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암 (리좀)

공산1968 리조니 Arrondissments 레스 어틀라
[ 문서 보기 ]
[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ㅇㅇ.png

일본의 식민 지배 없이 근대화에 성공해 이원집정부 체제를 받아들인 "동방의 불란서", 대한공화국의 여정을 다루는 대체역사·정치 세계관.
이 문서는 리좀 세계관의 공식 설정입니다. 해당 문서의 내용은 CC-0 (퍼블릭 도메인)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문서의 모든 내용은 허구입니다.

대한공화국_대통령_(리좀)
대한공화국_대통령_(리좀)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안창호 김창암 여운형 윤보선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노무현 박근혜 안철수 이재명
비상대권자 · 자유대한 망명정부 수반 · 천안 괴뢰정부 수반

고조선 · 부여 · 원삼국 · 고구려 · 백제 · 가야
신라 · 탐라 · 발해 · 후삼국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김창암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공화국_총리_(리좀)
대한공화국_총리_(리좀)
[ 펼치기 · 접기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1897~193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김홍집 박영효 김홍집 김병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김옥균 민영익 조희연 민병석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박중양 이완용 박은식 서재필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이승만 이동휘 김창암 이동녕
대한공화국 내각수상 (1930~1945)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이동녕 이승만 신채호 이승만
제21대
조소앙
대한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1945~1961)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 박헌영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장건상 장면 김도연 정일권
대한공화국 총리 (1961~現)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정일권 김종필 이철승 유치송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김철 고정훈 김종필 강성산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이용희 한화갑 박찬종 이회창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순 천정배 정동영 정세균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김근태 이명박 정우택 김무성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최경환 홍준표 박지원 유승민
제53대 제54대 제55대
이낙연 김한길 이재명
고구려 국상 · 고구려 대막리지 · 신라 대보
신라 상대등 · 고려 문하시중 · 조선 영의정

틀:역대 자유대한 망명정부 수반 (리좀)


천안_괴뢰정부_(리좀) 선정 대한공화국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
[ 펼치기 · 접기 ]
※ 2015년 한국인 3,500만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를 토대로 "대한공화국의 인물" 100인을 선정, 이중 20인의 순위를 공개했음.
1위 2위 3위 4위
김창암 이순신 세종대왕 박정희
5위 6위 7위 8위
김일성 안중근 신채호 여운형
9위 10위 11위 12위
김옥균 김대중 김수환 노무현
13위 14위 15위 16위
광개토대왕 정약용 이이 장준하
17위 18위 19위 20위
박은식 김홍집 장보고 문익환
같이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제13대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제2대 대한공화국 대통령
김창암
金昌巖 | Kim Chang-am
출생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現 황해남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사망 1961년 1월 19일 (향년 85세)
경성특별시 종로구 국립경성대학교병원
묘소 경성광역시 동작구 국립경성현충원
재임기간 제15대 내각총리대신
1926년 3월 15일 ~ 1928년 7월 10일
제2대 대통령
1937년 12월 1일 ~ 1952년 11월 30일
링크 홈페이지_아이콘.svg[1]
[ 펼치기 · 접기 ]
본관 선 안동김씨
부모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배우자 최준례
자녀 슬하 2남 3녀
장남 김인, 장녀 김신, 장녀 김씨, 차녀 김화경, 삼녀 김은경
학력 국립경성대학교 (명예박사)[2]
종교 개신교 (감리회)
신체 180cm[3], AB형
최종 당적 무소속
의원 선수 9 (국민원)
의원 대수 4, 5, 6, 7, 8, 9, 10, 11
백범(白凡)

개요

대한은 고통받았습니다. 대한은 고문받았습니다. 하지만 대한은 해방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승전 연설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일지 中

대한공화국의 정치인. 대한제국의 제15대 내각총리대신직과 대한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자유대한정부를 이끌고 항일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로, 현재까지 압도적으로 대한공화국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한국 중도보수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으며, 더 나아가 좌우익을 막론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다. 비록 현대에 들어서는 엄격한 보수주의 성향이나 매카시즘적 행보로 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 그의 독립운동에서의 영향력이 과대평가되어있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생애

젊은 동학 운동가

동학 운동가에서 우익 정치인으로

공화국의 건국을 주도하다

제1공화국 시절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승전 이후의 삶, 죽음

평가

긍정적 평가

공화국 설립의 주도자

항일 외교활동 지도

항일운동 도중의 좌우익 통합

대통령으로서의 업적

부정적 평가

극단적인 반일 민족주의 성향

매카시즘 및 백색테러

과대평가 논란

어록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헤겔의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 가지에,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 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물론 비판하는 것도 철저하게 금지하여,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 조선의 사문난적을 대한 것 이상이다.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급진당 1910 - 1916 정계 입문
무소속 1916 - 1920 노선 차이로 탈당
대한민주당 1920 - 1923 입당
대한국민당 1923 - 1934 당명 변경
자유당 투명.png 1934 - 1953 신설 창당
무소속 1953 - 1961 탈당[4]
정계 은퇴

선거 이력

여담

  • 평생 반공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좌익을 혐오했던 인물 답게, 이동휘, 여운형 등 좌익 지도자들과 일화가 많다. 어느날은 대한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이동휘가 김창암과 국민원에서 예산안을 두고 맹렬한 토론을 벌였는데, 쉬는 시간에 같이 화장실을 갔을 때 김창암이 이동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봤다고 한다. 이동휘가 "아니, 동지는 정치 문제를 왜 사적으로도 끌고 들어와 나를 공공연히 싫어하는 척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김창암은 "그야 이동휘 의원은 큰 것만 보면 다 국유화를 해버려고 하지 않소!"라고 답했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출중한 좌익 성향 정치인들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멀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정적이었던 여운형을 자유대한 망명정부의 외교부장관으로 임명하는 통 큰 행보도 보였다.

  1. 김창암 선생 기념관 홈페이지이다.
  2. 본래는 무학력이지만 1947년 국립경성대학(현재 경성 제1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외에도 다수의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현재로서도 장신인데 당시에는 주요 정치인중 가장 큰 체격을 자랑했다. 심지어 군인이었던 지청천보다도 컸다.
  4. 김규식 총리에 의한 대대적 정계 개편에 최대한 정치적 의사를 내비치지 않음으로서 우익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일부러 자유당을 탈당했다. 실제로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자유당이나 민주당 중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