 붕어하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 제국의 혼란을 성조 시기 확립된 의회제도와 사회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의 난립으로 간주하여 의회제도를 무력화 하고, 제국 내에서 대두되던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잔혹하게 분쇄, 반대파를 숙청하여 황제 중심의 전제정을 확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

외치에서는 부황 성조가 직접 한청전쟁, 권비의 난 진압과 한노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을 감행하고 외정에 직접 관여하여 성과를 내면서 내치도 돌본 것에 비교하면 부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내치와 문치(文治)에 비중을 두었다. 물론 선종의 치세에 1차대전의 참전 대가로 남양군도를 할양받았고, 적백내전을 틈타 연해주와 사할린 북부를 병탄하여 대한제국의 최대 영토를 확보한 시기임을 감안하면, 군신인 성조에 비하면 문치에 비중을 두었다는 것으로, 외치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듯 선종의 치세는 어일신 이후 팽창한 국세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시기로, 국가적으로 위세를 떨쳤다는 것과 문화적으로 번성하여, 군국주의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고 대공황과 한소전쟁의 영향으로 살기가 팍팍했던 연경 시대 초기인 1930년대~1940년대 초중반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기 좋은 시대였다.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으며, 광형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창작물들도 많이 나오는데 이를 광형 낭만이라고 한다.

생애

출생

1879년 성조 태황제 이엽의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만 2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어린 시절 부터 아버지 성조가 다혈질인것에 비하면 온후하고 점잖아 성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성조가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신에 가까운 타입으로 경전과 서양의 지식, 잡기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이는 선종의 아들들인 혜종 순황제상친왕 또한 비슷했다.

어린 선종은 강학원에 입학하여 기초 군사학을 익혔다. 7살 때는 성조 앞에서 군복을 빼입고는 거수 경례를 하며 군대식 보고를 하는 시늉을 하며, 부황을 기쁘게 했다. 선종은 프랑스어에도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청년기

선종은 젊었을 때부터 반골 성향과 정의감이 강해 군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프로이센식 전제정을 외면했고, 당연히 군국주의와 전쟁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강력한 황권을 자랑하는 부황 성조를 일부러 거역하거나 반항하곤 했다. 하지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남다르다더니 러시아를 상대로 잇따라 전쟁을 벌일 때, 선종은 그의 군사적 능력을 마음껏 입증해 보였다. 본래 선종은 한러전쟁에서 생길 수많은 희생자들을 우려하며 전쟁에 반대하였으나, 정작 전쟁에서 제3군을 지휘하며 여순 공방전에서 제3군이 고도로 요새화된 여순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황궁으로 돌아와 성조를 처음으로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관대한 전후처리를 주장해 성조의 속을 긁었다.

이처럼 부황과는 다른 서구식 사고에 물든 선종은 국외의 자유주의자들의 흥미를 자극했고, 선종 본인도 자신이 황위에 오르면 자유로운 입헌군주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무진 전쟁 당시 패배한 토막파 잔당들이 내지에 잠입하여 성조의 암살과 테러를 시도하고, 여기에 휘말린 성조가 저격당해 쓰러지자, 일본과 외지에서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 발생하였고, 성조의 저격 미수와 연이은 혼란의 책임을 둘러싼 내각과 의회의 극한 대치로 대한제국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성조가 쓰러진 직후 선종은 섭정의 자격으로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선종은 아버지와 제국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선종이 그토록 기피했던 전제국가의 차기 황제로써의 역할을 뽐낸다. 아버지와 나라를 지키겠다는 지극히 감성적인 결정을 내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매우 이성적이고 냉철한 안목을 선보이는, 가장 이상적인 전제군주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종은 섭정에 취임한 즉시 어전회의를 소집하고, 내지와 외지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지에 잠입한 토막파 잔당들의 테러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또한 주일제국군을 통해 무자비한 토막파 진압에 나서는 한편, 5개 사단을 일본에 증파하여 3.1 폭동을 조기에 진압하는데 성공하는 등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여주며, 제국의 후계자로써 전세계에 자신의 명성을 각인 시켰다.

