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 혁명 (대안)

DLS (토론 | 기여)님의 2026년 8월 1일 (토) 18:19 판 (새 문서: {| class="wikitable infobox" style="width: 400px; float: right; margin: 0 0 1em 1em; background: #ffffff; border: 1px solid #c8ccd1; border-collapse: collapse; font-size: 90%; text-align: left;" |- ! colspan="2" style="text-align: center; padding: 12px; color: #ffffff; background: linear-gradient(135deg, #0047a0, #cd313a); font-size: 1.2em; border-bottom: 2px solid #000000;" | '''4.20 혁명'''<br /><span style="font-size: 0.8em; font-weight: normal;">四二十革命 | April 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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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혁명
四二十革命 | April Revolution
기간
1987년 4월 13일(39주년) ~ 4월 24일
발생 장소
대한민국 전역
유형
민주화 운동
원인

• 신군부의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 전두환 정부의 폭압적 독재
• 4.13 내란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및 이한열 최루탄 피격 등

목적
국회 해산 조치 반대, 전두환 정권의 퇴진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 세력 진압 세력

시위대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 정의구현사제단
• 운동권
• 넥타이 부대
통일민주당
• 민주화추진협의회

전두환 정부 (신군부)
• 내무부 치안본부
• 국가안전기획부
• 국군보안사령부
• 법무부
• 하나회 전두환 계파
민주정의당

지지 국가 및 세력

미국의 기 미국
바티칸

주요 인물

•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김대중
• 동아일보 해직기자 이부영
• 민주화운동가 김정남
• 민통련 의장 문익환 목사
•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
• 박종철 열사
• 이한열 열사

• 대통령 전두환
•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
•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 국군보안사령관 고명승
• 법무부장관 정해창
• 내무부장관 정관용
• 치안본부장 권복경

참여 인원
500만~600만 명 추산
결과
전두환 정부 붕괴
조순 과도정부 수립
9차 개헌을 통한 대한민국 제6공화국 수립


개요

계엄철폐 독재타도 민주혁명
4월 19일 부산 계엄령 선포 이후 혁명 정국으로 비화되면서 가장 많이 나왔던 구호

4.20 혁명은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을 종식한 민주 혁명으로, 대한민국 제6공화국을 수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개

4월 이전

1985년 2.12 총선의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는데, 여당에 유리한 의도로 만든 전국구 선거를 단 3석 차이로 야권 돌풍에 의해 신한민주당이 지역구 1위를 차지하면서 61석을 싹쓸이, 제1당이 되고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제2당으로 몰아낸 것이다. 더불어 선거 이후에 민주한국당의 의원들이 전부 신한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야권은 개헌선에 단 7석 모자란 177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는 5,18 진상조사법 등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관제야당을 강력히 통제해 개헌을 저지하면서 간신히 벼랑 끝에서 버티는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끝내 개헌 요구를 억지할 수 없었고, 개헌을 요구하는 1000만 서명운동을 신한민주당이 벌였다. 끝내 1986년 7월 30일 개헌위원회가 설치되어 개헌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야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였지만, 민주정의당은 의원내각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많은 국민들과 정계에 의아함을 일으켰다. 대통령 직선제를 해도 독재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극심해 양김이 분열되더라도 민주정의당 후보가 정권을 연장할 가능성이 없었으며, 또한 당시 의석수 상으로는 의원내각제를 하면 민주당계가 무조건 과반으로 총리를 낼 것이기에 외통수에 걸린 것이 민주정의당인데 개헌안 합의를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며 반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모는 1986년 12월 24일 밝혀진다.

1986년 12월 24일, 신민당의 이민우는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 사면복권, 공무원의 정치중립 보장, 국회의원 선거법 협상, 지방자치제도 도입을 전두환 정권에서 수용해 주면 의원내각제 개헌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며 내각제 개헌을 찬성하게 된다. 이른바 이민우 구상이었다. 민주정의당은 의원내각제라는 미끼를 던져 민주 세력 내의 온건파를 갈라쳐 보수대연합을 구상, 신민당의 과반을 붕괴시키고 권력을 유지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에 신한민주당은 양김과 이민우-이철승의 내분을 겪었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1987년 4월 7일 탈당해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신당에 143명의 국회의원이 합류하기로 되었고, 야권은 분열했지만 여전히 신당이 제1당이었다.

