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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 大東亜評議会社会主義国家連盟 Union of East Asian Soviet Socialist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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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国の労働者よ、団結せ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955~2003) | ||||||||||||||||
상징 | ||||||||||||||||
국가 | 보병의 본령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 | |||||||||||||||
봉황 | ||||||||||||||||
벚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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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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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LD | ||||||||||||||||
.ea | ||||||||||||||||
국가 코드 | ||||||||||||||||
392, EA, JAP, JP | ||||||||||||||||
전화 코드 | ||||||||||||||||
+81[10] |
개요
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일본어: 大東亜評議会社会主義国家連盟)은 1936년부터 2003년까지 동아시아에 위치해있던 사회주의 국가였다. 약칭 아련으로도 알려져있다. 냉전시기 제3세계의 종주국가로 활약했던 국가로 알려져있다.
일련의 하급 군장교가 일으킨 2월 혁명(쇼와 유신)으로 성립되었으며, 소련, 몽골, 투바에 이은 세계의 네번째 사회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非마르크스주의 노선인 천황제 사회주의, 사회주의적 국가주의를 채택하여 소련과 동맹 관계를 맺지 않았으며, 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지 않았다. 전후 아련은 미국과 소련을 이은 세번째 축으로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인도, 유고슬라비아와 함께 비동맹 사회주의 노선을 대표하는 국가로 자리잡았다. 스즈키 모사부로 국무경의 집권 기간인 1955년부터 1965년까지는 친소련 반서방 외교를 표방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주요 정책이었던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1965년 니시오 스에히로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면서 서방 쪽에 기운 비동맹 사회주의 국가로 되돌아갔다. 그럼에도 내부적으로 공산주의 정책을 추구하며 강력한 집산주의적 경제 체제를 유지했다.
1980년대 사회주의 경제의 한계로 인해 점차 체제의 한계를 맞이했으며, 1981년 니시오 국무경의 사망과 1987년 보수파 나카소네 야스히로 국무경의 퇴임으로 집권한 공산회 개혁파의 지도자 도이 다카코가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공산권이 붕괴된 해인 1989년, 신연맹헌법이 시행되면서 다당제와 의원내각제가 시행되며 사회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마무리지었다. 1990년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아시아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민주진영이 개헌 저지 의석을 확보하며 대동아공산회가 이끄는 일당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1992년, 국민투표를 거쳐 조선과 만주가 독립하자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으며, 1993년 처음으로 비공산당 계열인 동아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집권하며 자본주의적 체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급격한 자본주의 도입으로 정치,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면서 국가 유지가 어려워졌고, 2003년 마지막 가맹국이었던 대만이 오사카 조약을 통해 독립하게 되면서 아련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이끄는 일본국 정부가 아련의 정부 조직을 계승했다.
상징
국호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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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 |
영어 | Union of East Asian Soviet Socialist States; UEA[11] Union of Greater East Asian Socialist States; GEA[12] |
화어 | |
조선어 | 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
프랑스어 | Union des États socialistes soviétiques d'Asie de l'Est |
러시아어 | Союз Восточно-Азиатских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Государств |
스페인어 | Unión de Estados Socialistas Soviéticos de Asia Oriental |
아랍어 | اتحاد الدول الاشتراكية السوفيتية في شرق آسيا |
가장 잘 알려진 공식 국호는 대동아 평의회 사회주의 국가 연맹(大東亜評議会社会主義国家連盟)으로, 1937년 대동아 사회주의 헌법 발효 이후 1994년까지 사용하였다. 영어로는 Union of East Asian Soviet Socialist States라고 불렀다. 평의회를 Soviet로 번역한 것인데, 소련과의 외교 관계가 긍정적이었던 1955년부터 1965년까지는 아련 내에서도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으나 1966년부터 공식적으로 Union of Greater East Asian Socialist States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요구했다.
약칭은 아련 혹은 동아련으로, 당시 아련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 내에서도 이러한 명칭이 줄곧 사용되었다. 영어 약칭은 이스트아시아의 약자인 EA를, 혹은 동아연방이라는 의미의 UAE를 사용했다. 그냥 동아시아, 혹은 East Asia라고만 칭하기도 했다.
