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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진보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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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 | → | 신민당 | → | 신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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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구회 (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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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신당 (흡수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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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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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 | New Democratic Party |
슬로건 | 신민당의 새로운 시작, 다시 국민 속으로! |
창당일 | 1854년 6월 20일 (개화당) |
당명 변경 | 1935년 3월 15일 (신민당) |
통합한 정당 | 국민신당 (2030년 5월 3일 흡수합당)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73 (도화동) | |
의장 | 윤차민 / 7선 (68~74대) |
사무총장 | 변백현 / 5선 (70~74대) |
원내총무 | 민의원 / 6선 (69~74대) |
정책위의장 | 이정미 / 9선 (66~74대) |
의회원 의원 | 224석[1] / 500석 (44.80%) |
광역단체장 | XX석 / 27석 (XX.XX%) |
기초단체장 | XXX석 / 370석 (XX.XX%) |
광역의원 | XXX석 / XXX석 (XX.XX%) |
기초의원 | XXXX석 / XXXX석 (XX.XX%) |
당색 | 빨간색 (#C9151E)[2] |
주황색 (#DC352A)[3] | |
정책연구소 | 신민연구원 |
청년조직 | |
국제조직 | 진보동맹 |
후원회 | 신민당중앙당후원회 |
정당원 수 | |
권리당원 수 | 2,886,545명 (제36차 정기당대회 기준) |
정당보조금 | 11,500,046,000원 (2031년 1분기, 천원 단위 반올림) |
당비 수입 | 52,513,642,348원 (2030년 1월 1일~2030년 12월 31일) |
당가 | 신민당가 |
공식 사이트 | |
SNS | | | | | |
개요
신민당은 대한제국의 진보정당으로 대한제국의 제1야당이다.
1854년 박규수의 주도로 개화당이 창당되었으며, 1935년 김원봉이 개화당 총재가 되면서 당명을 신민당으로 변경하였다. 21세기 들어 이낙연 등 친노 세력이 참여연구회를, 안철수 등 친안 세력이 국민신당을 창당하며 분열되었으나, 2030년 국민신당이 다시 신민당에 흡수되었다[4]. 한국 진보정당의 계보를 잇는 적통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제국 진보 세력의 대표 정당이다.
신민당은 의원, 당원, 지지자의 구성이 매우 다양한 정당이다. 관료 출신 은명원의 중용회를 필두로 한 온건보수 계열부터 시작해서 당권파 윤차민의 선진회 등 중도진보 계열, 이정미, 김재연 등 진보 계열까지 매우 다양하다.
당명
- 한국어: 신민당
- 영어: New Democratic Party
- 중국어
- 정체자(번체자): 新民黨
- 정체자(간체자): 新民党
- 표준중국어 발음
- 한어병음: Xīnmíndăng
-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법: 신민당
- 일본어
- 구자체 한자 사용: 新民黨
- 신자체 한자 사용: 新民党
- 발음 표기
- 가나 표기법: しんみんとう
- 헵번식 로만자 표기법: Shinminto
- 일본어의 외래어 표기법: 신민토
1935년 당명 변경 당시 자유인민당, 신정당, 민중당, 민정당, 평민당, 신민당 등의 당명 후보들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자유인민당은 당내 젊은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창당 당시만 해도 당내 우파를 자처하며 김원봉 집행부에 반기를 들었던 신익희가 공산당과 다를 게 없다며 격하게 반대해 당명이 신민당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신민당 홈페이지에는 당명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혁신하고 진보하는 당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설명돼있다. 새롭다고 하기엔 당이 너무 틀딱이다. 자유당과 더불어 당명이 간략하기에 공식 약칭은 없으나, 여론조사 및 언론 등에서 2음절 약칭을 사용할 때에는 주로 신민이라고 표기된다. 영문 명칭은 New Democratic Party이다.
