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솔피/4

[ 세계관 설명 ]
먼동이 터오고 헤어질 시간이면
다시괴로워서
남몰래 흘린눈물이
뺨을적시네
샬라
"나오미의 꿈"은 "대한제국이 공화국이 되었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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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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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부여
고조선[1]
단군조선 · 위만조선
진국 탐라 우산
원삼국​시대
한사군[2]
마한
변한
진한
낙랑
동예
옥저
고구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3]
신라
고구려 신라
남북국​시대
발해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태봉
후백제
신라
고려
고려시대
고려
조선시대
조선
개화기
대한제국
공화국기
한성정부
현대
대한국
[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2] 한사군은 조선사 포함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음
[3]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
주요 민족: 한민족 (예맥 · 삼한)
대한국
관련 문서
한성정부
漢城政府 | Goverment of Seoul

대조선공화국
大朝鮮共和國 | Republic of Korea
국기 국장
홍익인간
弘益人間
상징
국가 애국가
국화 무궁화
위치

1919년 n월 n일 ~ 1929년 6월 10일
제정 폐지 이전 6.10 궐기 이후
대한제국 대한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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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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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한반도 및 부속 도서
수도 한성부(漢城府)
면적 220,903㎢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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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8,657,626명 (1929년)
인구 밀도
84.7명/km² (1929년)
언어
한국어
종교
성리학, 천도교, 대종교, 개신교, 가톨릭
민족
한민족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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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대통령제, 단일국가, 단원제
입법부 의정원
국가원수 대통령
역대 대통령
이승만 (1919~1929)
정부수반 국무총리
역대 국무총리 이상재 (19nn~19nn)
이동녕 (19nn~19nn)
안창호 (19nn~19nn)
이승만 / 국무총리 서리 (19nn~1929)
경제
통화 대한중앙은행 냥 (1919~1920)
→ 조선은행 환 (1920~1929)

개요

한성정부(漢城政府) 또는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은 1918년 미곡폭동에서 시작된 3.1 혁명을 통해 건국되어 1929년 6.10 궐기를 통해 멸망할 때까지, 전간기에 존재했던 대한국의 공화정기를 일컫는 명칭이다.

한성정부에서 대내외적으로 내세운 국호는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이었다. 한성정부라는 명칭은 기미 혁명선언 이후 신정부의 수립을 위해 한성부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유래한 것이며 국가의 정치 체제별 시대 구분을 위한 용어이지, 한성정부라는 공식적 국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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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부여
고조선[1]
단군조선 · 위만조선
진국 탐라 우산
원삼국​시대
한사군[2]
마한
변한
진한
낙랑
동예
옥저
고구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가야[3]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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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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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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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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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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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대한제국
공화국기
한성정부
현대
대한국
[1] 기자조선은 현대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되지 않음
[2] 한사군은 조선사 포함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음
[3]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
주요 민족: 한민족 (예맥 · 삼한)

틀:만주의 역사 (나오미)

3.1 혁명

한러일전쟁 이후 실권을 장악한 독립협회 계열은 무능한 고조를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특히 독립협회는 고조에 의해 이미 탄압을 받은 적이 있기에 더더욱 고조의 실권을 약화시키고 일본을 본받아 입헌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에 1906년 중추원을 중심으로 하는 입헌정치를 실행되며 대한제국에 최초의 근대적 입헌정체가 수립되었고 고조 말기를 광무헌정이라 칭한다.

광무헌정은 독립협회에서 이름을 바꾼 독립당이 주도하는 10년간의 기간이었고, 이 시기 한국에서 본격적인 식산흥업과 국민개병제를 통한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권을 빼앗긴 고조와 보수파는 점점 의회와 정당 정치에 강한 불만을 갖게 된다. 특히 권력에 강한 집착을 보였던 고종은 독립당이 결국에는 프랑스 대혁명처럼 자신을 끌어내고 공화국을 선포할 것이라는 의심을 10년간 감추지 못했다.

이에 고조와 황족, 보수파들은 비밀리에 정변을 준비하였고, 1918년 1월 무오정사를 통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고조의 정변으로 의왕을 비롯해 대피하지 못한 독립당 계열 인사들은 처형당했고 다시금 전제군주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훗날 미곡 폭동으로 알려지게 될 쌀의 가격 급등으로 인한 대폭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대두되었다. 1차대전을 거치며 협상국에 대한 수출이 폭등하자, 한중일 동양 삼국의 산업화가 빠르게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며 쌀에 대한 수요가 폭증한 이 시기, 고조는 일본의 쌀 폭등을 기회로 대일 쌀 수출을 증가시켰다. 결국 전국적으로 미곡 가격이 폭등하였고 특히 쌀의 수요가 급증한 한성의 싸전이 일제히 담합하여 미곡의 판매를 금해 미곡을 구입하지 못해 성난 군중들은 흥분하여 싸전 상인을 공격하며 미곡 폭동이 발생한다.

분노한 군중의 폭동은 점차 한성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조정은 심각성을 인지하여 경무청의 주도하에 무자비한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들불처럼 확산되었고, 결국 경무청 뿐만 아니라 군이 동원되었으나, 군경의 잔혹한 진압끝에 어린 소녀인 유관순과 김일성이 사망하며 전국적으로 저항이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매점매석에서 시작된 미곡폭동은 점차 입헌정치를 복구하라는 정치적 요구로 진화하였다. 이때 조정의 체포령에도 불구하고 은신하고 있던 이승만이 저항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은 잔존 독립당 세력을 규합하여 투쟁을 선포하였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개별적 저항인 미곡폭동은 3.1 혁명으로 진화하였다.

본래라면 충분히 초기에 진압이 가능했을 이 미곡폭동은 고조가 러시아와 협상국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3만여명의 시위대를 포함한 최정예병력을 아라사원정군으로 파병하며 진압에 실패했다는 것이 현대의 정설이다. 3.1 혁명으로 인해 조정의 지방 통제력이 붕괴하였고, 3월 중순에는 한성까지 저항이 거세어지게 되었고, 고종과 유력 황족들은 경운궁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사태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게 된다. 3.11일 제2차 경운궁 화재사건으로 고조 태황제 (나오미)고조와 태자와 영왕등의 유력 황족들이 화재로 사망하며 반정부 시위로 시작된 3.1 혁명은 뜻밖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훗날 공화국 정부는 이 화재를 전기시설의 합선에 의한 화재라고 발표하였으나, 온갖 음모론이 확산되었다. 결국 황실의 계승 서열이 붕괴되기에 이르렀고, 머리를 잃은 조정은 일거에 마비되었으며, 근황파의 저항의지는 완전히 일소되게 된다. 결국 민병석 의정은 진압을 포기하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이후 이승만은 의정이 되었고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공화국 선포

기미 독립선언 이후 공화국의 수립을 위해 1919년 4월 23일 24인의 13도 대표자들이 경운궁 석조전에서 13도 대표 국민대회를 열어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인근 [종각]에서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수립되었다.

13도 대표들은 선포문에서 “3 •1 민주혁명을 바탕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 대회는 민의에 기(基)하여 임시정부를 조직, 약법(約法)을 제정하여 이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UPI통신의 전신)은 한성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제2전선 음모론

정치적 혼란

공화국 멸망

정치

정당

대조선 헌법

정부 형태

행정구역

군사

정치

외교

조일관계

조중관계

조소관계

조미관계

대중매체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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