아련의 모태가 된 국가인 일본(日本, Japan)이라는 비공식 국호도 자주 사용되었다. 이는 소련이 러시아로 불렸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아련 전체가 일본은 아니었지만, 일본계가 정치와 경제, 인구 수 등에서 모두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다당제 시행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사회주의적 요소가 소멸하고, 조선과 만주가 독립하며 더는 제대로 된 연맹 기능조차 할 수 없게 된 1994년부터는 수상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제안으로 대동아 국가 연맹(大東亜国家連盟)으로 공식 국호를 변경했으며, 일본-대만 국가연합(日本 - 台湾国家連合)이라는 비공식 국호도 사용하였다. 이 국호는 1994년부터 2003년까지 9년간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용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 국호는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
국가
국기
일장기 (1936~1957) |
노농적기 (1957~2003) |
1936년부터 1957년까지는 기존 일본 제국의 국기인 일장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구 제국과의 단절을 나타내고,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기 위해 1957년 새로운 국기가 제정되었다. 1955년 집권한 스즈키 모사부로는 동아련만의 새로운 사회주의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여러 상징물을 추가하기를 원했고 소련의 국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새로운 국기를 고안해, 2년 후 절차를 거쳐 국기로 지정하였다.
1957년부터 지정된 새 국기는 공식 명칭으로 노농적기(労農赤旗; 로-노-아카하타)[13]로, 영어로는 단순히 "Rising Sun Flag with Hammer and Sickle"(낫과 망치가 그려진 욱일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대중적으로는 고안자인 스즈키 모사부로의 이름을 따 스즈키의 깃발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이 깃발은 스즈키가 축출된 1965년 이후로도 계속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1993년 이후로도 이념과 무관한 국가적 상징물로서 계속 사용되어 결국 멸망때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디자인을 보자면 낫과 망치가 일본의 오랜 상징인 욱일 문양과 함께 그려진 국기이다. 구체적으로 디자인은 욱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욱일기는 일본과 아련의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로 오래 사용되어왔으며, 나아가 대동아공영권을 상징하였다. 스즈키 국무경은 이를 "천하를 하나의 집으로 삼는(팔굉일우) 아시아의 협화적 사회주의를 상징"한다고 설명하였다. 상단에 그려진 빨간 선은 이러한 팔굉일우가 세기를 넘어서 1,000년 이상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된다.정작 100년도 못갔다
여담으로, 그루지야 SSR의 국기에서 색상만 바꾼 것과 디자인이 거의 비슷하다.[14]
역사
2월 혁명, 쇼와 유신
1867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독자적인 개화를 이룬 국가가 되었다. 일본은 서구식 의회제와 경제 체제를 도입해 빠르게 국제적 강국으로 올라섰으며, 1894-1895년의 청일전쟁과 1904-5년의 러일전쟁을 통해 국제 사회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일본제국은 1895년 대만을, 1910년 조선을 합병하며 비서구권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체제의 모순도 가중되고 있었다. 우선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2,000년간 일본 경제를 부양하던 농업이 급격히 몰락, 인구의 절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또한 소작 제도도 폐지되지 않아,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응하여 데라우치 총리가 시베리아 원정을 단행하자, 식량난이 가중되었고, 결국 체제의 모순이 폭발하여 쌀소동이 일어났다. 쌀소동의 결과로 1920년대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불안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다.
허나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하부구조의 불평등함을 그대로 둔 채로 상부에서의 정치 개혁만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명확했다. 1920년대 내내 식량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쌀을 공출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 내의 쌀 값이 진정되었지만, 한편으로 쌀 가격이 폭락하며 일본의 농민들은 극도의 빈곤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또,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진재공황, 정경유착에 의한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 금본위제 복귀 여파와 금해금으로 인한 1930년의 쇼와공황 등 공황이 연이어 발생하며 일본 경제는 침체되었다. 정치도 불안정해졌다. 1928년 총선거에서 입헌민정당과 입헌정우회 양당의 의석 차이가 1석에 불과하게 되면서 정권 불안 요소가 가중되었다.
