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승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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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제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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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제국 초대 황제 열조 고황제 | 烈祖 高皇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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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행도조기입극대지신인문의무준덕성고황제 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高皇帝 | |
본명 | 야마시타 쿠로가네 ( |
출생 | 1826년 5월 3일 |
아시카가국 아시카가군 카미마치혼초 | |
즉위식 | 1860년 6월 10일 |
대일본제국 교토 교토고쇼 | |
사망 | 1910년 12월 6일 (향년 84세) |
대일본제국 교토 교토고쇼 | |
국적 | 파일:Merchant flag of Japan (1870).png 대일본제국 |
능묘 | 태릉(泰陵) |
재위 | 대일본제국 황제 |
1857년 5월 17일 ~ 1905년 7월 31일 (48년 2월 2주, 17,606일) | |
대일본제국 태상황 | |
1905년 8월 1일 ~ 1910년 12월 6일 (5년 4월 5일, 1,95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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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동아제국의 초대 황제.
생애
하급무사에서 실권자로
1826년 5월 3일, 아시카가 번의 하급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야마시타 쿠로가네(山下鐵). 아시카가 번은 과거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정이대장군 가문이었다. 사무라이들의 전반적인 몰락이 나타나고 있던 막말 시기, 야마시타 쿠로가네도 별볼일 없는 하급 무사로서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27세일때 일어난 쿠로후네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목격하고 일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중앙집권제화와 서구화가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이는 그가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에도 막부의 무능한 대처와 개화에는 관심이 없던 천황 등의 모습을 보고 야마시타 쿠로가네는 그와 뜻을 함께하는 하급 무사들과 아시카가 번을 습격해, 아시카가 번 전체를 장악하였고, 이후 천황과 정이대장군에게 개항을 요구하기 위하여 에도와 교토로 출병하였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마야시로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배하고, 에도를 야마시타 쿠로가네와 그의 군이 포위하면서 쿠데타에서 사실상 승리하였다. 야마시타 쿠로가네는 도쿠가와 이에사다로부터 에도 막부의 지원을 약속받고,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향했다. 당시 천황이었던 고메이 덴노는 야마시타 쿠로가네의 요구 사항을 상당수 받아들였고 야마시타 쿠로가네는 그렇게 막부와 천황 위에 있는 일본 전역 최대의 실권자가 되었다.
실권자에서 황제로 : 천무 유신
야마시타 쿠로가네는 1856년 실권자가 된 이후, 거침 없는 개혁을 통하여 일본을 바꿔나갔다. 그러나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개항이 아니라 중앙집권제화였고, 이를 통해 기존의 봉건 체제를 무너트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천황제의 폐지와 막부의 해체, 그리고 강력한 공화제 중앙집권 국가의 성립이었다. 그는 서구의 1848년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등 여러 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2,500년간 이어져온 천황의 치세를 끝내고 공화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아무리 일본의 실권자였더라도 무리였던 일이었다. 그의 지지자들과 부하들은 대신 야마시타 쿠로가네가 천황이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요구하였고, 그는 천황이 아니라 황제가 되어 전제군주제 황권을 내세워 개혁을 이어나가겠다고 답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전역의 여론은 들끓었고 에도막부와 천황은 야마시타 쿠로가네의 권위를 모두 파기하고 그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에도와 교토의 군대를 이미 야마시타 쿠로가네가 장악한 상태애서 쇼군과 천황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사다 쇼군은 시해되고[1] 고메이 덴노는 폐위당하였다. 고메이 덴노는 천황의 3종 신기를 야마시타 쿠로가네에게 건네주었고 야마시타 쿠로가네는 다음 날 자신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진정한 후손이자, 천명을 받은 황제임을 선포했다.
유신 전쟁
천황과 쇼군을 제압하였지만, 천황을 폐하고 쇼군을 죽인것만으로도 일본 전역에서의 반발은 충분히 거셌다. 순응하는 다이묘들도 있었지만 규슈 지역 등 일부 지역에서의 반란은 매우 극심하였다. 야마시타 쿠로가네가 아무리 식견이 뛰어났다고 해도 출신은 하급 사무라이였고 적군의 수는 많았기에, 내전 초기에는 교토를 빼앗기는 등 황제군이 밀려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개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야마시타 쿠로가네는 서방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서강 제국주의 열강은 다시 일본이라는 시장을 놓칠 수는 없다며 적극적으로 황제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황제군은 영국의 신식 무기들을 지원받았고, 자금 역시 지원받았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후일 통상 특혜를 노린 영국의 호의였다. 어쨌든간에 신식 무기로 장착한 황제군은 반란군을 진압해나가기 시작했고, 개전 2년차인 1859년 규슈를 제외한 일본 전체를 수복했다. 1859년 황제군은 적군의 본거지인 규슈로 돌격하였고, 큰 피해를 입었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해 1860년 전역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후 1860년 천무 연호를 발표하였다.
만선 합방
말년
평가
가족 관계
주변 국가에 대한 인식
여담
- 천무 유신의 과정이 다소 뜬금이 없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아 현대인이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개벽한게 아니냐는 농담이 있다. 황제에 대한 농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19세기 중반의 인물이 현대인이라고 오해받을만큼 능력이 뛰어났다는 칭송의 의미가 있어 황실에서도 이 농담을 굳이 막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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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인류제국 문장 반전.png 전 인류의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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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 할복 설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후대의 시신 조사 결과 시해된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