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무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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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광복운동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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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1-n대 국무령 이우 李鍝 | Yi U | ||||||||||||||||||||||||||||||||||||||||||||
| 이름 | 이우(李鍝) | |||||||||||||||||||||||||||||||||||||||||||
| 출생 | 1912년 11월 15일 | |||||||||||||||||||||||||||||||||||||||||||
| 경기도 경성부 관인방 사동궁 (現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사동궁) | ||||||||||||||||||||||||||||||||||||||||||||
| 사망 | 대한민국 74(1992)년 12월 14일 (향년 80세) | |||||||||||||||||||||||||||||||||||||||||||
| 서울시 종로구 운현궁 | ||||||||||||||||||||||||||||||||||||||||||||
| 묘소 | 홍능 | |||||||||||||||||||||||||||||||||||||||||||
| 재임기간 | 건국준비위원회 무경부장 | |||||||||||||||||||||||||||||||||||||||||||
| 1945년 9월 3일 ~ 1946년 2월 8일 | ||||||||||||||||||||||||||||||||||||||||||||
| 제2대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 ||||||||||||||||||||||||||||||||||||||||||||
| 1946년 2월 8일 ~ 1947년 2월 21일 | ||||||||||||||||||||||||||||||||||||||||||||
| 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 ||||||||||||||||||||||||||||||||||||||||||||
| 1947년 2월 22일 ~ 1948년 9월 9일 | ||||||||||||||||||||||||||||||||||||||||||||
| 초대 대동중흥당 의장 | ||||||||||||||||||||||||||||||||||||||||||||
| 1949년 6월 30일 ~ 1992년 12월 14일 | ||||||||||||||||||||||||||||||||||||||||||||
| 제1-n 대한민국 국무령 | ||||||||||||||||||||||||||||||||||||||||||||
| 1948년 9월 9일 ~ 1992년 12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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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의 구황족이자 군인 출신 정치인.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1912년 사동궁(당시 이강 공저)에서 의친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우가 만 4세 때인 1917년 3월 22일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이 사망하였다. 이준 공의 자녀는 소실 전순혁에게서 태어난 서녀 이진완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이에 3월 23일 덕수궁에서 열린 친족회의에서 고종의 뜻에 따라 의친왕의 서차남 이우를 양자로 결정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영선군의 부인이 고종에게 운현궁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하소연하자 고종이 친히 의친왕의 둘째 아들 어린 이우의 손을 잡고 운현궁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 아이로 하여금 운현궁을 잇게 하라." 하였다.
영선군의 양자가 된 이우는 운현궁의 재산을 상속받고 공위를 세습 받아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공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은 이우의 생부 의친왕 이강 공과 이우 밖에 없었다. 이우는 어렸을 때는 '이우 공자'로 불렸고, 운현궁에 양자로 입적하여 공위를 계승한 뒤에는 '이우 공(公) 전하'로 불렸으며, 의친왕 계열의 이복 여자 형제들은 '운현궁 오라버니'로 불렀다.
1915년 경성유치원에 입학하여 1918년 3월 28일 졸업하였다. 경성유치원의 보모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는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 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 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라고 평하였다. 1918년 1월 25일 일본 제국에서 일시 귀국한 생숙부 영친왕이 경성유치원을 방문하였을 때 이우는 영친왕 앞에서 창가 ‘매화와 꾀꼬리’를 불렀다.
1919년 1월 21일 생조부 고종이 사망하자 150일 동안 복상(服喪)하였고 4월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하였다. 1922년 종로소학교에서 심상과 3학년 과정을 마치고, 7월 5일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 초등과 4학년에 편입하며 볼모 생활을 시작했다. 1926년 4월 26일 생백부 순종이 사망하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 5월 10일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도 종척집사로 임명되었다.
군인의 길
당시 이왕가의 왕공족들이 그랬듯이《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 18세가 지나면 육군 또는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 결국 이우는 학습원 중등과 졸업 후 1926년 4월 1일 이우는 육군유년학교 30기생으로 입교하였다. 구대장 사토 중위가 쓴 어훈육일지(御訓育日誌)에 따르면 이우가 체격은 왜소하지만 체력이 강했고 교관에게는 반항했지만 동료에게는 너그러웠다고 썼고, 7월5일 국어시간에 '불사조' 강의를 듣자 즉각 수업을 거부하는 등 반일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1929년 3월 18일 이우는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5기생으로 예과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18일에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사관후보생으로 임명을 받아 도쿄 야포병 제1연대에 배치되어 근무하다가 10월 본과에 입교하였다. 이우는 총명하였으며, 조선인 육사생도를 커다랗게 한국말로 호령했다. 키 156㎝, 몸무게 46㎏의 작은 체구에도 강인한 체력에 프랑스어에 능통했고, 선호 과목은 승마였다.
1935년 육사 45기로 졸업한 이우는 포병 병과 교육을 1년간 받고 1936년 도쿄 주둔 제8포병 연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소속 연대가 만주로 파견되어 1년간 근무했으며, 1938년 대위 진급 후 포병 학교 교관으로 전임했다가 동년 12월 27일 일본 육군대학교 제54기생으로 입학하여 1941년 7월 31일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이우를 포함하여 영친왕 이은·이건·홍사익뿐이었다. 1940년 3개월 동안 중국 전선을 시찰하고 11월 육군대학생의 자격으로 중부 제37부대에 소속되어 교토 사단 추계 연습에 참가하였다. 1941년 조선군사령부에 배속되었고, 10월 15일 소좌로 진급하였다.
