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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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3대 국가주석 박헌영 朴憲永 | Pak Hon-yong | |
|---|---|
| 출생 | 1900년 5월 28일[1] |
| 충청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 (現 충청남도 박헌영군 박헌영읍 이정로 379) | |
| 사망 | 1995년 7월 8일 (향년 95세) |
| 서울시 종로구역 련건동 서울제1인민병원 | |
| 묘소 | 남산혁명렬사릉 |
| 재임기간 | 초대 국가주석 |
| 1972년 12월 25일 ~ 1974년 9월 8일 | |
| 제2대 국가주석 | |
| 1974년 9월 9일 ~ 1979년 9월 8일 | |
| 제3대 국가주석 | |
| 1979년 7월 9일 ~ 1982년 12월 25일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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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독재자.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몸을 담기 시작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조선콤그룹 등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부터 1년간 동아일보에서 기자 활동을 하기도 했다.
독립 이후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여 여운형을 비롯한 기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이끌었으며 이후에는 재건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였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잠시 그 세력을 잃기도 했다. 9월 총파업으로 인해 결국 체포령이 떨어져 남로당 측근들과 함께 월북하였으며, 조선 정부 수립 이후엔 내각 부수상과 외무상을 역임했다.
김일성이 소련군에게 처형당한 이후인 1956년부터는 허가이와 함께 조선의 실권을 잡아 1956년부터 1972년까지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1972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가주석을 역임하였다. 1982년엔 정계를 은퇴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으며 1995년 7월 8일, 서울시 련건동에 위치한 서울제1인민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생애
유년시절
1900년 8월 28일 충청도 대흥군의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박현주는 쌀을 팔던 미곡업자였으며, 어머니인 이학규는 작은 주막을 운영했었다.
독립운동가
광복 이후
월북
조선의 실권자가 되다
평가
성격
사상
박헌영주의
여담
- 주막을 경영하던 모친에게서 영향을 받아 요리를 굉장히 잘했다고 하며, 뛰어난 미식가이기도 했다고 한다.
- 김일성이 소련 대사관에 찾아가서 술도 마시고, 당구도 즐기던 것과는 반대로 박헌영은 오락과 놀이에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소련이 박헌영 대신 김일성을 내세운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다고.
어록
소속 정당
| 소속 | 기간 | 비고 |
|---|---|---|
| 1921 | 정계 입문 | |
| 무소속 | 1921 - 1925 | 해산 |
| 조선공산당 | 1925 - 1928 | 입당 |
| 무소속 | 1928 - 1929 | 해산 |
| 소련 공산당 | 1929 - 1934 | 입당 |
| 무소속 | 1934 - 1939 | 체포 후 일시 정계 은퇴 |
| 경성콤그룹 | 1939 - 1941 | 창당 |
| 무소속 | 1941 - 1945 | 해산 |
| 1945 | 창당 | |
| 무소속 | 1945 | 건준 참여를 위한 탈당 |
| 건국준비위원회 | 1945 | 입당 |
| 무소속 | 1945 - 1946 | 해산 |
| 1946 - 1949 | 입당 | |
| 1949 - 1995 | 합당 정계 은퇴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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