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립정부 (민국 38)

Sindan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0월 11일 (토) 11:57 판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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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대한민국 (민국 38)의 기 대한민국김영환[1], 오세훈[2].
이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들의 대표들이다.
왼쪽부터 서독의 기 서독프란치스카 브란트너[3], 올라프 숄츠[4].
이들은 현재 서독의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들의 대표들이다.

개요

연립정부(聯立政府, coalition government) 혹은 줄여서 연정은 둘 이상의 정당이 연합하여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다당제 국가에서 원내 단독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제1당이 안정적인 집권을 위해 다른 정당들과 연합하며 구성된다. 통상적으로 양당제보다는 다당제 하에서, 대통령제 국가보다는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연정이 구성될 확률이 높다. 즉 연정은 주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다당제 국가에서 자주 구성된다.

유형

연정은 참여하는 정당들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소연정과 대연정의 둘로 나뉜다.

소연정은 비슷한 이념을 가진 정당들이 연합하여 정권을 창출하는 경우로 가장 통상적인 경우의 연정이다. 국내의 민주자유당 - 청우당 연정과 사회민주당 - 한국공산당 연정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며 해외의 경우 서독의 CDU/CSU - 자유민주당 연정과 독일 사회민주당 - 녹색당의 연정이 있다.

대연정은 비슷한 성향의 정당들 만으로는 정권 창출이 불가하여 서로 상이한 이념을 가진 둘 이상의 주요 정당을 포함한 정당들이 연합하여 정권을 창출하는 경우이다. 당연하게도 소연정에 비해 정부를 구성하는 정당들 간의 성향 차이가 크다. 국내의 경우 정부 수립 초기에 구성되었던 좌우합작정부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며 해외의 경우 1980년대 중국에서 구성된 제3차 국공합작 체제가 이에 해당한다.

대연정의 일부로 거국정부라는 경우가 있다. 전쟁, 경제위기, 자연재해 등 범국가적 규모의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구성된 대연정 정부로 영국에서 대공황에 대응하기 위해 구성되었던 국민정부(National Goverment)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전당연정을 통해 구성된 전시내각이나 중일전쟁 시기 중국에서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구성된 국공연립정권이 이에 해당한다.

연정은 의석에 따라 과소규모연정, 최소승리연정, 과대규모연정의 셋으로 나눌수도 있다.

과소규모연정은 연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립정부 소속 정당들이 가지고 있는 의석이 과반에 미치지 못하고 단순 원내 다수파에만 속하는 경우를 뜻한다. 통상적으로 잘 구성되지 아니하며 불신임과 야권의 각종 공격에 매우 취약하다. 소연정과 대연정에 모두 실패하거나 연정을 이루었음에도 원내 과반을 차지하는데 실패하였으나 헌법에 의해 과반을 얻지 못하였음에도 총리 선출에 성공하였거나 야당이 정권 창출에 동의한 경우 구성된다.

최소승리연정은 원내 과반을 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당들 만을 규합해서 구성된 연정이다. 현대 자유민주주의에서는 헌법 개정 등의 일부 특수 사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책을 단순 과반만 달성한다면 무리없이 통과시킬 수 있기에 정당들은 정부를 구성할 때 연정 구성 정당 수에 반비례하는 정부 내부에서의 각 당의 파이의 크기를 키우고 연정 내의 분란을 줄이기 위해 많은 경우 최소승리연정을 구성한다.

과대규모연정은 원내 과반을 달성할 수 있는 의석을 훨씬 초과하여 구성되는 연정이다. 예시를 들자면 A당과 B당이 연립하였을때 이미 과반의 의석을 달성했거나 A당 혼자만으로도 과반의 의석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당들을 추가로 끌어들여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정부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즉 의안 통과 좌초나 불신임 등 의석수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정권에 대한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성된다.

이외에도 패배자 연정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말 그대로 선거에서 제1당의 자리를 얻지 못한 정당들이 연합하여 정부을 구성하는 것으로 제1당이 과반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당들이 연합하여 기존 제1당의 의석을 초과하는 다수파를 형성한 뒤 집권하는 것이다.

신임 공급

국가별 연립정부

대한민국

의원내각제 국가인 한국의 특성상 연립정부가 활발히 구성되고 있다.

