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원평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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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제57-59대 내각총리대신 노태우 자작 盧泰愚 子爵 | Viscount, Roh Tae-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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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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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2월 4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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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 용진마을 (現 경상북도 달성군 용진길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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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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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6일 (향년 8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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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종로구 대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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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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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중구 장충원 장면총리대신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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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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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대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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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n월 n일 ~ 1997년 n월 n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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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대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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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n월 n일 ~ 2000년 n월 n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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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대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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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n월 n일 ~ 2001년 n월 n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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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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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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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 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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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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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노병수, 어머니 김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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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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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 노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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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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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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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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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소영, 노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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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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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국민학교 (졸업) 대구공업중학교 (전학) → 경북중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과대학 (법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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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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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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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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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cm, AB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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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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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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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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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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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3, 14, 15, 16, 17, 18, 19, 2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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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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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서대문구·은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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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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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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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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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冠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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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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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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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의 제43-45대 내각총리대신. 신파의 파벌인 남청회의 회장을 지내며,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발맞추어 북방외교를 펼치고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였다. 또한 일본과도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이었고 노태우-호소카와 선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회의를 자주 하는 대통령
총리대신 취임 당시 한국 역시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노태우는 총무장관과 외무대신 등 경제와 별 관련없는 부처를 거쳤기에 경제위기 대처능력에 대한 기대감이 낮았고[2], "3일이면 오래 간다", "물태우" 등의 별명으로 여론으로부터 전방위로 불신을 샀다.
그러나 노태우는 온화한 인품과 특유의 근성으로 이런 위기를 돌파했는데, 각계에 전화를 걸어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으로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고, 적지 않은 사안들을 참모나 대신들에게 위임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결국 재임기 별 탈없이 원만하게 이끌어 나간다는 평으로 바닥을 치던 지지율은 후반기에 60%를 돌파하게 되면서 경제 위기를 돌파하였고, 결국 '물태우'라는 비아냥에서 시작했지만 '회의를 자주 하는 총리대신'으로 대표되는[3] 근성의 총리이자 명재상라는 평가를 얻는데 성공한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 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했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었으며 기본적인 거동조차 하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쥐고 움직이는 불편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4] 2007년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과 매스컴에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5]
2021년 숙환으로 인하여 대한의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21년 10월 26일, 향년 88세로 병상에서 사망했다.[6]
생애
주호영 내각
여담
어록
선거 이력
소속 정당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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