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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7·72대 수상 겐다 미노루 源田 実 | Genda Minor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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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4년 8월 16일 |
대일본제국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카게정 現 일본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아키오타정 | |
사망 | 1989년 8월 15일 (향년 84세) |
도쿄도 카스미가세키 | |
재임 기간 | 제67대 수상 |
1973년 10월 20일 ~ 1977년 10월 19일 | |
제68대 수상 | |
1977년 10월 20일 ~ 1979년 12월 17일 | |
제69대 수상 | |
1979년 12월 18일 ~ 1983년 12월 17일 | |
제70대 수상 | |
1983년 12월 18일 ~ 1985년 4월 9일 | |
제71대 수상 | |
1985년 4월 10일 ~ 1989년 4월 9일 | |
제72대 수상 | |
1989년 4월 10일 ~ 1989년 8월 1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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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67·72대 총리. 16년 가까이 수상직을 재임하며 전후 최장 재임 수상으로 남았다. 16년 가까운 그의 집권기간동안 일본은 미국 다음 가는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또한 이 시기 자유민주당은 최전성기라고 평가받았다.
1924년에 일본해군병학교 52기로 졸업했다. 1928년에 19기 비행학생으로 입과하여 파일럿이 된다. 요코스카 항공대 분대장, 제2연합항공대 참모, 요코스카 항공대 비행대장, 제1항공전대 참모 등을 지냈다. 1932년부터 겐다서커스(源田サーカス)라 하여 곡예비행을 다니기도 했다.
종전 후 연합국이 천황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거사를 일으킨다는 황통호지 작전(皇統護持作戦)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343항공대의 에이스였던 시가 요시오 소좌를 포함해 총 23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실제로 작전이 실행되는 일은 없었다. 최종 계급은 해군 대좌.
전후에[1] 1954년 방위청[2]에 들어가 해사 동기들과 함께 국방군 내 사조직인 '혁신회'를 결성하여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공군본부 장비부장, 항공총대 사령관 등을 지내고 사나기 사다무에 이어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후 1962년에 퇴직했고 자민당 참의원으로 활동하며 강경한 발언으로 일본 우익에 의해 차기 총리감으로 급부상하였다. 이후 1973년 1월에는 국방상에 임명되어 군을 장악하였고, 같은 해 석유파동이 터지자 국방군을 조종하여 다나카 내각의 실정을 규탄하며 강하게 반발했고 공공연히 쿠데타 위협을 가했다. 심지어 다나카가 사임하지 않을 경우, 동부방면군이 도쿄로 진군할 계획까지 마련되었는데, 이를 쇼와 48년 정국이라 한다.
국방군은 겐다가 일본의 지도자가 되지 못하거나, 사회당이 집권하려 하거나, 겐다가 도쿄 진군을 요청한다면 이를 실천하려 하였다. 이는 겐다가 권좌에 앉을 것을 촉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궁지에 몰린 다나카는 겐다에게 수상 서리에 오를 것[3]을 요청하였다. 겐다는 6개월 한시 비상대권을 자신에게 부여할 것, 헌법을 개정해 천황의 대권을 강화하고, 수상 선출방식을 간선제로 하고 그 권한을 강화할 것 등을 조건으로 내걸고 수락했다.
이에 따라 겐다는 수상 서리에 임명됨과 동시에 비상대권을 쥐었고, 이를 통해 헌법 개정안을 의회에 상정하여 통과시킨 후 1973년 3월에 국민투표에 붙여 76%의 찬성을 얻었다. 새 헌법에 따라 5,278명의 수상 선거인단으로 하는 간선제 방식의 수상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바뀐 헌법에 따라 67·72대 수상을 역임하였으나, 1989년 8월 15일 수상관저에서 뇌혈전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