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보수 정당 | |||||
| (창당) | → | 대한국민회 | → | (신설 합당)
| |
(개별 합류)
| |||||
(흡수 합당)
|
→ | ||||
| |
| 대한국민회 | |
|---|---|
| 한문명 | 大韓國民會 |
| 영문명 | Korean Nationalist Assembly (KNA) |
| 창당일 | 1918년 1월 10일 |
| 전신 | |
| 흡수한 정당 | / 1919년 흡수합당 |
| 분리된 정당 | / 19■■년 분당 |
| 해산일 | 195■년 ■월 ■일 |
| 후신 | 틀:신한국당 (개화) |
| 역대 총리 | 이승만 / 제8대 • 1918~1925 손정도 / 제9대 • 1925 김창암 / 제15대 • 1940~1944 |
| 총재 | 이승만 / 초대 윤보선 / 말대 |
| 이념 | 국민보수주의 가부장적 보수주의 한국 내셔널리즘 |
| 스펙트럼 | 우익[1] |
| 국민의원 | 68석 / 300석 (22.7%)[2] |
| 당기 | |
| 당색 | 남색 (#254170)
|
개요
| 대한국민회 창립대회[3] |
1918년부터 195N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
역사
개화당의 이승만계와 민중파는 당 영임이자 총리였던 서재필과 갈등을 겪다가 탈당하여 대한국민회를 창당하얐다. 초대 영임으로은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후 1919년 총선에서 개화당을 꺾으면서 보수당과 연립정부를 구성, 이승만을 통리로 하는 제 1차 이승만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후 1921년 선거에서는 아예 단독과반을 확보하여 국밍회 단독으로 제2차 이승만 내각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의 독단적인 당 운영에 불만을 품고, 수십 명의 중의원들이 집단으로 탈당해 중도우파 성향의 대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어진 1924년 총선에서 좌익정당인 사회당의 약진으로 국민회와 자유당[4] 모두 과반 확보에 실패하면서 국민회, 자유당 그리고 민주당은 사회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민국연합'이라는 이름의 대연정을 꾸렸고, 국민회의 이승만을 총리로, 자유당의 안창호와 민주당의 송병조를 부총리로 하는 제 3차 이승만 민국연합 내각이 출범한다. 이후 국민회와 내각의 각종 실책으로 국민회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1927년 이승만 총리는 중추원 해산을 단행했다. 이어 치러진 조기총선에서 민국연합은 과반 사수에는 성공하였으나 국민회의 의석 감소로 인해 자유당과 국민회의 의석 수가 역전당했다. 이로 인해 이승만이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당 영임직에사도 사퇴하면서 부영임인 손정도가 영임대행에 취임하였다. 이후 안창호를 총리로 하는 안창호 민국연합 내각이 출범했다. 직후 치러진 국민회 임시전당대회에서 제 2대 영임으로 이시영이 선출되었고, 국민회 몫의 부총리 역시 부영임 손정도에서 새 영임인 이시영으로 교체되었다.
이념 및 성향
리워크 예정
대한국민회는 민족주의, 보수주의 성향의 우익 정당이었다.
역대 지도부
역대 선거 결과
리워크 예정
| 연도 | 지도자 | 의석수 (의석율) | 의석증감 | 지위 | 비고 |
|---|---|---|---|---|---|
| 1918 | 이승만 | 92 / 200 (46%)
|
여당 | ||
| 1919 | 139 / 250 (56%)
|
여당 | |||
| 1923 | 122 / 250 (49%)
|
여당 | |||
| 1926 | 손정도 | 80 / 250 (32%)
|
야당 | ||
| 1930 | 이시영 | 87 / 250 (35%)
|
야당 | ||
| 1934 | 63 / 250 (25%)
|
야당 | |||
| 1935 | 함태영 | 74 / 300 (25%)
|
연립여당 | [5] | |
| 1938 | 김창암 | 80 / 300 (27%)
|
연립여당 | [5] | |
| 1945 | 윤치영 | 65 / 300 (22%)
|
야당 | [5] | |
| 1947 | 이범석 | 72 / 300 (24%)
|
야당 | [5] | |
| 1951 | 61 / 300 (20%)
|
야당 | [5] | ||
| 1954 | 윤보선 | 90 / 400 (23%)
|
야당 | [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