당색 및 로고
신민당 당색 및 로고 변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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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로고 (1935~2024) | 신 로고 (2024~현재) |
개화당 시절부터 당색으로 주황색을 사용해왔던 것으로 전해지며, 당명 변경 이후에도 2024년까지 주황색(#DC352A)[5]를 사용했다. 그러나 2024년, 제69대 의회원 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당시 총재가 당 이미지 쇄신[6]을 목표로 로고를 변경하면서 당색도 로고에 맞춰 빨간색(#C9151E)으로 바꾸었다. 로고를 만든 한선우 홍보본부장은 빨간색이 신민당의 새 동력과 개혁적 성향수박저격, 활력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로고 또한 기존에는 워드마크였으나, 2024년 한선우 홍보본부장의 주도로 바뀌었다. 한선우 홍보본부장은 "새 로고는 모양이 다른 두 개의 원이 모아지는 모습으로, 여러 계층이 화합하며 더 나은 대한제국을 만든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당가
당사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위치한 중앙당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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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당시에는 한성부 종로구 안국동에 중앙당사가 위치해있었으나, 1960년대 이후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한 경기도당 당사가 실질적인 당사 역할을 하였다. 마포 당사는 서울특별시 출범 이후에는 마포 당사가 중앙당사 역할을 하고 있다.
마포 당사는 1979년 5월 29일 준공되었으며, 지하 1층 지상 5층, 건평 649평 대지 908평 규모이다. 당사가 마포에 지어지자, 안국동 당사를 관할하던 한성경찰청 경찰관들은 "마포경찰서가 이제 좀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는 가십기사가 났다. 이 말은 김대중이 의장에 당선되며 현실이 됐다.
마포 당사는 YH무역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1979년 8월 9일 직장폐쇄에 항의하는 YH무역 여공 170여 명이 마포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을 벌이다 여공 김경숙 씨가 경찰 진입 과정에서 추락사하며 정국을 파국으로 몰아갔다. 김대중 의장과 당의 관계자들이 농성장을 지켰으며, 여당에서도 비주류[7]의 김영삼 의원이 강력히 항의하며 큰 논란이 됐었다.
시도당사
역사
창당
한국공산당과의 연대를 통해 정권을 수립한 이동휘 정권에 대한 비토 정서로 1929년 치뤄진 제30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개화당은 조만식을 위시한 수구당에 정권을 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휘와 당권파는 계속해서 극좌적 행보를 이어왔고, 결국 제31대 의회원 의원 선거, 제32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자당 출신의 이승만[8]에게 줄줄이 참패하며 개화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운동을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김원봉은 이동휘의 극좌적 행보를 비판하고 우파 또한 포용할 것을 주장하며 온건한 모습을 보였고[9], 얼마 지나지 않아 개화당 총재 선거에 출마, 세대교체 여론에 힘입어 1934년 37세의 나이로 개화당 총재가 된다.
총재가 된 김원봉은 개화당의 당명을 지금의 신민당으로 바꾸었다. 당명 변경 과정에서 당내 원로 세력들이 당의 정체성을 지우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이미지 쇄신에 대한 김원봉의 강한 의지에 의해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김원봉은 전세계를 뒤덮은 대공황 상황에서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발맞춰 이승만에게 공공개발아문 설립을 요구하며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35년 치뤄진 제33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얻으며 집권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김원봉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거국내각을 주장하며 자유당과 연정을 맺었으나 1938년 자유당이 연정에서 탈퇴하며 국정 운영 동력이 사실상 상실되었고, 곧바로 이루어진 1938년 제34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다시 자유당에 과반 의석을 내준다.
총선 참패 이후 사퇴한 김원봉의 뒤를 이어 의장이 된 신익희는 당내 우파를 자처해왔으며, 김원봉을 매우 강하게 견제해오던 사람이었다. 신익희는 좌파적 색채를 띄고 있던 김원봉과 달리 우파 정책들을 상당수 내놓으며 민심 회복을 목표로 하였으나, 자유당의 전쟁 극복 여론과 전쟁영웅 지청천의 개인적 인기에 맥을 못 추리게 된다. 결국 1941년 치뤄진 제35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본인 역시 자유당 지청천에게 털리며 사퇴한다.