이로 인한 사회 모순이 극대화되었고, 군부도 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군부는 통제파와 황도파로 양분되어있었다. 통제파는 다시 도조의 정통한 통제파와 이시와라의 만주파로 나뉘었다. 만주파는 만주의 완충지대화와 비소련 정책을 견지하긴 하였으나 만주파와 중앙 통제파 모두 귀족주의, 보수주의, 친-자이바츠, 반서방주의, 지소련주의 등에서 일치를 보았다. 통제파는 중국, 미국과 전쟁을 하며 소련과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한다고 본 팽창주의자들이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반면, 황도파는 대표적으로 빈한한 지역이었던 도호쿠 지방의 청년 장교와 하급 군관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계급적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주의 쪽에 치우쳐지게 되었다. 이들은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결속주의를 옹호하고 사상가 기타 잇키가 내세운 순정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이들의 사상은 궁극적으로 극렬한 존황주의에 있었으며, 천황을 위해 자이바츠, 기득권, 통제파 군부 등의 기성 세력을 몰아내야한다는 존황토간 이념을 내세웠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중국과 화친하고, 친서방을 표방하며, 소련을 정벌해야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통제파와 황도파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가운데 점차 판도는 통제파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아라키 사다오가 이끄는 황도파 장교들은 대체로 기득권의 아웃사이더였기에 관료직을 맡은 경험이 부족해 무능했으며, 이는 황도파가 통제파에 비해 군 수뇌부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게다가 아라키가 1934년 알코올 중독 문제로 육군대신직을 사임하고, 후임자이자 마찬가지로 황도파였던 마사키 진자부로도 츠지 마사노부 등 통제파의 모략으로 쫓겨나면서 중앙관직에서 황도파가 배제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통제파의 전횡에 저항하기 위해 황도파는 1936년 2월 26일 급작스럽게 통제파를 숙청하는 2.26 사건을 기획했다. 2.26 사건은 후일 2월 혁명으로도 불리게 된다. 2.26 사건은 통제파로 기울어져가고 있던 상황을 반전시켰다. 황도파 장교들은 총리 오카다 게이스케, 내대신이자 전 총리대신,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 대장대신이자 전 총리대신인 다카하시 고레키요, 외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 등을 총살했다.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대신 등 제거 대상으로 지목되지 않은 이들은 상대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부 군 고위급 인사와 야스히토 친왕은 2.26 혁명을 지지하고 있었다. 쇼와 천황도 청년 장교들의 "의거"에 감복하여 유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로서 2.26 사건은 성공으로 마무리되었으며, 히로히토 덴노의 재가를 통하여 기타 잇키를 신설된 직위인 국무경에, 마사키 진자부로 전 육군대신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하며 새로운 황도파 정권이 수립되었다. 명목상으로 총리는 마사키였으나 실질적 권한은 기타에게 있었다.
기타의 집권
기타의 급서, 국제사회로 나아가다
스즈키의 십년 천하
니시오의 비동맹주의 노선
니시오 사후, 혼란의 80년대
도이 개혁과 다당제 전환
시장경제 도입, 90년대의 침체
멸망
- ↑ 전체 면적의 75%를 차지하던 만주와 조선이 1992년 독립하면서 해체 직전에 영토가 대폭 줄어들었다.
- ↑ 신토가 종교에 포함되지 않은 통계로, 실질적으로는 국민의 60% 이상이 토착 종교인 신토를 믿었다. 기독교 신자의 90% 이상이 조선인이었으며, 불교도는 화인이 과반 이상을 차지해 민족별로 믿는 종교가 상이하게 나타났다.
- ↑ 해체 직전에는 자본주의화로 인한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이 수치가 상당히 낮아졌다.
- ↑ 법 상으로 천황은 국가원수가 아니었으며 상징적인 지위였다. 1936년 이후 군통수권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에도 막부 시대의 상징적, 종교적 존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 부분은 1989년 개헌을 통해서도 바뀌지 않았다.
- ↑ 다당제 전환 이후에도 공산회가 이름을 바꾼 민주사회당이 1993년까지 집권했다. 1993년 선거에서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동아신당이 집권하게 되면서 공산회 계열 정당의 집권이 마무리되었다. 다만, 하시모토 류타로와 모리 요시로를 중심으로 한 구 공산회 보수파가 일본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당세를 회복, 아련 해체 직전에 집권에 성공하기도 했다.
- ↑ 소련에 근소하게 뒤지는 3위로, 소련 경제가 막장이 된 1987년부터 1992년까지는 아련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조선과 만주가 독립한 후 인구 수가 크게 줄면서 국내총생산도 줄어들어 해체 직전에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 ↑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으로, 중진국의 최고~선진국의 최저 사이였다.
- ↑ 탈공산화된 헝가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중진국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1990년대 자본주의화 혼란의 영향으로 지하경제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실질 소득은 이보다는 높아서 스페인 수준은 되었다..
- ↑ 1989년부터는 서력기원을 병행해 사용했다.
- ↑ 아련 해체 이후 일본이 이 코드를 사용하고 있다.
- ↑ CIA와 미국 국무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명칭
- ↑ 아련 외무성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명칭
- ↑ 직역하자면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깃발"이라는 뜻이다.
- ↑ 정작 제작자인 스즈키는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