결혼 사건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이왕가의 자녀를 일본 황족 또는 화족의 자녀와 결혼시켜 혼인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르면 왕공족의 혼인은 천황의 칙허를 통해서만 인정되었다. 생숙부 영친왕·생고모 덕혜옹주·본생가 서형 이건의 혼인과 같이 일본인과의 정략 결혼이 추진되어 궁내성에서는 일본 황족인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 여왕을 이우의 배우자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이강은 아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우도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하였다. 일본인 신부를 거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의친왕과 긴밀한 관계였던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가 이우의 배우자로 물망에 오르고 혼약이 이루어졌다. 이우는 박찬주에게 사주단자와 약혼반지를 보낸 후에 당시 이왕직 장관 한창수에게는 혼약이 성립되었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왕공족의 사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은 박찬주와의 혼약이 천황의 칙허없이 진행되었다고 반발하며, 일본 황족과 결혼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이우의 조선인과 결혼하겠다는 저항과 박영효의 일본 정계를 상대로 벌인 로비의 결과로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은 이우와 박찬주의 혼약을 인정하게 된다. 박영효는 일단 혼약이 철회된 것처럼 해놓고, 직접 도쿄에 가서 귀족원 칙선 의원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직책과 인맥을 활용하여 추밀원·귀족원·궁내성에 공작을 벌였다. 결국, 1934년 7월 11일에 궁내성 종질료(宗秩寮)에서 약혼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1935년 4월 17일 혼인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발표되었다. 1935년 5월 3일 이우와 박찬주는 도쿄 별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6월 28일 경성으로 돌아와 종묘와 능원을 참배하고 조선호텔과 운현궁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박찬주와는 결혼 전에 조선과 일본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편지도 주고받았다. 부부 금슬도 좋아서 매년 결혼기념일이면 뉴 그랜드 호텔 양식부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기적적인 탈출
이우의 형 이건은 일본에 고분고분했지만 이우는 정반대였다. 일본 군인으로 키워진 이우는 누구와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조선 욕설을 퍼부으면서 팔뚝을 걷어 부치던 다혈질이었고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 이렇듯 반일 의식이 강했던 이우지만, 일본의 철저한 감시속에 이우가 할 수 있는 일은 황성옛터를 불러 고국의 그리움을 달래거나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고 결의를 다지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러던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우는 1942년 3월 육군대학교 연구부 부원으로 전보되었고 5월에는 일본 황족 신분으로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거쳐 버마 전선을 시찰하고 있었다. 당시 버마 로드 인근 안다만해 상공은 연합군 공군과 일본군 항공대가 치열한 제해·제공권 다툼을 벌이던 격전지였다. 이우가 탑승한 Ki-57 폭격기는 연합군 전투기 편대의 예상치 못한 기습 사격을 받게 되었고, 엔진에 화재가 발생하며 급격히 고도를 잃어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우는 낙하산을 통해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기체는 탈출 직후 상공에서 폭발하며 정글과 해상으로 산산조각이 나 추락했다. 뒤늦게 수색에 나선 일본군 수뇌부는 파괴된 잔해만을 확인한 뒤 "육군 소좌 이우 공 전하 탑승기 피격 및 전원 전사"로 참모본부에 보고하였고, 대외비로 붙이게 된다.
탈출에 성공해 바다를 표류하던 이우와 생존자들은 인근 해역에서 연합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당시 안다만해 일대는 1942년 4월 세이론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이 완벽한 제해권을 독점하고 있던 위험 구역이었다. 그러나 연합국 역시 인도 캘커타를 거점으로 미군 OSS와 영국 SOE의 정찰 잠수함 및 특수 공작선들을 안다만해 일대에 은밀히 침투시켜 첩보망을 가동하고 있었다. 덕분에 표류하던 이우 일행은 일본군 수색대보다 먼저 연합군의 잠수함에 의해 구조되고 포로가 되었다.
말을 갈아타다
구조 직후 실시된 소지품 검사 과정에서 이우의 소지품과 인식표를 통해 구 한국 황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연합군 수뇌부는 이우를 즉시 조사하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인도 총사령부(GHQ India)로 이송된 이우는 일본군 군사 정보를 제공하며 연합군의 신뢰를 획득했고, 미군 전략정보처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후 적극적인 항일 의사를 표시한 이우는 일본을 비난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하고 전향을 선언했다.
1942년 가을, OSS의 수송기를 타고 인도를 거쳐 중국 충칭에 도착한 이우는 백범 김구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만난다. 볼모였던 비운의 왕자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섭한 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영 속에 공식 입대식을 치르고 일본군 시절 계급이었던 소좌와 동격인 참령으로 임관하게 된다.
영웅
해방자 붉은 공작
건국 준비
사망
사건사고 및 논란
소속 정당
|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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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대동중흥당 (불꽃놀이) | 1949년 - 1992년 | 창당 사망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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