신익희에게 호되게 당하고 난 후 김원봉은 당권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통해 의장의 자리에 오른 여운형은 제2차 세계 대전 승전에 즈음하여 높은 지지를 얻고 있던 지청천 전시 내각과 자유당을 향해 경제 문제를 제기하며 패색이 짙었던 제37대 의회원 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총리가 되었으나, 총리가 된 지 2년 만인 1947년에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김원봉은 여운형에 대한 추모 여론에 힘입어 여운형 사태로 치뤄진 제38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초압승하며 다시 총리의 자리에 올랐으나, 거창했던 공약과 달리 전후 재건 정책에 있어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며 김구를 필두로 성향이 온건화된 자유당에 1년 3개월 만에 정권을 빼앗긴다.
이후 김구와 그의 뒤를 이어 집권한 정지원에 의해 신민당은 상당한 혼란을 겪었으며, 급격히 좌경화되어 백남운, 김두봉 등 극좌 인사들이 의장을 맡게 되었으며, 내홍을 겪는다. 이 때의 내부 분열로 인해 이승만의 실책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총리가 된 조봉암 또한 당내 우파 성향의 서상일, 좌파 성향의 김두봉에게 배신을 당하며 1년 만에 총리직을 내려놓는다.
장기간의 내홍 끝에 신민당은 장면을 의장으로 선출, 이승만의 초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에 힘입어 정권을 다시 교체한다. 이때부터 장면과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세력구도가 형성되었으며, 이후 약 10년 간 안으로는 장면과 윤보선의 대립, 밖으로는 이승만, 이승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이범석과의 대립 구도를 이어오며 자유당과 정권을 주고받아왔다.
1970년대
1970년대는 박정희의 시대였다. 전후 재건을 강력히 주장하며 집권한 박정희의 8년간의 집권 기간동안 신민당은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줘왔다. 꼭두각시 의장 이철승 사이에서 계파 갈등을 이어오던 장면과 윤보선은 공개적으로 반목하며 분열하였고, 대여투쟁에는 사실상 무관심했다.
이에 1977년 김대중은 장면과 윤보선의 동반 퇴진, 혁신을 내세우며 의장에 당선되었고 혁신을 주도한다. 김대중은 비록 1978년에 치뤄진 제50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이뤄내진 못하였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보여주며 재신임되었고, YH 무역 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진 전두환을 상대로 맹공을 펼치며 신민당의 지지세를 회복시켰다.
1980년대
1980년 3월 20일 황제의 붕어 이후 제50대 의회원이 해산되었는데, 제51대 의회원 의원 선거 선거기간 중 전두환이 황실 모독 발언을 한 사실이 밝혀지며 김대중은 예상을 뛰어넘는 초압승을 거둔다. 정권교체 후 자유당에는 전두환에 의해 축출되었던 김종필이 돌아왔는데, 김대중은 당내 반대 세력에 맞서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김종필은 민정계 잔존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연정을 맺고 협력한다. 각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동맹 관계였던 것이다[10]
김대중은 1986년 김종필에 의해 정권을 빼앗긴 뒤에도 한광옥을 의장으로 만들어 막후 정치를 이어왔으며, 비토 세력의 의견을 철저히 묵살하며 당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1990년대
1990년대는 3김[11]의 시대였다. 신민당은 1992년 정권교체를 이뤄내며 집권당이 되었으나, 천신정 등의 정풍운동으로 김대중의 독주가 끝날 위기에 처해있었으며, 자유당의 김영삼과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연합의 행보가 매우 안습한데, 1995년 제57대 의회원 의원 선거 이후에는 신민당과 김대중을 도왔으나 2년 만에 팽당했고, 1999년 즈음부터는 김영삼을 도왔으나 2000년 제59대 의회원 의원 선거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또 팽당한다.
