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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India समाजवादी संघीय गणराज्य भारत (samaajavaadee sangheey ganaraajy bhaara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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सत्यमेव जयते 진리만이 승리한다 | |||||
상징 | |||||
국가 | 자나 가나 마나 | ||||
연꽃 | |||||
역사 | |||||
인도 공화국 개국 1947년 8월 15일 인도 연방 성립 1977년 3월 2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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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인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영어: 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India, 힌디어: समाजवादी संघीय गणराज्य भारत 사마자와디 상기 가나라지 바라트, 독일어: Sozialistische Föderative Republik Indien)은 남아시아 인도 아대륙 일대에 위치한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비동맹 사회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국가로, 1975년 인디라 간디 총리의 비상선언 이후 체제 전환과 더불어 독자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14년까지 바르샤바 조약의 준회원국이었으나 2014년 회원국 자격이 정지되었다. "신냉전의 두번째 축"으로 미국, 잉글랜드, 중국과 더불어 2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상징
국호
국기
국가
역사
자와할랄 네루의 집권
1947년 개국과 1950년 완전한 공화국 성립 이후 1964년 사망할때까지 인도를 이끈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공화국의 사회주의적 체제에 기틀을 닦았다. 우선 그는 인구 80%에 달하는 힌두교의 영향력을 배제하였고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통해 인도를 연방제 민주주의 국가로 이끌었다. 그는 카스트 제도를 법외화시켰으며, 종교 제도와 국가 제도의 분리를 추구해 이슬람교와 힌두교도의 충돌을 일단락시켰다.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통해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 경제 체제를 도입했다. 이는 대규모의 산업화와 정부 및 공공 부문 주도의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주요한 기간제 사업과 에너지 산업을 국유화시켰다.
농업 부분에서는 토지 개혁을 시도해 대토지 소유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소작농을 보호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인프라 면에서는 대형 댐, 공업 도시 선걸 등 국가 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행하였다. 과학 면에서는 인도 공과대학교(IIT)를 설립하는 등 기초 학문 투자에 매진했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비동맹 사회주의 노선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라트 연방과 미국의 냉전 도중 어느 한 편을 들지 않고 이집트, 시리아, 유고슬라비아 등 여러 중립적 사회주의 국가와 함께 제3세계의 외교적 자주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인도의 외교적 활동은 인도가 신생 독립 국가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1962년 벌인 인도-티베트 전쟁에서는 라트 연방의 지원을 받은 티베트에 패배하면서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인디라 간디의 집권
1964년 네루가 사망하자, 2년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임시로 총리를 맡았다. 이후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1966년 총리직을 겨며쥐었다. 인디라 간디는 네루의 딸로서 총리가 된 것이었기에 초기 리더십이 미약했으며 국민회의의 주요 의원들에게 무시당했다. 또 1967년 총선을 앞두고 루피를 평가절하해 사실상 총선에서 패배했다. 당 지도부와 간디 총리의 갈등은 심해졌고, 대선을 앞두고 간디와 당 지도부가 서로 다른 후보를 지지하면서 여당 인도 국민회의가 분당되었다. 간디를 따르는 이들은 보다 사회주의, 친-라트 연방 색체가 강한 국민회의(R)이었고 간디 반대파는 보다 자유주의, 친-미국 색체가 강한 국민회의(O)였다.
그러나 간디는 카스트 제도의 철폐와 빈곤층 구제의 내용을 담은 "가리브 하타오" 정책을 통해 이미 농촌과 노동자 계급에게 막대한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인도 국민회의(O)의 친제국주의 정책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 결과 1971년 총선거에서 간디를 지지하는 국민회의(R)은 압승을 거두었고 야당은 60여석에 불과한 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뒤이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때 방글라데시를 지원한 인도는 방글라데시를 독립시키는데 성공했다. 파키스탄에 큰 실패를 안겨준 간디 총리의 지지율은 90%대에 육박했고, 사실상 일인 독주 체제에 가까운 상황이 성립되었다. 더불어 1974년에는 미소 짓는 부처라 이름 붙여진 최초의 핵개발 실험을 했다.
사회주의 연방 체제의 성립
1975년, 간디를 견제하던 최고재판소가 선거법 위반을 사유로 간디의 총리직무를 정지시키고자 하자, 인도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간디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모든 정당 활동과 의회 활동을 금지하는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2/3에 달하는 의원들이 구속되었고, 언론 활동에 제약이 걸렸으며, 헌법을 모독하면 구금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뒤이어 인도공산당과 RSS(힌두교 극단주의 단체)가 강제로 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특유의 관료주의가 이 시기 어느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에[2] 간디의 독재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높았다.
1977년 3월, 간디는 국민투표를 통해 인도 공화국 체제를 폐지하고 인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즉 인도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총 94.5%의 국민이 투표에 참여했고 88.5%가 찬성했다. 이에 대해 부정한 투표가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 간디는 공화국 선포 이후 인도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공산당, 공화당, 국민당 등 모든 야당을 통합한 전인도 사회주의 동맹(अखिल भारतीय समाजवादी गठबंधन, 아킬 바라티 사마자바디 가타바단)이라는 유일정당을 설립했다.
