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대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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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3대 황제 신종 효황제 | 神宗 孝皇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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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훈(李鑫) | ||||||||||||||||||||||||||||
출생 | 1908년 8월 3일 | ||||||||||||||||||||||||||||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 |||||||||||||||||||||||||||||
붕어 | 1972년 8월 21일 | ||||||||||||||||||||||||||||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향년 62세) | |||||||||||||||||||||||||||||
재위기간 | 대한제국 황태손 | ||||||||||||||||||||||||||||
1913년 9월 19일 ~ 1919년 3월 5일 | |||||||||||||||||||||||||||||
대한제국 황태자 | |||||||||||||||||||||||||||||
1919년 3월 5일 ~ 1943년 10월 18일 | |||||||||||||||||||||||||||||
대한제국 제4대 황제 | |||||||||||||||||||||||||||||
1943년 10월 18일 ~ 1970년 8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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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의 제3대 황제. 휘는 훈(鑫)이며, 연호는 천경(天敬),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효황제(孝皇帝)이다.
부황 열종 인황제가 마련한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경제 발전과 군 현대화, 대미 친화외교를 성공시켜 국정을 탄탄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부황과 마찬가지로 황권 강화에 집착하여 반대파에 대한 지나친 탄압과 병약해진 자신의 황권을 지키기 위하여 측근 정치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외척인 강씨 일파의 부패를 방관하여 신종 사후인 1970년대의 정치적 혼란을 제공하여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생애
유년기
1908년 8월 3일 열종 인황제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아버지 열종을 빼닮아 명석한 모습을 보여주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지만, 본래부터 허약하여 잔병치레가 잦았다. 5살때 황태자에 책봉된다.
성년이 된 신종은 부황을 도와 간단한 국사를 처리하며 차기 황제로써 성장한다. 전제군주였던 열종은 신하들을 불신하여 말 그대로 만기친람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너무 혹사하여 1930년대 말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열종은 태자의 시야를 높여준다는 명분을 들어 신종을 섭정에 임명했고, 신종은 1940년대부터 사실상 황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1943년 열종이 붕어하자 황태자였던 신종은 35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한다.
황제 즉위
1943년 10월 18일 열종이 붕어하자 태자는 연호를 천경으로 하여 황위에 올랐다. 신종은 즉위 이후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간을 보던 열종처럼 처음에는 엄정 중립을 고수하려 하였으나, 1943년 10월 13일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10월 30일 연합국으로써 참전한다. 그리고 이때 줄을 잘 선 덕분에 유엔 창설 당시 창립멤버이자 상임이사국으로써 가입할 수 있었다.
2차대전을 겪으며 미국의 저력을 몸소 체감한 신종은 전후 식민제국을 유지하고 제1적국인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전제군주제를 포기하고 여성 참정권 도입과 표면적인 다당제 민주주의를 다시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1949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채결하고 반공정책을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하며 공산주의 확산에 예민했던 미국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을 받아가며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신종은 평면적으로는 외치에만 집중하며 내각에 내치를 일임한 것처럼 행동하였지만, 실제로는 안전기획부와 내부를 통해 정국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었다.
즉위 중반기
1960년대 대한은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 경제 규모 3위에 도달했다. 1964 도쿄 올림픽 개최를 위한 개발붐이 일었고, 올림픽의 성공 개최를 통해 전 세계에 일본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였음을 알렸다.
또한 이 시기 들어서며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점화되어 대규모 데모가 빈번히 발생하여, 대한의 본격적인 데모와 학생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데모는 신종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오히려 신종 말기 전제화와 언론 검열을 비롯한 사회 억압이 강화되는 역효과를 불러왔고, 대한제국 정치의 보수화를 가져왔다.
말년
평소 잔병치레가 잦던 신종은 1950년대 후반 고도성장에 들어서자 자신의 치적에 만족하며 정치보다는 요양에 집중한다. 그러던 1960년 신종의 나이 52세에 경신효황후에게 훗날의 황제가 될 아들을 얻는다. 신종은 어렵게 얻은 늦둥이 아들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다. 소황제가 태어난 즉시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인 1961년 4월 21일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황태자로 정식 책봉했으며, 황후의 외척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후사가 안정되자 신종은 국정보다는 자신의 취미에 집중하고, 열과 성을 다해 황태자의 교육에 힘을 썼다. 황태자도 어릴 때부터 총명함을 들어내어 신종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어릴때부터 허약하고 골초였던 신종은 1969년 말에 폐암 4기로 진단 받았고, 6개월 만인 1970년 8월 21일일 붕어하고 만다.
여담
가계
- 증조부 : 경조 명황제(景祖 明皇帝, 1824년 ~ 1873년)
- 증조모 : 철순명황후(哲純明皇后, 1822년 ~ 1878년)
- 증조부 : 고조 장황제(高祖 章皇帝, 1860년 ~ 1919년)
- 증조모 : 원명장황후(元明章皇后, 1859년 ~ 1888년)
- 정후 : 경덕효황후(敬神孝皇后, 1913년 ~ 1954년)
- 계후 : 경신효황후(敬神孝皇后, 1931년 ~ 1998년)
- 아들 : 회종 애황제(懷宗 哀皇帝, 1960년 ~ 1974년)
- 후궁 : 강빈 유씨(康嬪 柳氏)
- 딸 : 공주 1941년
- 후궁 : 숙빈 박씨(淑嬪 朴氏)
- 후궁 : 혜빈 김씨(惠嬪 金氏)
어록
대중 매체에서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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