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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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 (헤르메스)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배경
소현세자의 급사가 없다
숙조가 끔찍이 아끼던 소현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
아편전쟁의 전말을 일찍이 알게 되다
소현세자가 1834년, 숙조의 승하 이후 즉위하여 본격적으로 근대화에 관심을 지대히 갖게 된 계기가 바로 1차 아편전쟁의 발발이다. 그러나 사대부의 방해로 근대화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김좌근의 난으로 몰락한 신 안동 김씨
김조순은 매우 뛰어난 인품과 성품으로 조선 조정의 주목을 받았으나,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내막을 열었고, 이에 따른 정치적 불안감을 조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소현세자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가문 사이에서 조정을 시도했고,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다만, 문조(효명세자)의 출생이 김조순의 딸인 숙종왕후의 장자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를 멀리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이 영의정으로 실권을 장악하려 하자, 이를 반려하는 대신 좌의정보다 낮은 우의정으로 낮추어 앉혔다.
이에 분노한 김좌근은 안동 김씨 일가의 수장이자 삼정승의 직위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가 1849년이었다. 명분은 숙조의 유언에 따라 문조(효명세자)의 아들인 이환(헌종)을 즉위시켜야 했으나 문조(효명세자)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왕후는 섣불리 김좌근을 지원하지 않았고, 풍양 조씨와 반남 박씨 일가의 배신으로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다. 김좌근의 난의 실패로 세도정치 시대는 종말을 맞이했고, 스트레스를 받았던 헌종의 급사로 이의 지지 기반이었던 안동 김씨가 몰락했으며 이에 따라 정치 개혁을 방해하던 세력이 숙청당하면서 이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양자로 입적한 회평군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손자이고 전계대원군의 적장남인 회평군이 문조(효명세자)의 외아들인 헌종이 급사하자 비록 방계의 왕손이나 문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이원범(훗날 철종)에 따르면 의종(회평군)의 인품이 매우 훌륭하고 훈훈하며 함께 강화도 유배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애민정신이 출중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의종의 시호 또한 백성을 옳고 이롭게 한다는 뜻의 '의(義)'가 되었다.
이때 여러 외국(영국, 프랑스 등)이 개항을 요구하고 국서를 전달함과 동시에 천주교 등 외국의 문화와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다. 의종의 집권 당시 세도가문의 공백으로 사실상 정치세력이 왕실과 일부 노론 시파를 제외하고 전무했던 상황이었다. 그는 문조 대에 든든한 배후인 숙종왕후와 함께 강화된 왕권을 이용하여 이원범과 함께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 문란을 혁파하였으며 근대화의 속도를 높였다.
더욱이 의종은 기존의 왕실과 달리 강화도에서 태어났고 평민의 출신에서 양자로 입적되면서 왕족의 지위를 복원하였다. 이에 따라 의종은 사대부의 전통과 신분제도에 반항적이었다. 마침 정치세력이 사실상 왕실과 극소수의 노론 시파 세력을 제외하고 전무하던 실정이었기 때문에 과거 급제한 평민 출신의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였고 체제의 개혁을 이루면서도 반대하는 이들이 없었다. 또한 비록 바로 신분제를 철폐하지는 않았으나 노예제를 폐지하고 양반도 군역에 참여하도록 강제하는 등 점진적으로 신분에 대한 경계의 벽을 허무는데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