이렇게 선종은 자신의 능력을 냉혹하게 증명했고, 황태자가 너무 유약하다며 우려하던 중신들도 선종이 3.1 폭동 진압에서 보여준 냉정하고 행동력 있는 모습에 선종이 성조의 뒤를 이을 전제군주라는 점을 실감했다, 이후 성조가 회복하자, 성조는 자신과는 다른 총명하고 재능 있는종이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이끌기를 바랬다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막중한 황제의 책무를 잘 완수하라며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강명한 황제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후 같은해 9월 성조가 저격 사건의 휴유증으로 사망하고 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이 때부터 선종은 변하기 시작한다. 위 사건으로 선종은 자신의 감정보단, 제국을 지키기 위해선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제거해게 된다. 부드럽고 관대한 마음가짐으로 남을 포용할 줄 알았던 황태자 시절과는 전혀 다른, 너무나도 비정하고 냉혹한 전제군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즉위

치국

1919년 9월 26일, 선종은 연호를 주역에 나오는 합홍대 품물광(含弘大 品物咸. 품은 것이 크고 넓으니, 만물은 모두 형통하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광형'으로 정하여 즉위했다.

선종이 보위에 올랐을 때 사정은 불안한 점이 많았다. 3.1 폭동의 여파로 번국인 일본은 혼란스러웠고, 내지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각은 제국의회와의 갈등 탓에 잔뜩 위축되었고, 제국의회는 정쟁으로 마비되었고, 권신들은 유능했지만 성조의 사후 자신들의 번벌 과두정을 성립하려 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선종은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온갖 꼬투리를 잡고 말도 안 되는 듯한 죄명을 붙여 권신들을 탄압하고, 제국의회 의원들을 숙청하였으며, 정치인 및 권신들이 대규모로 의문사 당하였다.선종은 이렇게 정적들을 탄압하고 유배시키는 등 어쩌면 악랄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선종은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철저히 왕권에 필요한 소모품 정도로 봤다. 그래서 대신들과 권신들이 크게 반발하였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유배당하거나, 의문사 하였기에, 나머지는 그냥 황제의 지시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선종은 대한에서도 신해혁명과 10월 혁명과 같은 국체를 부정하는 불온한 움직음 우려하여 치안유지법을 제정한다. 초기에는 공산당이 적용의 대상이었으나 점차 사회주의와 좌익, 노동 운동과 종교계, 민주주의 단체로까지 그 적용대상을 넓혀 갔다. 결국에는 이 법령은 그 어떤 형식의 반정부운동도 탄압하는 구실로 적용되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은 선종의 과격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대한은 끊임없이 성장했다. 선종은 1925년에 한인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보험법을 제정하면서 체제부정세력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은 노동자들을 포섭해 체제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선종은 조선 말 잦았던 재해의 극복을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시행했다. 칙령으로 대규모 치수공사가 진행되었는데, 덕분에 선종의 치세인 1925년 7월에 발생한 광형 6년 폭우 사태 당시 4차례의 대규모 폭우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홍수로 번지지 않은것은 선종의 치수사업 덕이었다. 이렇듯 선종의 치세 이후 한강의 범람과 조선 시대를 통틀어 빈번하게 발생한 대기근은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규모 숙청을 하면서도 전혀 행정의 공백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선종은 매우 과감하 적극적인 내정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를 위해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다.숙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황권 확보였기에, 왕권을 침범할 가능성이 없거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 자체가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

평천하

선종은 즉위 직후 혼란을 수습한 직후, 번국의 질서를 바로세운다. 우선 3.1 폭동이 진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막파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기 위해, 서수평정작전을 단행하여 2년만인 1921년에 마무리했다. 선종실록에 따르면 토막파 세력이 잔존하는 것으로 의심되던 부락을 완전 초토화 시키켰다고 한다. 이때 초토화된 부락에는 한국의 이민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하여 일본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였다.

협화만방

사망

그러나 선종의 치세는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1927년 2월 27일, 귀족원 개회사를 위해 마차를 탄 선종은 이동 도중 만주족 테러리스트의 폭탄 테러로 인해 향년 47세의 나이로 천붕했다. 이 사건으로 어린 황태자가 즉위했으나, 연성지치라 불린 성조와 선종의 치세와는 달리 새 황제 치하의 정치는 혼란에 빠졌고, 사회적으로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으로 말미암은 육군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와 한소전쟁의 패배로 이어지는 암흑기에 접어들고 만다.