야권의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가운데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다. 이는 위태롭던 전두환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다. 박종철을 추모하는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의 재야, 종교 세력이 끊임없이 투쟁을 이어갔으나 야당은 이민우 구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보적 종교계, 그리고 운동권이 사태의 공론화와 시위 조직을 주도하도록 만들었다. 이민우 구상으로 제1야당의 과반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신당이 과반을 유지하며 창당될 위기였고,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에 정권을 유지하여 노태우를 후계로 세우려던 전두환은 백약이 무효함을 깨닫고, 퇴진을 선택하느니 독재 권력을 영구화하려는 최악의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4월 13일

국회해산

통일민주당 창당발기대회 습격 사건

같은 날 전두환은 창당발기대회를 위해 모여 있던 통일민주당 의원들과 야당 인사들을 급습한다. 친위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이들의 참수작전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낮에 벌어지는 경찰의 대대적인 습격 사건과 김영삼, 김대중 연행은 서울 시민들이 분노하게 만들어, 국회 해산에 이어 결정적으로 시위가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계기가 된다. 특히 부산, 마산 등지에서 다시 한 번 1979년과 같은 수준으로 시위가 시작된다.

본격적인 시위의 시작

4월 14일, 연세대학교 교문 앞에서 연세대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되어 중태에 빠지고, 이로 인해 시위는 더 이상 서울이나 부산 등 일부 대도시에 국한될 수가 없게 되었다.

명동성당 항쟁

전국적인 시위

4월 16일, 다수의 재야 단체들과 민주화 조직, 운동권 조직들이 국본을 결성, 시위를 조직하고 지휘하였다. 경찰력은 시위의 진행과 함께 고갈되어가며, 명령 불복종 등이 늘어났다. 최루탄 역시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며, 경찰력으로도 상황 통제가 가능하다는 권복경의 필사적인 시도는 전두환이 더 이상 믿지 않았다. 시위의 기세가 서울보다도 더 강력했던 부산은 시민들이 KBS를 포위하고 1979년 그 이상의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계엄령 선포

끝내 전두환은 정권 붕괴 위기에 직면하였고, 그는 하야를 선택해도 이미 내란죄를 두 번이나 저지른 이상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해질 것이었다. 전두환에게는 희박한 확률이나마 무력 진압이 정권을 억지로라도 유지할 가망이 있어 보였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무력 진압에 걸었고, 4월 19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4월 20일, 부산에서의 발포와 군의 붕괴

노태우의 사퇴, 민주정의당의 붕괴

청와대로

과도정부 구성

평가와 의의

4.20 혁명은 1961년 이래 27년간 이어지던 군사독재정권을 완전히 무너뜨린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더욱이 4.19 혁명에서는 이승만이 망명하여 제대로 심판받지 못했지만, 1987년의 4.20 혁명은 전두환이 끝내 체포되어 국내법의 심판을 받게 됨으로써 더욱이 민주화의 역사에서 상징하는 의미가 크다. 전두환은 김영삼 정부의 5공 청산 과정에서 끝내 사형 판결을 받고 사형됨으로써,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는 마침내 왕, 혹은 왕에 준하던 독재자를 직접 끌어내려 법의 심판까지 받게 했다는 중요한 자산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정치적으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 울산, 마산, 창원 등 부울경권 동부 지역이 확고한 반보수, 반민정계 성향을 굳히게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이로 인해 3당 합당 이후로도 동부 경남과 부산, 울산 일대는 보수 정당의 텃밭이 아닌 경합 양상을 보였으며, 상도동계의 분리와 민주당계로의 재흡수, 2004년 총선을 거치며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 정당이 경합하는 지역으로 정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