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솔피/3

서수한치시기

이 글을 보려면 오른쪽 '펼치기' 버튼 클릭

틀:서수한치시기


서수한치시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서수[1]
瑞穗
Japan under Korea rule (Seosu)
대한제국식민지(외지)
국기 휘장
한왜동조[2]
韓倭同祖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
(34년 11개월 17일)
성립 이전 해체 이후
덕천 막부 서수 자치령
상징
국가(國歌) 애국가
(愛國歌)
지리
[ 펼치기 · 접기 ]
국가(國家) 대한제국 (1925) 대한제국
최대 도시 신내천현 경도부(敬都府)
면적 283,023km²
인문 환경
[ 펼치기 · 접기 ]
인구
총 인구
72,750,000명 (1941년)
민족 구성
한국인, 왜인, 중국인, 아이누인, 류큐인
공용 언어 한국어 (사실상 공용어)
왜어 (1910~1938)[3]
공용 문자 한글, 한자, 가나 문자
종교
국교
유교 (국가성리학)[4]
분포
신토, 불교, 기독교
주둔군 서수군
정치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1910~1940)
군사독재 · 충정 체제 (1940~1945)
국가원수 서수 천황
통치수반 동이총독
통치기관 동이총독부
왜왕 목인왕 (1910~1912)
가인왕 (1912~1926)
유인왕 (1926~1945)
경제
기타
연호 광무 (1910~1919)
대흥 (1919~1945)
현재 국가 일본국 (1925) 서수 자치령
동이총독부 청사
강도역 앞 대명소로

개요

조선공화국 최고 등급의 상훈이다.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처음 제정되었으며 1910년 망국 이후 폐지되었으나 1998년 조선공화국에서 다시 부활했다.

역사

대한제국

(생략) 옛날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꿈에서 금척(金尺)을 얻었는데 나라를 세워 왕통을 전하게 된 것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천하를 마름질해서 다스린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대훈장의 이름을 ‘금척’이라고 하였다. (생략)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17일 양력 3번째기사

1900년 4월 17일 대한제국 최고 훈장으로 처음 제정되었다. 훈장의 이름은 과거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꿈에서 얻은 금척(金尺)[5]에서 유래됐다.

원칙적으로 대훈위 금척대수장은 황실만이 수훈받을 수 있었으나 대훈위 서성대수장을 수훈받은 황실 친적이나 문무관도 특별한 공훈이 있을 시에 수훈할 수 있었다. 수훈자는 600원에서 1000원 이내의 연금 혹은 2000원 이내의 일시하사금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이는 현대 화폐 가치로 보면 각각 4500만원에서 7500만원, 1억 5000만원의 가치로 볼 수 있다.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독일 제국 황자에게 최초로 수여된 이후 일본 내각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 대한제국 충신의 대명사로 불리는 민영환, 이에 대척점에 서 있는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을 포함한 24명의 인물들이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수훈했으며[6] 대훈위 금척대수장은 이후 1910년 일치시기에 접어들면서 그 권위를 잃게 된다.

조선공화국

대훈위 금척대수장은 1998년 9월 15일 게오르기 리 대통령 시절 대통령령을 통해 다시 부활하게 된다.

형태

규정

수훈자 목록

대한제국

이름 수훈 날짜 직책·작위 국적
이형 불명 황제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이척 불명 황태자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이은 불명 황태자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1904년 3월 20일 황자 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이토 히로부미 1904년 3월 24일 추밀원 의장, 후작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이승응 1904년 9월 16일 완평군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1905년 5월 23일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민영환 1905년 12월 1일 육군부장, 충정공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조병세 1905년 12월 2일 특진관, 충정공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이강 1906년 4월 9일 의친왕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레오폴트 클레멘스 필리프 아우구스트 마리아 1907년 2월 27일 대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상선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하세가와 요시미치 1907년 8월 27일 육군대장, 남작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1907년 10월 18일 친왕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가쓰라 다로 육군대장, 후작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도고 헤이하치로 해군대장, 후작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야마가타 아리토모 1908년 1월 29일 추밀원 의장, 육군대장, 공작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사이온지 긴모치 내각총리대신, 후작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다케다노미야 쓰네히사 1908년 5월 11일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1909년 7월 21일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이재면 1909년 9월 22일 완흥군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윤택영 해풍부원군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이재완 완순군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1910년 4월 16일 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민병석 1910년 8월 26일 궁내부대신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이완용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이재각 1910년 8월 27일 의양군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이준용 영선군 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개요