평가

선종 시기는 아버지 성조 시대에 이은 번성과 확장의 시기였다. 성조의 치세는 강력한 전제황권을 바탕으로 요동을 수복했고, 대마주를 편입하며, 유구와 일본을 대한의 영향권 하에 두었다면, 선종의 치세는 본격적인 열강국가로써 자신감을 표출하며 1차대전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경기가 활성화되어 신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된 시기였다. 이 시기 대한은 문화와 예술이 크게 성행했고, 전후 승전국으로써의 남양군도를 분할 받았다. 또한 선종은 적백내전에 개입하여 연해주와 화태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하여 흔히 광형 낭만으로 회자되는 대한제국의 첫번째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선종의 치세는 오로지 선종 본인과 같이 유능한 황제가 국가의 모든 사무를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전제 왕권과 선종 본인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게 오늘날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부 경조와 성조가 막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군주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 경조는 왕 - 의정부(대신) - 삼사(대간)로 대표되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복원하였고, 성조는 이를 대한의 상황에 맞추어 황제 - 내각 - 제국의회로 개편하여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완성한 것과 달리 선종은 3.1 폭동을 거치며 이러한 통치구조에 대한 불신을 가졌고, 결국 과거 명, 청 시대의 천자들처럼 황제가 국가의 모든 사무를 직접 결정하는 독재군주정으로 변모시켰다.

물론 선종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체제인 만큼, 선종 본인이 황제로 재위하던 당시에는 정상적으로 기능하여 광형 낭만이라는 대한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재군주정은, 후손들 가운데 선종 본인에 준하는 능력의 황제가 나오지 않는 이상, 측근이나 외척들이 발호하기 너무나도 유리한 구조였다. 물론 선종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서 중추부 산하의 비서원을 대폭 확장하여 보위하게 했지만, 아들이자 후대 황제인 혜종은 국정에 소홀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선종이 설계한 체제는 붕괴하여 혜종 초기인 1920~1930년대에는 측근 중심의 정치가 성행했고, 혜종 말기인 1960년대에서 1971년에는 외척이 발호하는 부작용을 자아내었고, 이러한 문제는 고조대에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야 겨우 해결된다.

여담

선종의 휘인 '壇'은 흔히 단 단자로 읽어지며 대부분의 백과사전도 '단'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단'이라는 발음은 태조의 휘인 단(旦)과 발음이 같아 성조가 선종의 휘를 정할 때, 아에 같은 한자를 쓰는 '소제할 선'이라는 한자로 정하였고, 즉위 이후 피휘를 위해 '소제할 선'의 발음을 '청'으로 고쳤다. 이는 당대부터 사전의 주석에 실렸으며, 이에는 어휘(御諱)라는 주석도 달려있다. 이는 피휘의 전례로 보건데 '선'이라는 발음이 들어간 단어를 전부 개칭하려 했으나 선이 들어간 단어가 너무 많아서 결국 그냥 선종이 소제할 선자의 피휘를 위해 '선'이라는 발음을 '청'으로 고쳤다. 즉, 선종은 피휘를 위해 단에서 선으로, 선에서 청으로 두번이나 한자를 고친 셈이다.

선종 즉위 당시 피휘 문제를 둘러싼 이후에도 대한제국에서 피휘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관례에 학을 떼던 고조가 즉위하고, 피휘가 너무 번거롭고 행정적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아에 피휘라는 제도 자체를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피휘러 가장 불편할 시민들이 '아름다운 고금의 전통을 페지하지 말아 달라'며 대규모 집회와 만인소, 유소를 벌이자, 어쩔 수 없이 피휘중 가장 수위가 약한 방식을 적용하여 어휘(御諱)의 음만 바꾸어 읽는 형태로 피휘의 관례를 수정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예를 들자면 고황제의 휘인 旦(단) 자를 피휘하지 못하는 경우, 같은 뜻인 朝의 발음인 조로 읽는 경우가 빈번한 것처럼 말이다.

가계

대중 매체에서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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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전한 시호는 선종장혜상정화흠승렬문온무녕돈인성경양효황제(宣宗莊惠商貞和欽勝烈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