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역냉전)

Communist 1968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5월 29일 (월) 21:3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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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1968 2023, CC-0

유라시아 합중국
Соединенные Штаты Евразии
Soyedinennyye Shtaty Yevrazii
누벨프랑스 어기.svg 누벨프랑스 국장.svg
국기 국장
Евразия царит
유라시아가 군림한다
상징
국가 자유 러시아 찬가[1] #
(Гимн Свободной России)
국화 해바라기
국조 쌍두독수리
역사
러시아 공화국 출범 1917년 3월 15일
유라시아 합중국 출범 1948년 1월 1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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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누벨프랑스 국장.svg 모스크바 (Москва)
55°45′21″N 37°37′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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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유라시아 합중국(러시아어: Соединенные Штаты Евразии 소예지니녜 슈타티 예브라지[*])은 아시아유럽에 걸친 연방제 민주공화국이다.

상세

상징물

국가


러시아어 가사 한국어 해석

Да здравствует Евразии,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и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Могучая держава, безбрежный океан!
Борцам за волю слава, развеявшим туман!
Да здравствует Евразии,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и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Леса, поля, и нивы, и степи, и моря,
Мы вольны и счастливы, нам всем горит заря!
Да здравствует Евразии,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и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자유로운 나라, 유라시아 만세!
자유로운 자연은 위대한 나라의 운명이다!
거대한 힘, 넓은 바다!
자유의 전사들에게 영광을 돌려라, 안개를 몰아내라!
자유로운 나라, 유라시아 만세!
자유로운 자연은 위대한 나라의 운명이다!
숲에서, 들판에서, 옥수수밭에서, 스텝에서, 바다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하다, 우리는 모두 새벽과 함께 빛나고 있다!
자유로운 나라, 유라시아 만세!
자유로운 자연은 위대한 나라의 운명이다!

역사

1920년 혁명 이후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승리한다. 케렌스키는 1차 세계 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의 경제를 복구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좌파 계열의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가 유력한 차기 대통령으로 떠오르게 되나, 울리야노프는 1924년 대통령 선거 도중 급사하고 케렌스키가 그 결과 재선에 성공했다. 비록 1기 임기는 실망스럽게 끝났지만, 1925년, 미국대공황이 일어나자 케렌스키는 부하린 경제장관 등 유능한 경제 관료들을 등용해 경제 위기를 슬기롭게 해쳐나갔다. 1928년 대선에서는 강경 보수파 레프 브론시테인을 상대로 중도우파 성향의 경제부장관 니콜라이 부하린이 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부하린은 신경제정책(러시아어: 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을 추진한다. 이 정책은 점진적인 중공업 경제 육성과 경공업 육성을 병행하자는 취지에서 수립되었으나, 부하린이 장관을 맡았을때와 달리 힘을 얻지 못했다. 야권에서는 브론시테인의 측근 중 한명이었던 이오세브 쥬가슈빌리가 현재까지 유라시아 최대의 보수정당으로 군림하고 있는 정교회인민당을 창당해 브론시테인, 베리야 등 러시아 정계 보수파의 지지를 얻어 유력 대권주자로 성장한다. 1932년 대선에서, 부하린이 불출마를 선언한 상태에서 이오세브 쥬가슈빌리는 좌파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를 압도적인 표차[2]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1932년 집권한 이오세브 쥬가슈빌리 대통령은 1953년 사망할때까지 장기 집권하며 노바야 스델카(러시아어: Новая сделка)라 불리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중공업 산업을 육성시켰다. 또한 혁명 후 혼란한 사회상을 바로잡기 위해 엄벌주의 풍조를 강화하고 정교회 윤리에 기반을 둔 "도덕주의 정치"를 펼쳤다.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쥬가슈빌리 대통령은 모스크바에 남아 전쟁을 지휘했으며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희생된 끝에 1945년 러시아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후 러시아 정부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만주, 위구르, 몽골 등 러시아에 친화적이었던 여러 국가들을 통합하여 유라시아 합중국을 출범시킨다. 쥬가슈빌리 대통령은 전쟁 이후에도 1948년,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유라시아 합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법률적 기초를 쌓았다.

1953년 쥬가슈빌리 대통령의 급사 이후,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1956년까지 대통령직을 이어 수행하였다. 말렌코프는 쥬가슈빌리 행정부의 남은 숙제들을 처리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당[3]니키타 흐루쇼프가 압도적인 표를 얻어[4] 전후 최초로 좌파로의 정권교체를 이루게 된다. 그럼에도 말렌코프 행정부 시절, 대통령의 3연임이 금지되고 정부 주도 하에 재건 정책이 수립되는 등 일부 시급한 조치들이 통과되기도 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위대한 사회, 이른바 벨리코예 옵시셰스트보(러시아어: Великое общество)라 불리는 복지 정책을 펼쳐 높은 지지를 얻었고, 1960년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한다. 그의 정책에 따라 유라시아 전역에 무료로 주택이 공급되었고 소득 수준도 크게 향상되어 1억명에 달하는 중산계층이 성장한다. 그러나 흐루쇼프 대통령은 말년 매파적 정책을 펼치며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무리하게 군대를 파병했다. 1964년 대선에서는 흐루쇼프의 지지를 얻은 아나스타스 미코얀[5]이 연방 대통령이 되나, 아프간 전쟁에서 무능한 대응으로 반전 운동을 촉발시켰다. 또 사민당 내에서도 반전파가 대선 독자 출마를 감행하며 좌파의 표가 분산된다. 결국 1968년 대선에서 아프간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정교회인민당 소속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미코얀을 근소히 꺾고[6] 당선된다.