정부수립 이후 이루어진 최초의 연정은 여운형 내각제1 · 2차 조봉암 내각 당시 성립된 좌우합작정부이다. 당시에는 서구식 정당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였기에 정치란 "민족 지도자들이 일치 단결하여 국가를 이끄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며 따라서 전국민적으로 원내 정치세력들이 총단결한 거국정부의 수립이 장려되었고 정치인들 스스로도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여러 정치세력들이 난립하여 명확한 우위를 지닌 정당이 없었기에 연립 정부의 수립이 어느 정도 강제되었으며 각 정당들도 정권에 참여함으로써 정부 내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고히하고 국책에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하기를 매우 강하게 원했기에 좌우합작의 거국 정부의 구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좌우합작은 2차 조봉암 내각 시기에 파기되었으나 이후에도 연정은 지속적으로 시도 · 성립되었다. 좌우합작 이후 한국사에서 성립된 연정으로는 민주자유당청우당민청연정, 사회민주당한국공산당사공연정, 사회민주당과 구 자유민주연합DJP 연합[5]이 있으며 시도된 연정으로는 2005년 노무현 총리가 제안한 민자-사민 대연정이 있다.

민청연정은 한국에서 연정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립정부로 19nn년 제3차 박정희 내각 시기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 총리는 집권 이후 지속적으로 천도교와 청우당에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해왔으며 당내에서 취약한 자신의 위치[6]와 친일파라는 딱지를 준수한 당세와 항일투쟁이라는 명분을 가진[7] 청우당에 매력을 느꼈고 청우당 역시 중앙정계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기에 박정희에게 협력하였다. 1968년 총선 이후 박정희가 민주자유당을 완전히 장악하자 양당의 관계는 급물살을 탔고 19nn년, 민주자유당 총재 박정희와 청우당 대표최고위원 최덕신이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함으로써 민청연정이 시작되었다.

박정희가 1974년 사임한 이후에도 민자당과 청우당의 연대는 계속되었으며 민자당의 당권이 연정을 시작한 박정희의 후계인 김종필에서 김영삼으로 넘어갔을때도, 1988년 민자당이 실권했을때도 양당은 연대를 이어나갔다. 2016년까지 청우당은 민자당이 집권할 때마다 연립정부를 구성하였으나 2016년 총선 당시에는 박근혜 총리와 친박 세력의 패악질에 대한 당내외의 높은 비호감도로 인해 양당이 일시적으로 연대를 중단하였다. 2018년, 민자당이 지선에서 참패한 이후 들어선 김병준 비상대책위원회가 청우당과의 관계 복원을 추진하였으며 2019년, 사민당의 공수처법 · 공직선거법 처리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양당의 연대가 복구되었다. 2020년 총선에서 민자당이 승리하여 유승민이 총리로 집권하자 청우당이 내각 구성에 참여함으로써 민청연립이 완전히 부활하였으며 현재 집권중인 오세훈 내각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중국

남일본

동남아시아

서유럽

영미권

공산권


  1. 민의원의원 (1996년 ~ 2004년 / 2007년 ~ ) / 청우당 대표최고위원 (2022년 ~ ).
  2. 민의원의원 (2002년 ~ 2004년 / 2020년 ~ ) / 민주자유당 총재 (2026년 ~ ) / 제31대 국무총리 (2029년 ~ ).
  3. 연방의회 의원 (2013년 ~ ) / 녹색당 공동대표 (2024년 ~ ) / 제21대 연방부총리 겸 연방경제기후보호부 장관 (2025년 ~ ).
  4. 연방의회 의원 (2002년 ~ 2011년 / 2021년 ~ ) / 독일 사회민주당 공동대표 (2019년 ~ ) / 제12대 연방총리 (2025년 ~ ).
  5. DJ(김대중, 사민당)과 JP(김종필, 자민련)의 연합이라 하여 붙은 이름.
  6.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박정희는 민자당 구파와 신파간의 합의로 선출된, 일종의 바지사장과 같은 인물이었으며 1968년 총선 이전까지 당내에서 박정희의 위치는 매우 불안했다.
  7. 다만 청우당의 모태가 된 천도교의 신파는 일제 시대 당시 일본에 협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