대한국의 제43-45대 내각총리대신. 신파의 파벌인 남청회의 회장을 지내며,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발맞추어 북방외교를 펼치고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였다. 또한 일본과도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이었고 노태우-호소카와 선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회의를 자주 하는 대통령

총리대신 취임 당시 한국 역시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노태우는 총무장관과 외무대신 등 경제와 별 관련없는 부처를 거쳤기에 경제위기 대처능력에 대한 기대감이 낮았고[7], "3일이면 오래 간다", "물태우" 등의 별명으로 여론으로부터 전방위로 불신을 샀다.

그러나 노태우는 온화한 인품과 특유의 근성으로 이런 위기를 돌파했는데, 각계에 전화를 걸어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으로 경청하는 자세를 보였고, 적지 않은 사안들을 참모나 대신들에게 위임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결국 재임기 별 탈없이 원만하게 이끌어 나간다는 평으로 바닥을 치던 지지율은 후반기에 60%를 돌파하게 되면서 경제 위기를 돌파하였고, 결국 '물태우'라는 비아냥에서 시작했지만 '회의를 자주 하는 총리대신'으로 대표되는[8] 근성의 총리이자 명재상라는 평가를 얻는데 성공한다.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 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했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었으며 기본적인 거동조차 하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쥐고 움직이는 불편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9] 2007년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과 매스컴에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10]

2021년 숙환으로 인하여 대한의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2021년 10월 26일, 향년 88세로 병상에서 사망했다.[11]

생애

주호영 내각

여담

어록

선거 이력

소속 정당

기타

  1. 일본국의 병합 직후 칙령(勅令) 제318호 '일본국의 국호를 고쳐 왜로 칭하는 건(日本國의國號를改해瑞穗로稱하는件)'이 발령되면서 이름이 '서수'로 환원되었다. 이후 서수는 대한제국의 외지으로서의 이름으로 간주되었다.
  2. “한국(韓國)과 왜(倭)는 같은 조상(同祖)에서 나온 동족이다”라는 의미의 표어로 민족 말살 통치기의 상징 어구로 잘 알려져있다.
  3. 1938년부터 일본어는 '국어(한국어)상용화정책' 또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왜어 교육을 일절 금지하고 한국어 사용을 법적으로 공용화하여 왜어를 쓰는 경우 처벌했다.
  4. 대한국 국제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외지(식민지)에는 헌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헌법이 적용되는 내지(본토)에서조차 국가신토의 탄압을 받아 종교의 자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5. 금으로 된 자를 뜻한다.
  6. 황제, 황태자는 기본으로 수훈했기에 이 수에서 제외한다.
  7. 전임 총리대신인 조순은 경제관계 대신직 중 최고 요직인 통상산업대신과 탁지대신을 거쳤다.
  8. 회의를 굉장히 자주 하는 회의이라 붙은 별명.
  9. 그나마도 칩거생활 초기에나 가능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있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사실상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 놓였다. 역대 총리대신들 영결식에도 다 불참했다.
  10. 노태우의 마지막 공식 석상 모습이다. 당시에도 말을 어눌하게 하고 지팡이 없이는 거동이 힘들 정도로 몸이 불편했었다.
  11. 공교롭게도 박정희 전 총리대신과 사망 날짜가 같다.