브레즈네프 대통령은 흐루쇼프로 인해 손상된 러시아의 정신을 회복하겠다고 공약했으며, 독일 출신의 유대인 외교관 겐리흐 키신저를 내세워 유럽의 사회주의 정권과 손을 잡는 라즈랴드카(러시아어: разрядка) 외교전을 펼쳤다. 또한 1973년,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유치시키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중도보수적 개혁 정책을 실시해, 환경보존국을 설치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하였다. 브레즈네프의 높은 지지도를 바탕으로 1976년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집권한다. 하지만 체르넨코가 집권한 1976년~1980년은 유라시아의 경제 성장률이 5%에서 2%로 떨어지는 불황기였고, 20%에 달하는 고금리로 금융업의 붕괴가 대두되었다.

이런 불만스러운 경제 상황을 배경으로, 경제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운 유리 안드로포프 KGB 국장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안드로포프는 몇가지 경제 개혁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며 높은 지지를 얻었으며, 1984년 재선을 앞두고 사망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동정표를 얻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낸다. 고르바초프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사회적으로는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제3의 길(러시아어: третий способ)[7] 정책을 통해 경직된 유라시아의 경제를 개혁하는데 성공한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는 미국과 이어진 냉전이 끝나게 된다. 남한, 서독, 호주 등 주요 공산권 국가들이 체제의 모순으로 붕괴하며 팍스 유라시아나(라틴어: Pax Eurasiana) 시대가 도래한다. 1991년, 최대의 적국이었던 미국마저 붕괴되며, 1990년대 내내 유라시아가 독주하게 된다.

1992년 대선에서는 중도보수파 보리스 옐친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음주운전 사고로 급사하였으며 고르바초프 정부 하에서 총리를 맡은 알렉세이 리시코프 사민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대권을 확보한다. 리시코프는 2000년까지 집권하면서,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이 남겨놓은 숙제들을 처리하며 높은 지지를 얻었다. 리시코프의 경제 정책은 고르바초프의 한계점을 보다 실용적으로 보완하면서 장점은 계승한 완전체로 평가받았으며 현대에 들어서 리시코프는 고르바초프보다도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00년, 총 20년에 달하는 좌파 세력의 장기집권을 뒤로하고 대테러 작전에서 공을 세운 젊은 KGB 출신의 장교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다. 푸틴은 당시 러시아 정계에서 보기 힘든 강경 매파 성향이었다. 2001년 9월 11일, 유라시아의 중동 정세 개입에 반발한 테러집단 알카에다가 민항기를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에 충돌시키는 9월 11일의 비극(러시아어: Трагедия 11 сентября)을 일으켰다. 푸틴은 즉각 테러와의 전쟁(러시아어: война с терроризмом)을 선포, 알카에다의 배후 근거지로 지목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당위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유라시아 정부는 막대한 손실을 뒤로 하고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전쟁으로 발생한 막대한 부채는 2008년 금융 위기 사태를 일으켰다. 푸틴 대통령은 최종 지지율 4%라는 처참한 성적을 뒤로하고 좌파에게 정권을 다시 내어준다.

2008년 집권한 중도좌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8]는 보다 온건한 대외 정책을 펼치며, 금융위기의 잔재를 수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본래 우파 출신이었던 넴초프의 성향은 겐나디 주가노프 등 당내 강경좌파에게 공격받게 된다. 2012년 대선에서 근소한 표차[9]로 승리한 넴초프는 소극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2016년까지 별다른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결과, 2016년 다시 보수 강경파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집권한다.

푸틴의 친구이자 부하였던 메드베데프는 임기 시작과 동시에 배후에 푸틴을 두고 있다는 의혹을 받으며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중동의 전쟁 상태와 2020년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대응을 보이며 지지율을 견인했다. 2020년 대선에서 메드베데프는 재선에 성공한다.


  1. 공식 곡명은 "유라시아 합중국의 국가" (Евразийские Соединенные Штаты)
  2. 쥬가슈빌리(인민당) 61%, 크룹스카야(혁명당) 25%
  3. 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러시아 공산당이 1948년 현실주의 노선에 따라 당명을 바꾸어 탄생한 정당으로, 흐루쇼프가 당선될 때에는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여 온건해진 상태였다.
  4. 흐루쇼프(사민당) 58%, 베리야(인민당) 39%
  5. 미그사를 창립한 아르툠 미코얀의 형이다.
  6. 브레즈네프(인민당) 43%, 미코얀(사민당) 42%, 코시긴(반전좌파 무소속) 18%
  7. 유라시아로 망명한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 안톤 기든스(Антон Гидденс)가 제시한 정책 방향으로, 신자유주의와 사회진보주의를 융합한 기조를 의미한다.
  8. 본래 우파 성향이었으나, 푸틴과의 정교회인민당 내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것을 계기로 사회민주당에 입당하며 좌파로 전향했다.
  9. 넴초프(사민당) 48%, 나자르바예프(인민당)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