이러한 핑퐁 게임이 이어진 끝에 2000년대를 앞두고 결국 김대중의 1인 독주 체제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1998년 정권을 빼앗기고 난 후 자유당 출신의 이인제, 김대중의 가신 한화갑이 차례로 의장을 맡았으나 그닥 성과를 거두진 못한다.
2000년대
2000년대 들어 동교동계와 그 추종 세력의 독주에 피로감을 가진 당원들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었고, 2001년에는 노무현이 기적적으로 한화갑을 제치고 의장이 되며 마침내 신민당 계파 구도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노무현은 이듬해인 2002년에 열린 제60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된다.
그러나 노무현의 의장 당선과 총리 취임 이후에도 동교동계의 견제는 계속되었으며, 특히 2004년에는 노무현의 여러 과격한 발언을 규탄하며 한화갑과 자유당이 연합하여 노무현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키는 '한화갑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노무현은 불신임안 통과에 가담한 인사를 전원 징계[12]함과 동시에 의회원을 해산하였으며, 2004년 연말에 열린 제61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 초압승을 거두며 위태로웠던 당내 입지를 회복한다. 우정해산 원조
하지만 여러가지 논란으로 인해 지지율이 2년 만에 또다시 곤두박질치며 당 안팎으로 해산을 강요받았고, 노무현이 울며 겨자먹기로 의회원을 해산하여 치뤄진 2006년 제62대 의회원 의원 선거에서는 박정희 전 국무총리대신의 딸 박근혜 자유당 총재가 총리가 되며 정권을 빼앗긴다.
정권을 빼앗긴 후로는 정동영, 정세균, 한명숙 등이 차례로 의장직에 올랐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박근혜-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10년간의 장기 집권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신민당의 최대 암흑기였다.
2010년대
2020년대
2030년대
비판 및 논란
소속 의원
계파
역대 당대회
역대 지도부
출신 국무총리대신
신민연구원
상임고문단
지지 기반
역대 선거
다른 정당과의 관계
청년신민당
여담
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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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구 194석, 비례대표 30석
- ↑ 2024년 제69대 의회원 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의장이 로고를 변경하며 빨간색을 당색으로 지정하였다.
- ↑ 기존의 당색으로, 로고 변경 이후에도 사용하고 있다.
- ↑ 안철수는 훗날 또다시 탈당하여 자유당으로 이적한다.
- ↑ 1960년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는 색상이다. 1960년대 이전에도 비슷한 톤의 색상을 사용했다.
- ↑ 이낙연 국무총리대신의 실정으로 당시 지지도가 크게 하락했었다.
- ↑ 당시 전두환이 자유당 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영삼과 전두환은 엄청난 앙숙 관계였다. 전두환이 김영삼을 당에서 제명하기도 하였으며, 김영삼 또한 야당 의장인 김대중과 적극 협력
내부총질하며 이에 맞섰다. - ↑ 이승만은 본래 개화당에서 정치를 시작하였고, 개화당 총재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나 첫번째 총리 임기동안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어 불신임안이 통과되는 등 당내에서 사실상 축출되었고, 이에 수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결과적으로 이동휘의 극좌적 행보는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재기하여 수십 년간 보수 진영의 대표 주자의 자리를 지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 김원봉 본인 또한 좌익의 대표 인사로 유명했으나,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온건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 물론 1984년 제52대 의회원 의원 선거 이후 당을 완전히 장악한 김대중에 의해 연정이 와해되기는 한다.
김종필은 이때부터 줄줄이 배신당한다. - ↑ 3당(신민당, 자유당, 자유민주연합의 영수였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의미한다.
- ↑ 한화갑 등 핵심 인사는 무려 제명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