또, 민간기업을 철폐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강력한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했고, 수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어 권력 집중을 강화했다. 인디라 간디는 1979년 치러진 첫번째 대선에서 반대자 없이 출마해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인디라 간디의 죽음
인디라 간디는 공산주의 체제 확립 이후 "20년 안에 영국을 뛰어넘고, 40년 안에 미국을 뛰어넘는다"라는 계획 하에 인도 연방 4개년 경제 계획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네루 정권 시기의 5개년 계획 정책을 수정한 것이다. 이는 크리슈나 지역의 원전 개발(크리슈나 원전개발), 우타르프라데시 지역의 중화학공업 단지 유치, 국가 주도의 강력한 인프라 건설 계획 등을 포괄하였다. 총 길이 6만 km에 달하던 철도를 추가적으로 확충해 10만 km로 늘렸고, 기차가 모두 정시에 도착하도록 하였다. 만약 정시에 도착하지 못하면 기관사를 엄중히 처벌케 했다.
1973년과 1979년 두차례의 오일쇼크에서 인도는 만주의 다칭 유전으로부터 나오는 석유를 수입함과 동시에 크리슈나 원전 개발 사업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1981년 제1차 4개년 계획 완료 당시 인도의 경제 성장률은 목표치였던 5.6%를 뛰어넘은 7.8%였고, 실업률은 2.1%p 감소했으며, 빈곤율 역시 크게 감소했다. 중앙집권적 경제 통제의 덕택이었다.
또한 종교를 크게 탄압했다. 여기에는 공과 과가 있으며, 공으로는 카스트 제도를 뿌리뽑은 것을 들 수 있다. 카스트 제도를 암시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불가촉천민 및 하위 카스트 대한 어퍼머티브 액션을 실시했다. 그러나 소수종교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펀자브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시크교도들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인도 정부는 시크교도들의 커뮤니티를 타겟해 시크교 게토를 세우고, 일부를 히말라야의 교화소로 압송했는데, 현대 시크교도들은 이를 시크교 판 홀로코스트라고 비난한다.
정점으로 인디라 간디는 1984년 시크교 독립운동 세력을 억누를 목적으로 암리차르 황금사원을 공격하는 블루 스타 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으로 최소한 5,000명 이상의 시크교도들이 숨진 것으로 생각된다. 시크교도들은 분노했고, 1984년 10월 31일 간디 대통령이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암살당하며 인디라 간디의 18년에 대한 통치가 종식되었다.
라지브 간디 체제와 스리랑카 내전 개입
1984년 사망한 간디를 대신해 그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역시 반대 없이 제2대 연방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소니아 간디의 개혁개방 정책
1991년 라지브 간디의 사망 이후, 그의 아내 소니아 간디가 대통령직을 계승한다. 소니아 간디는 탈냉전의 정서에 발맞춰 라트 연방의 일극 체제를 인정하고, 종전과 다른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국가자본주의적 측면을 완전히 배제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종전까지 이루어진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다당제 사회주의와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다. 1999년 대선부터 다당제와 직선제가 실시되었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라트 연방과 우호 관계를 증진하여 1999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준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상호 교류를 추구했다.
신냉전의 두번째 축이 되다
지리
시간대
인구
민족구성
정치
대통령
인도 연방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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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선거
- 직선제 및 다당제 전환 이전 (~1999년)
- 직선제 및 다당제 전환 이후 (1999년~)
1999년 인도 연방 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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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비고 |
소니아 간디 (सोनिया गांधी) |
전인도 사회주의 동맹 (BSG) | 293,970,667 | 86.43% | 당선 |
하르키샤 싱 수르지트 (Harkishan Singh Surjeet) |
인도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 공산당 (CPI-MR) | 25,679,492 | 7.55% | 낙선 |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अटल बिहारी वाजपेयी) |
라시트리야 스와얌세박 상 (RSS) | 20,475,568 | 6.02% | 낙선 |
계 | 총 유권자 수 | 619,536,847 | 총 투표 수 | 340,125,729 |
외교
라인관계
신냉전을 이루는 두 축 중 상대로서 대립하고 있다.
- ↑ 경제적 민주성 6.6점, 전위당의 기능성 2.4점, 직접민주 참여도 4.3점, 정치경제적 평등함 6.5점, 의사결정의 절차성 3.2점
- ↑ 대표적으로 열차 운행이 있다. 이전까지 인도에서는 열차 정시 도착이 드물었으나, 인디라 간디가 정시에 도착하지 못하는 기관사들을 히말라야 노동교화소에 가두었기에 이 문제는 곧바로 시정되었다. 현재도 인도 열차는 초 단위로 제 시간에 정차하기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